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밤의 호랑지빠귀
“마녀는 나쁜 사람이야? 아빠나 엄마나 마을 어른들 모두 저주받으니까 가까이 가지 말래. 정말로 마법을 써?” “지젤 알랭”이라는 독특한 느낌의 시대물이 한국어판으로 소개되면서 서서히 우리나라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있는 일본의 만화가 Sui Kasai의 단편...
2012-12-21
김진수
“마녀는 나쁜 사람이야? 아빠나 엄마나 마을 어른들 모두 저주받으니까 가까이 가지 말래. 정말로 마법을 써?” “지젤 알랭”이라는 독특한 느낌의 시대물이 한국어판으로 소개되면서 서서히 우리나라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있는 일본의 만화가 Sui Kasai의 단편집 “달밤의 호랑지빠귀”가 대원씨아이를 통해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었다. 나무에 걸터앉은, 날개가 달린 신비한 느낌의 소녀가 아름답게 그려져 있는 책 표지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우며 따사로운 느낌의 단편집으로 책 소개글을 인용하자면 “마음에 따사로운 빛이 스미는 순간을 담은 아름다운 8개의 이야기”라고 소개되어 있다. “엄마에게 들키지 않도록 하렴, 추신- 다음에는 살구타르트도 구워 놓으마.” 이 책은 총 8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꽃동산의 마녀”, “달밤의 호랑지빠귀”, “물 위의 물총새”, “무뚝뚝한 토끼”, “머나먼 판티엣”, “Story teller Story [story : 01 ERISA], [story : 02 NANCY]”, “고양이와 팬케이크” 이렇게 총 여덟 편의 단편이다. 첫 번째 이야기인 “꽃동산의 마녀”는 그림형제의 동화 “헨젤과 그레텔”의 분위기를 살짝 차용한 것 같은 느낌의 단편이다. (내용 자체가 “헨젤과 그레텔”처럼 음울하거나 괴기스럽지는 않다) 이야기의 전반적인 구성이나 소재를 볼 때 “헨젤과 그레텔”에서 작가가 어떤 영감을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결말이나 진행방향은 완전히 다른 느낌의 이야기라고 보면 된다. “마녀의 집”이라고 소문난 산 속의 외딴 집을 기웃거리는 어린 남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꽃과 수풀로 둘러싸여 보고만 있어도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이는 이 집은, 마을 사람들에게 ‘마녀’로 불리는 말 못하는 할머니가 고양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 마을 어른들이나 부모님으로부터 “그 집에는 절대로 가까이 가면 안 된다. 저주를 받아.”라든가, “마녀가 만든 걸 먹으면 개구리가 된다.”라든가, “고양이 시체를 모으고 있다.”라는 등의 괴기하고 두려운 이야기만 들어온 어린 남매로서는 “마녀의 집”에 들어가 보고 싶은 호기심은 가득하지만 쉽사리 용기를 내기가 힘들다. 남매가 계속 주저하고 있는 사이 어딘가에 외출했던 ‘마녀’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온다. 남매는 무척이나 놀랐지만, ‘마녀’ 할머니는 자애롭고 인자한 미소를 머금으며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용기를 내서 들어간 ‘마녀’ 할머니의 집은 호기심 가득한 어린 남매의 눈에 ‘별세계’처럼 펼쳐진다. 햇살이 아름답게 비추는 그곳엔 난생 처음 보는 예쁜 그림책도 있고, 엄마가 구워준 것보다 훨씬 맛있는 라즈베리 팬케이크도 있었으며, 꽃으로 만든 왕관과 신비롭게 빛나는 검은 보석도 있었다. 남매와 ‘마녀’ 할머니는 필담(筆談)과 눈빛, 몸짓을 통해 짧은 대화를 나누었고, ‘마녀’ 할머니에 대한 아이들의 두려움과 오해는 대부분 풀어졌다. 평화롭고 신비한 시간을 보낸 후,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어 다음을 기약하며 셋이서 현관으로 나가자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해가 지기 전까지 집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는 아이들을 보자 ‘마녀’ 할머니는 잠시 하늘을 살펴보더니 바닥에 글씨를 쓴다. “10분만 기다리렴.” 10분 뒤, 거짓말처럼 장대비가 그치고 외딴 집을 둘러싼 풍경은 싱그럽고 아름다운 기운으로 신비롭게 빛난다. 아이들은 경외의 눈빛으로 할머니에게 물어본다. “있지, 지금 이거 마법? 마법이야?”, ‘마녀’ 할머니는 인자한 미소를 지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조그만 봉지에 담긴 선물을 건넨다. 집으로 돌아간 남매가 선물을 풀어보니 거기엔 ‘맛있게 구워진 쿠키’와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마녀’ 할머니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당신은 이미 시작해 버렸습니다.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죠. 당신은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상냥한 거짓인가. 잔혹한 현실인가.” 두 번째 이야기인 “달밤의 호랑지빠귀”와 세 번째 이야기인 “물위의 물총새”는 대사가 거의 없는, ‘그림 환상동화’ 같은 이야기라고 보면 된다. 페이지 수도 워낙 짧고 이야기의 내용도 단순해서 굳이 글로 설명하기 보다는 직접 읽어보는 것이 느낌을 갖기에 훨씬 나을 것이다. 네 번째 이야기인 “무뚝뚝한 토끼”는 작가의 ‘코미디’적인 재능이 돋보이는 일종의 ‘상황극’으로 네 명의 남자가 모여 ‘웃지 않는 호스티스’를 웃기려 노력한다는 아기자기한 느낌의 에피소드다. 마지막의 결말이 아주 훈훈한 이야기다. 다섯 번째 이야기 “머나먼 판티엣”은 첫사랑에 빠진 소년의 모습을 귀엽고 깜찍하게 표현해낸 아주 짧은 이야기로, 읽다 보면 아련하고 따뜻한 감정이 느껴지는 에피소드다. “이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거짓말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거짓말이니까요. 거짓말을 하며 사는 것은 괴롭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사는 것도 어렵습니다. 어느 쪽을 골라도 당신은 무언가를 잃지 않으면 안 되겠죠. 하지만 당신은 선택해야만 합니다. 살기 위해서, 자유롭게 사는 것이 어렵더라도 어떤 부자유를 고를지는 자유 아니겠습니까? 당신은 아직 살 수 있습니다. 선택하십시오, 리드 님. 선택을 하면 그것이 당신의 진실입니다.”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이야기는 “story teller story”라는 제목에 붙은 두 개의 단편인데, 이 두 개의 에피소드만으로도 이 책은 소장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훌륭한 완성도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진실과 거짓”에 관해 작가의 놀라운 철학적 통찰력을 바닥에 깔아놓고, 서정적이고 애잔한 느낌이 강렬하게 묻어나는 완벽한 극적 구성을 보여준다. 결말 부분에서 느껴지는 주인공에 대한 ‘공감’은 읽는 이의 가슴을 한참동안 먹먹하게 만든다. 마지막 여덟 번째 이야기인 “고양이와 팬케이크”는 ‘외로운 아저씨와 외로운 소년’이 서로에게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훈훈한 이야기로 ‘가족’이란 것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가슴 따뜻해지는 에피소드다. 강력하게 추천한다.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