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를 부리는 부훈장
제주에는 ‘신비의 도로’라는 이름의 도로가 있다. 이 길은 분명 눈으로는 오르막처럼 보이는데 놓아둔 물건이 굴러 내려간다. 착시현상으로 일어나는 일이지만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조화를 부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이 도로는 ‘도깨비 도로’라는 별칭이 더 유명하다. 이처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특이한 일이 벌어지면 우리는 도깨비 같은 존재를 떠올린다. 전설 속 도깨비들은 특별한 능력들로 인간들에게 뜻하지 않은 행운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골탕을 먹이기도 한다. 사람들은 도깨비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정성껏 잘 대접하면 도깨비가 집안에 부귀영화를 가져다준다고 여겼다. 그러나 행여나 대접에 소홀하거나 약속을 어기면 한순간에 패가망신하는 화를 입기도 한다. 그러니 도깨비들은 사람들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런데 제주에 살았던 부훈장은 이런 도깨비를 수족처럼 부린 사람으로 전해진다. 웹툰 <도깨비 훈장>은 바로 이 부훈장이 부리던 물도깨비 ‘영감’, 불도깨비 ‘도채비’와 그의 후손 윤정이 부훈장이 남긴 유언장을 찾아나서는 이야기이다.
△ <도깨비 훈장> 프롤로그 中
사람이 도깨비를 부린다는 것이 가능할까? <삼국유사>에는 부훈장처럼 도깨비를 수하로 둔 비형랑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비형랑은 도깨비들을 시켜 하룻밤만에 돌다리를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흔치 않다. 이야기 속 물도깨비의 이름인 ‘영감’은 제주에서 도깨비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영감이라는 말은 나이 든 사람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지만 과거에는 영감이 높은 직책의 관리들을 부르던 말이었다. 영감 대신 ‘참봉’이라고도 하는데 이것 역시 벼슬 이름이다. 그만큼 도깨비를 높여 부르며 달래야 했던 존재로 여겼다는 것이다.
작가는 부훈장의 특별한 능력의 근원을 서천꽃밭에서 찾는다. 서천꽃밭은 제주신화 속 생명의 공간이다. 삼승할망은 서천꽃밭에서 자라는 꽃들로 사람들에게 생명을 점지한다. 부훈장은 많은 꽃들 중에서 아주 특별한 꽃으로 태어났다. 그래서 부훈장은 평범한 인간들은 볼 수 없는 도깨비들을 만나고 인연을 맺게 된다. 하지만 부훈장은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한다. 호기롭게 제주를 떠나 육지로 나가지만 오히려 시기와 질투로 배척당하고, 유일하게 자신을 따랐던 동생에게 마저 외면당하고 쓸쓸히 제주로 돌아온다. 날개가 꺾인 장수와 같이 비극적인 영웅의 모습으로 말이다.
불도깨비의 소원
도깨비들은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도깨비 훈장>에서는 반대로 도깨비의 소원을 부훈장이 들어준다. 물도깨비의 소원은 자유자재로 변신할 수 있는 감투를 원하는 간단한 것이었지만 불도깨비의 소원은 특이하게도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도깨비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순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부훈장은 불도깨비의 소원을 들어준다. 불도깨비는 왜 사람이 되고싶어했을까. 사람이 되면 영생을 포기해야 하고, 도깨비의 능력도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데 말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뱀파이어, 안드로이드와 같은 비인간적 존재들이 인간을 동경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들은 인간처럼 되는 것이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 여긴다. 그런데 불도깨비는 다른 의미에서 인간이 되고 싶어했다. 불도깨비가 바랐던 것은 부훈장과 같은 사람이 되어 곁에 있어 주는 것이었다.
△ <도깨비훈장> 76화 中
도깨비를 부리는 부훈장은 사람들에게 두려운 존재였다. 사람들은 부훈장을 같은 인간이지만 자신들과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고 여겼다. 부훈장은 가족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다. 유일하게 부훈장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준 동생마저 주변의 시선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부훈장은 항상 외로움을 느꼈다. 그것은 도깨비들의 능력으로도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였다. 불도깨비는 자신이 사람이 되어 부훈장의 응어리를 풀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불도깨비의 진정한 소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불도깨비의 소원이 과했던 것일까. 사람이 되고 싶었던 소원은 불완전하게나마 이루어졌지만 불도깨비는 믿었던 뱃사람들의 꾐에 넘어가고 만다. 홀로 육지로 간 불도깨비는 탐욕스러운 사람들에게 잡혀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이용당한다. 그렇게 불도깨비는 부훈장처럼 몸도 마음도 피폐해진 상태로 제주로 돌아온다. 곁에 있어주고 싶었던 부훈장은 이미 세상을 뜬 뒤였다. 그리고 이제는 불도깨비가 인간도, 도깨비도 아닌 상태로 외로움을 짊어져야 했다.
부훈장의 유언장
부훈장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미래를 엿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후손과 도깨비들에게 유언장을 남긴다. 우여곡절 끝에 찾은 유언장으로 불도깨비는 진정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도깨비로 다시 돌아올 수도 있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불도깨비의 선택은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도, 도깨비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의 현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불도깨비는 자신의 과거의 선택도, 지금의 모습도 바꾸지 않는다. 그것을 바꾸는 순간 자신이 부훈장을 생각하며 사람이 되고 싶었던 진정한 의미는 사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이 부훈장이 남기도 싶었던 진정한 유언인지도 모른다. 부훈장은 죽음을 앞두고서야 외로움을 느꼈던 자신의 곁에는 항상 도깨비들이 곁에 있어주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위험성을 알면서도 유언장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불도깨비의 선택은 부훈장의 꽃을 다시 살린다. 그렇다고 해서 부훈장이 다시 살아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꽃은 이제 부훈장과 불도깨비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도깨비를 생각하는 부훈장의 뜻이, 부훈장을 생각하는 불도깨비의 마음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불완전한 존재인 불도깨비는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 부훈장의 후손인 윤정과 물도깨비와 함께 진정으로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소중한 인연들을 평소에 잘 인식하지 못한다. 무엇인가 특별한 인연만이 자신을 삶의 의미를 보여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작은 인연들이 있다. 그런 인연들이 자신을 자신답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 <도깨비훈장> 에필로그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