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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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8 러브에이틴

“서기 2009년...오키나와와 아오모리에서 2대의 슈퍼컴퓨터가 가동을 시작했다....그 퍼포먼스는 종래의 슈퍼컴퓨터를 압도...온갖 분야에 활용되어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큰 우위를 손에 넣었다...9년이 지난 2018년. 지금도 그 능력을 능가하는 슈퍼컴퓨터는 나...

2012-12-14 유호연
“서기 2009년...오키나와와 아오모리에서 2대의 슈퍼컴퓨터가 가동을 시작했다....그 퍼포먼스는 종래의 슈퍼컴퓨터를 압도...온갖 분야에 활용되어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큰 우위를 손에 넣었다...9년이 지난 2018년. 지금도 그 능력을 능가하는 슈퍼컴퓨터는 나타나지 않았고, 그 압도적인 존재감은 여전히 쇠하지 않고 있다. 왜 9년이나 된 슈퍼컴퓨터를 못 뛰어넘는 거냐고? 그건 슈퍼컴퓨터의 설계자인 우리 엄마...‘타나베 키요미’가 슈퍼컴퓨터 가동으로부터 한 달 뒤, 그 너무도 혁신적인 설계도를 자기 뇌 속에만 남겨둔 채 죽어버렸기 때문이다.....그 슈퍼컴퓨터는 집적회로의 99%가 지하 수천m 지점에 서식하는 유기물 ‘LCP’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 슈퍼컴퓨터의 이름은...아오모리가 ‘렙톤’, 오키나와가 ‘쿼크’...” 흥미진진한 박진감이 넘치는 SF 만화가 오랜만에 출간되었다. 작품의 제목은 “러브 에이틴”, 언뜻 보면 청춘만화 제목 같지만 정통파 SF다. 작가의 이름은 미야가와 아키라(Miyagawa Akira), 도서정보를 검색해 봐도 이 작품밖에 나오지 않는 걸 보면 신인작가인 것 같은데, 신인답지 않은 훌륭한 구성력과 뛰어난 ‘화력(畵力)’을 보여주고 있다. 집적회로의 99%가 신비한 유기물 ‘LCP’로 이루어진 두 대의 슈퍼컴퓨터가 인간들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 활동을 시작하자 정부가 그 주도권을 다시 빼앗아 오기 위해 ‘매개자’를 확보하려 전투를 벌인다는 설정 하에, ‘매개자’로 불리는 소년과 그 소년의 ‘모든 것’인 소녀, 그리고 그 둘의 친구지만 우정과 임무사이에서 갈등하는 또 한 명의 소녀에 대한 이야기로, 딱 두 권으로 이루어져 읽기에도 좋은, 오랜만에 만난 완성도 높은 작품이다. “아참, 지금도 계속하고 있나요? 슈퍼컴퓨터...‘쿼크’랑 ‘렙톤’ 연구.” “그렇지, 뭐...네 엄마가 전달업무를 게을리 하는 바람에 여전히 의문투성이인 슈퍼컴퓨터니까. 유기물로 구성된 거라 자기 능력으로 신진대사를 반복하고 지금까지 축적된 정보도 어우러져 가동 개시 당시와 비교해 연산능력이 12%나 향상됐대.” “정말요...? 벌써 그 경지까지 오다니...왠지 자아가 싹튼 생명체 같네요.” 세간에서는 SF가 다소 마니악한 장르라고들 떠들어 대지만, 사실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의 명작들은 대부분 이 장르에서 배출되었다. 굳이 오토모 가츠히로의 “아키라”나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 같은 재패니메이션 명작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유럽의 명작 그래픽 노블인 “설국열차”나 “앵키발랄 니코폴”같은 철학적이고 예술적인 작품들부터 우리에게 익숙한 “기동전사 건담”이나 “신세기 에반게리온”처럼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작품들도 사실 다 이 장르 안에 속해있다. 위에 거론되는 ‘명작’들과 비교하기에는 많이 모자라고 조금 쑥스럽지만, 이 작품도 두 권으로 이루어져 있는 신인작가의 작품치고는 아주 높은 수준을 선보이고 있는 SF 작품이다. “유기물로 구성되어 자기 능력으로 신진대사를 반복하고 축적된 정보를 활용해 연산능력을 향상시켜가는 두 대의 슈퍼컴퓨터와 유일하게 그 컴퓨터들을 통제할 수 있는 ‘매개자’인 소년”이라는 설정부터가 아주 설득력이 있고 흥미진진하며, 기초가 되는 과학적인 지식기반도 매우 탄탄하다. SF 장르, 특히 이러한 묵시록적인 느낌이 강한 ‘사이버 펑크’류의 SF 작품에서 반드시 선보여지는 스타일리쉬한 액션 장면이나 멋지고 개성 넘치는 메카닉 디자인도 매끄럽고 섬세한 구성 안에서 화려하게 돋보이고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게 무엇이든 모종의 의미를 갖고 있어. 우리 인간도 깊이 파고들면 소립자의 모임...그런 집합체를 통치하는 게 있으면 결국 자기주장을 시작하게 되어있지. 쿼렙의 집적회로는 ‘LCP’가 99%를 차지하고 있어. ‘LCP’는 지하 수천m 이상 지점에 서식하는 원시적 유기물로, 지난 수억 년 동안 수도 없이 찾아든 생명 멸망의 위기를 뛰어넘어 목숨을 이어온 우리의 조상 같은 존재랄까...? 현재도 주로 생물학이나 의료를 목적으로 연구, 사용되고 있는데 우리 엄마가 세포분열 시에 공생 생물의 유전자 정보도 카피하는 특성을 주목하고 집적회로의 다차원 배열에 응용한 거야. 그런 유기물로 만들어진 슈퍼컴퓨터니...자아가 싹트더라도 이상할 게 없지...쿼렙은 2009년 가동 이후, 다양한 산업과 의료, 경제에 인프라 정비, 더 나아가 행정과 사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도입되었고, 우리나라가 지금 세계를 리드할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냐...정권 운영에도 활용되었던 쿼렙이야. 정치의 이면, 또 그 이면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다 해도 이상할 게 없잖아? 가령 정보조작을 반복하며 현 정권에 불리한 것들을 수도 없이 무마한 상태에서 쿼렙이...자신을 생명체라 선언하며 권리를 주장하려 든다면 정부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남은 길은 이제 쿼렙의 꼭두각시가 되는 길 외에는 없을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지금의 이치카와 정권은 허울만 남는 거지. 정권 운영의 주도권은 쿼크와 렙톤에게 넘어가고...말하자면 복화술사와 타로가 뒤바뀐 식이랄까...?” 작가 후기에 따르면, 이 작품은 원래 32페이지짜리 단편으로 제안한 소재였다고 한다. 그런데 다시 제안할 때마다 32p→97p→289p로 분량이 늘어났고, 이 분량을 단편으로 수록하는 건 힘드니까 몇 화로 나눠서 단기 연재로 하자는 편집부의 제안을 받아 ‘뜻밖에 첫 연재’를 하게 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덧붙이자면, 그렇게 시작된 첫 연재가 연재용으로 8회로 나누고 또 다시 재구성, 그 결과 각 회 표지까지 포함해 총 382p로 늘어나 이렇게 단행본 두 권으로 출간된 것이라고 한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첫 연재 작품이 이 정도라니 정말 미래가 기대되는 작가다. “지금의 나오키를 구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나오키를 생각하는 아야의 마음...사랑의 힘이야...이 마당에 ‘무슨 소리야?’싶겠지...하지만 그것이 바로 생명이 탄생한 수억 년 전부터 의미나 양상을 바꿔가며 생명을 연결해온 수단이야...이 세계를 논하는 데에 있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지. 나오키가 매개자로서 각성한 것도, 병행우주를 연결할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네가 살아있는 것도 그게 있었기 때문이야. 너와 나오키의 서로를 생각하는 정신적 연결고리는 다른 누구보다도 강해. 그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유일한 희망이란다....” 사실 ‘멸망의 위기에 빠진 지구를 구할 열쇠이자 유일한 희망인 소년소녀’라는 설정은 그리 독특하거나 신기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흔한 설정과 소재를 가지고 어떤 과정을 거쳐 지루하지 않은 스토리 전개와 유니크한 스타일을 만들어낼 것이며 어떤 식의 독특한 결말에 도달할 것이냐? 하는 것이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으리라. 그런 점에 비추어 볼 때 특히 마지막 결말 부분이 아주 신선했고 개성이 철철 넘쳐흘렀다. 강력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