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과의 인터뷰〉 : 남자주인공 뜻대로 된다는 보장은 못 합니다!
뛰어난 능력을 갖춘 미남은 언제나 로맨스물의 남자주인공으로 환영받는다. 〈꽃보다 남자〉, 〈파리의 연인〉, 〈시크릿가든〉, 〈김비서가 왜 그럴까〉 등 수많은 재벌물들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남자주인공이 고압적으로 굴어도,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아도, 때때로 여자주인공을 통제하려 해도, ‘재벌남’은 너무나 매력적으로 느껴지곤 한다. 경제력 차이를 이유로 상대를 모욕하는 행동조차 남자주인공의 매력 포인트가 된다. 재벌물에서 재벌이 여자주인공을 쟁취하는 방식이란 으레 그런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최근에는 〈아기가 생겼어요〉, 〈아내가 돌아왔다〉, 〈사내맞선〉 등 ‘까칠한’ 재벌보다는 ‘다정한’ 재벌이 등장하는 웹툰들도 많은 인기를 얻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재벌물은 한 가지 조건을 전제로 만들어진다. (적어도 작중에서) 재벌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은 없다! 까칠한 방식으로든 다정한 방식으로든 서사는 재벌 남주의 의지대로 흘러가고, 여자주인공은 반드시, 필연적으로, 무조건 사랑에 빠지게 된다. 회사의 명운도 여자주인공의 운명도 모두 그의 손에 달려있는 셈이다.
△ 〈재벌과의 인터뷰〉 3화
이러한 재벌물 특유의 절대적 규칙을 뒤집은 작품이 있다. 현재 다음에서 연재 중인 〈재벌과의 인터뷰(이하 ‘잽터뷰’)〉는 재벌 3세인 ‘양서준’을 남자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결코 그의 손에 절대적 결정권을 쥐여주지 않는다. 우다 작가는 비서 ‘유능’의 입을 빌어 이렇게 선언한다. “양서준이 네 뜻대로 된다는 보장은 못합니다!” 과연 그 말대로 〈잽터뷰〉에서는 서준의 의지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하나도 없다.
서준과 지은의 첫 만남은 스웨덴에서 트래킹하던 중 지은과 함께 조난을 당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단둘이 셸터에 고립된 상황이라니 ‘로맨틱’한 연출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잽터뷰〉는 로맨스장르 특유의 성적 긴장감을 과장되게 그려내지 않는다. 근육이 강조된 지은의 캐릭터 디자인, 위기를 유능하게 타파하지 못하는 서준의 행동, 연애 및 결혼과 무관한 대화들. 1화만 감상하더라도 〈잽터뷰〉가 기존의 재벌 로맨스 문법과는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위기 속에서 강렬한 생의 의지를 공유하고, 그 과정에서 서준은 지은에게 감사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감사는 지은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호기심으로 나아간다.
귀국 이후, 서준은 지은의 존재를 궁금해하며 다시 만나고 싶어 한다. 자신이 원한다면 충분히 공항의 모든 출입국 기록을 뒤져서라도 지은을 찾아갈 수 있지만, 지은이 당혹스러워할 것이 우려되어 그런 방법을 택하지 않는다. 허락 없이 상대방의 뒷조사를 하지도 않고, 경제적으로 압박하지도 않는다. 이 정도면 꽤 훌륭한 남자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도 〈잽터뷰〉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한다. 그건 그냥 당연한 거라고. 사람이 사람에 대해서 알고 싶을 때는 원래 좀 더 정중해야 한다고.
△ 〈재벌과의 인터뷰〉 9화
△ 〈재벌과의 인터뷰〉 10화
서준이 지은을 만나기 위해 거듭 문학 공모전을 개최하고자 하자 유능이 말한다. “두 번째 만남은 한쪽의 일방적인 의지만으로는 결코 성사될 수 없습니다. (…생략…) 그분을 자유의지를 지닌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정말로 상무님께서 바라는 바입니까? (9화)” 그 말에 비로소 서준은 자신의 애정이 일방적이고 왜곡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서준의 꿈속에서 지은은 여러 이상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며 “아무래도 상관없잖아요? (5화)”라고 말하지만… 상관없지 않다! 〈잽터뷰〉가 보여주고픈 세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세계가 아니다. 지은 역시 꿈속의 존재가 아니라 서준과 같은 사람이므로. 지은의 의지와 무관하게 공모전을 열었을 때는 만남이 실패로 돌아가고, 서준이 지은의 의지를 존중하기로 결심했을 때에서야 비로소 재회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 〈재벌과의 인터뷰〉 15화
〈잽터뷰〉에서 재벌물 장르 문법, 상대를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사랑 방식은 로맨틱한 것이 아니라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묘사된다. 서준이 “내 카드는 나! 그리고 내 대필작가! 오직 이 둘만 쓸 수 있다.”라고 외치는 장면은 임팩트 있는 로맨스 컷이 아니라 그저 실패해버린 농담에 불과한 것으로 그려진다. 돈으로 사람을 휘두르고, 일방적인 애정을 쏟아내고, 집착과 통제를 사랑으로 포장하는 건 드라마에서나 보라고, 작가가 작품을 통해 거듭 말하는 것이다.
〈재벌과의 인터뷰〉는 ‘재벌이 여자를 욕망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이야기’인 작품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 질문을 주고받으며 알아나가는 인터뷰 과정처럼 서준과 지은은 서로의 존재를 알아가게 될 것이다. 시즌 1이 끝날 때까지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적 관계는 크게 진전되지 않았고, 이에 대해 작가 스스로도 작중에서 로맨스물이 이래도 되느냐는 독백을 보여주지만… 두 사람이 서로의 실제 삶과 의지를 자세히 들여다볼 때 그들의 관계는 천천히 나아가게 될 것이다. 상대의 자서전을 집필하는 과정처럼. 〈잽터뷰〉가 보여주는 사랑의 방식이란 그런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