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의 크리스마스
“올나이트라고 하니까 난 작년 크리스마스가 생각난다. 크리스마스 백일 전에 소개팅을 했거든, 크리스마스라고 해도 아침에 선물을 기대하며 눈 뜨는 맛도 없고 365일 다른 날들과 똑같은 하루일 뿐이라는 걸 아는 나이가 되었어도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캐롤과 반짝이는...
2012-12-19
석재정
“올나이트라고 하니까 난 작년 크리스마스가 생각난다. 크리스마스 백일 전에 소개팅을 했거든, 크리스마스라고 해도 아침에 선물을 기대하며 눈 뜨는 맛도 없고 365일 다른 날들과 똑같은 하루일 뿐이라는 걸 아는 나이가 되었어도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캐롤과 반짝이는 트리 불빛에 잠깐이라도 현혹되는 것처럼, 사랑이라는 거 별 거 아니고 사람이 다 거기서 거기라는 걸 알아도 연애하던 순간의 설레는 느낌이 그리워져서 소개팅을 했어. 언제나처럼 비슷한 수순으로 데이트를 하고, 같이 맛집들을 찾아다니며 사진 찍고, 블로그에 올리고, 휴대폰 요금이 평소의 두 배가 나오도록 통화를 했지만...백일이라는 게 그렇지, 그 사람의 좋은 점은 어느새 무덤덤해지고 그 사람의 싫은 점만 더 크게 불거지기 시작하는 때, 나이 먹으니까 사람에 대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가이드라인이 확실해지더라. 참다 참다 결국 99일째에 헤어졌어. 끝내고 나서...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내야 한다는 사실보다 더 절망스러웠던 것은 보너스의 절반이 그냥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허무함. 혼자서는 분식점도 못 들어가던 나였는데 갑자기 혼자인 게 아무렇지 않았어.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그동안 못 읽었던 책을 읽고 99일 동안 방치되었던 다이어리를 정리하면서 막연했던 불안이 사라져 갔어. 앞으로 맞을 수십 번의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내게 되더라도 나는 괜찮을 거라고...” 「한혜연은 탁월한 이야기꾼이자 한국의 대표적인 순정만화가이다. 감성적인 그림체와 반전의 묘미가 빛나는 스토리텔링은 항상 높은 완성도를 담보한다. 1993년 단편 “마네킨”으로 데뷔한 이래, “금지된 사랑”, “자오선을 지나다”, “애총”, “기묘한 생물학” 등의 대표작을 통해 여성들의 삶에서 포착한 미묘한 감성을 페미니즘적인 시각으로 드러내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이 책 “어른들의 크리스마스”는 2003년부터 2010년까지 발표한 크리스마스 단편 6편을 한데 모은 것이다. 인간의 내면을 관통하는 섬세한 언어, 읽는 이의 감정을 극대화 시키는 그림 연출, 잘 짜여진 이야기 구조는 20여 년 동안 만화 마니아들의 사랑을 꾸준히 받는 그 이유를 절감하게 한다.」- 책머리에 “바람 맞아서 실망한 만큼 실제로 만나서 실망할 수도 있었겠지, 혹은 만나보니 더 좋아져서 앞으로의 삶이 고달플 수도 있었겠고, 어쨌거나 나 역시 오랜만에 심장이 두근거렸어, 그걸로 됐어, 앞으로 크리스마스마다 오늘의 두근거림이 기억나겠지, 사는 동안 이런 심장소리를 잊지 말라고, 크리스마스는 해마다 아슬아슬한 바람을 안고 돌아오는지도 모른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 피곤한 얼굴로 네 명의 여자가 모처에 모인다. 무척이나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인 듯, 인사를 나누는 여자들의 표정이 반갑고 기쁘다. 자리를 잡은 그녀들은 각자의 기억에 남아있는 인상 깊었던 크리스마스의 추억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첫 번째 단편 “Christmas All Night - 그녀들의 크리스마스 2”의 첫 장면이다. 이 단편은 2010년 디지털 순정만화 잡지 “mint”에 수록된 작품으로, 95년 잡지 “mint”에 연재했던 “HEART” 시리즈 중 네 번째 작품인 “그녀들의 크리스마스”의 속편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전편에서는 싱그럽고 발랄한 아가씨들이 크리스마스에 모여 각자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구조였고 이번 속편에서는 전편에 등장했던 그 아가씨들이 다들 결혼도 하고 나이를 먹어서 담담하고 관조적인 톤으로 크리스마스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에피소드의 맨 마지막에 상당히 먹먹하고 씁쓸한 반전을 주는 이야기로 이 책의 첫 번째 순서로 아주 잘 어울리는, 다 읽고 나면 애잔한 여운이 남는 단편이다. “15년 전의 일이다. 당시 1억이면 웬만한 아파트 한 채를 사고도 남는 돈이었다. 등록금이 없어 대학에 못 간 한을 털어버리고 근사하게 유학을 갈 수도 있었고, 시어머니와 남편의 밀린 병원비를 갚고 조그만 가게를 얻을 수도 있었으며, 짝사랑하는 여자와 남 보란 듯이 결혼할 수도 있었다.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그녀가 꿈을 이뤄 줄 마법사에게 가자고 꼬드겼다. 애초에 양철 나무꾼도 허수아비도 사자도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부추긴 건 고향에 가야 하는 도로시였다.” 두 번째 단편 “바람 부는 크리스마스”는 2004년 잡지 “HERB”에 수록된 단편으로, 애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채팅을 통해 알게 된 남자에게 마음이 흔들려 일방적으로 크리스마스에 만날 약속을 잡은 한 여자의 이야기다.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과 ‘오면 어떻게 될까?’하는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리며 기다리는 여성의 심리를 아주 잘 표현해낸 단편이다. 세 번째 단편 “Christmas of Oz”는 원제가 “도로시의 제안”으로 2009년 무크지 “유혹”에 실렸던 단편이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4명이 모여 완전범죄를 계획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이야기로, 짧지만 강렬한 느낌을 전해주는 단편이다. 기승전결의 구조가 완벽하고 이야기의 짜임새가 단단해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 마지막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다. “달콤한 생크림 케이크와 노리다케에 담긴 향긋한 티, 지금은 달콤하지만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다시 돌아가야 할 불공평한 일상, 꿈을 꾸기에도 너무 짧은, 불공평한 크리스마스” 네 번째 단편 “불공평한 크리스마스”는 2005년 잡지 “HERB”에 수록된 작품으로,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편애로 인해 성격도, 취향도, 삶의 태도도 너무나 다른 자매의 이야기다. 마지막 장면에서 ‘크리스마스니까’ 잠깐이라도 화해를 하는 자매의 모습이 인상 깊다. “모든 사람이 크리스마스를 좋아하란 법은 없잖아요.” 다섯 번째 단편 “안개 낀 크리스마스”는 2009년 잡지 “Pop Toon” 수록된 작품으로 시공을 넘나드는 불가사의한 일들에 관한 미스터리 스릴러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주 기묘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이야기다. “참, 자~알 하는 짓이다. 그 나이에 가출이라니” 마지막으로 수록된 여섯 번째 단편 “하마의 크리스마스”는 2003년 잡지 “오후”에 수록된 작품으로, 크리스마스 이브에 가출해버린 엄마와 그런 엄마를 기다리는 딸의 이야기로 읽다보면 훈훈하고 가슴 찡한 인간미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여기에 소개한 “어른들의 크리스마스”는 “그녀들의 크리스마스”와 짝을 이루는 단편집으로 한혜연의 팬이라면 소장가치가 있을, 잘 만들어진 책이다.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