소년만화, 돌아오다
만화가 더 이상 청소년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게 되면서 “소년만화”라는 용어 역시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 특히 기존 만화 시장이 가지고 있던 저변이 일반 대중으로까지 넓어진 한국 웹툰 시장에서 과거 만화계를 양분하던“소년만화”라는 장르의 구분은 이제 거의 무의미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잘 만들어진 소년만화에 대한 갈증이 만화를 애호하는 이들이 존재하는데,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최근 일본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귀멸의 칼날>이나 그 이전 몇 십 년간 세계 만화시장을 주도했던 “원나블”등은 이견의 여지가 없는 “소년만화”이다.
한국 웹툰 시장에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웹툰 저변의 확대에 따른 장르의 다양화로 인해 그 지형이 좁아졌을지언정 여전히 “소년만화”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들이독자들의 요구로 인해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아직도 이처럼 낡아 버렸다고 생각되는 소년만화를 여전히 원하는 것일까?
딱 잘라 말하는 것은 쉽지 않으나 그 이유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는 있을 듯 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소년만화가 추구하는 본질에 있을 것이다. “소년만화”라는 장르를 한마디로 정형화 하는 것은 매우 지난한 일인데 기실 “소년만화”란 장르적 분류라기보단 독자층을 중심으로 한 분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분류적 난감함에도 불구하고 감각적으로 ‘이것은 소년만화다!’ 라고 느끼게 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소년만화”로 분류되는 일군의 만화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우정, 용기, 사랑, 노력 성장등의 가치가 우리들의 감각을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우리 웹툰 시장에서 더 이상 잘 만든 소년만화를 만나기 힘든 이유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만화의 주력 소비층이 더 이상 청소년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이러한 청소년들 조차도 기존 “소년만화”가 추구했던 가치나 감각들을 유치한 것, 혹은 진부한 것으로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만화 안에서 조차 지극히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는 경향성은 특정세대에 국한된 것이 아닌 세상이 되어버렸고 기존 “소년만화”들이 추구하던 이 가치들은 어느새 감각적 사치로 비춰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황무지에서도 꽃은 피듯이 이 같은 척박한 환경 안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는 작품들은 있는 법이며, 주변의 환경이 고단할수록 그런 작품들은 더욱 빛나 보인다. 바로 <신도림>이 그러한 작품인데, 투박한 그림체로 악다구니를 쓰는 키즈들의 외침으로 가득찬 이 작품은 한동안 한국 만화에서 찾기 힘들었던 정통 소년만화의 명맥을 계승하고 발전시켜가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감히 “소년만화”가 여기 다시 돌아왔음을 알리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년들 저항하다.
<신도림>은 세상이 방사능으로 인해 지옥이 된지 6년. 서울의 지하철 아래 지어진 지하도시 신도림을 둘러싼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천둥과 점보는 키즈라고 불리는 돌연변이로 키즈란, 방사능으로 인해 초인적인 능력을 얻은 청소년들을 말한다. 이 키즈의 특징은 성장판이 닫히지 않은 청소년들에게만 초인적인 능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키즈의 특징은 자연스럽게 <신도림>이라는 작중 모든 중심인물들이 청소년일 수 밖에 없는 이유로 작용한다. 얼핏 스토리라인만 보자면 전형적인 뉴클리어 아포칼립스물 같지만 <신도림>에 내재되어 있는 서사의 방점은 이 키즈라고 불리우는 영원한 소년들이 기존의 낡고 불합리한 체제에 대한 저항과 그 과정에서 이루게 되는 성장에 찍혀 있다.
작중 살아남은 이들의 마지막 대피소로 여겨지는 신도림은 사실상 구체제의 답습일 뿐이며 그곳을 지배하는 이들은 주인공 일행들과 같은 키즈이지만 키즈가 아닌 이들이다. 작중 최종보스의 포지션을 취하는 “총리”와 그 “총리”가 구축한 신도림의 수직적인 조직은 방사능 지옥을 만든 기성세대들의 시스템을 그대로 닮아있다. 주인공인 천둥과 점보는 이런 신도림에 반발, 자신들만의 지하도시인 비돌을 건설하려고 하는데 이 행위야 말로 과거 “소년만화”들이 보여주었던 소년들의 혁명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혁명의 과정에는 당연하게도 소중한 친구(럭키), 믿을 수 있는 스승(타이거D)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극복하고 성장해 마침내 대적 앞에 서는 소년만화 주인공의 클리셰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다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클리셰를 다루는 방식인데, <신도림>은 기존 소년만화들이 보여주었던 컷 단위 전투씬의 세밀함을 스크롤을 통해 훨씬 스피디하고 웅장하게 담아낸다. 이 액션 연출이 주는 쾌감은 웹툰이기에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에 적절하게 녹아든 B급 감수성으로 낡은 소년만화를 낡았다고 느끼지 않도록 해주는 힙함을 유지한다. 이러한 특징은 작품 곳곳에서 나타나는데 그중 백미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주인공 일행의 주특기라고 할 수 있는 “다구리”다. 일반적인 소년만화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치사함. 그리고 그 치사함을 당당하게 활용하여 곤경을 벗어나는 모습은 이전 소년만화의 클리셰에서 보여주었던 동료와의 협동과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이 존재하기에 <신도림>은 연출과 캐릭터라는 측면에서 기존 소년만화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정의바보에서 벗어난 신선함과 현재적 감각을 제시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낡은 장르 안에서 “힙”함을 유지하는 이 힘이 바로 독자이 <신도림>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위와 같은 “힙”함의 연장선에서 주인공 키즈들의 능력도 매우 인상적인데, 이들은 각각 야구, 권투, 당구, 판치기 등을 특성으로 가지고 있다. 야구와 권투의 경우 여전히 메이저스포츠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다른 일행들의 특기인 당구, 판치기 등은 자칫 문제아들의 특기로 보여지기 십상이다. 즉, 현실의 관점에서 보자면 다분히 문제아인 이들이 세계를 바꾸는 것이 바로 <신도림>이라는 작품의 핵심 장치 중 하나로 작용한다.
이를 통해 작품은 기존 체제에 대한 반발과 저항이라는 작품의 중심 서사를 더욱 공고하게 하며 세상을 바꾸는, 혹은 혁명을 이루어내는 주체는 “피도 안마른 녀석들”이라는 부제 처럼 기존의 상식에 머리게 굳지 않은, 철이 덜 들었다는 평가를 받지만 자신들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소년, 혹은 청년들이라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이들이 보여주는 사나움, 어수룩함, 치기 어린 모습들이 단점이 아니라 세계를 향해 대항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라는 것을 작품은 이들의 성장과정을 통해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지점이야말로 지금_여기의 소년만화에 어울리는 감각이 아닐까 생각된다.
소년만
화의 가능성
“소년만화”에서 추구되는 가치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본질이 결국 고대 영웅서사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영웅서사에 우리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결국 숭고한 영웅의 일대기에서 범인凡人은 삶에서 느끼기 힘든 카타르시스를 추체험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사 이래 인간이 끊임없이 추구하고 갈망했던 영웅서사. 이 서사의 만화적 형상화가 결국 “소년만화”라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 과한 해석일까? 이러한 지점에서 소년만화는 비록 낡았을지언정 결코 그 명맥이 끊어질 수 없는 것이다.
<신도림>은 주인공 일행들의 저항과 혁명을 통해 위와 같은 영웅서사를 유려하게 구현해 내는 것을 넘어 지금_여기에 소년 만화가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기존의 소년만화가 가지고 있었던 감각이 낡았다면 그것을 바꾸면 된다. 중요한 것은 형태가 아니다. 형태가 바뀌어도 추구하는 가치가 여전하다면 그것은 여전히 소년만화로 역할을 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측면에서 <신도림>의 주인공들이 꾸려나가는 저항과 혁명의 여정은 한국 소년만화의 새로운 여정 중 하나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