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엔드 아파트
“어둡군, 이래선 안 돼. 알아들어? 이런 불경기에 네가 쓰는 것 같은 답답한 이야기는 안 먹힌단 말야. 해피앤드를 쓸 줄 알아야지.” “우동여자”, “분발해, 켄타우로스!” 등의 작품이 우리나라에 소개되면서 서서히 자신의 인지도를 끌어올리고 있는 일본 작가 에스...
2012-12-11
김진수
“어둡군, 이래선 안 돼. 알아들어? 이런 불경기에 네가 쓰는 것 같은 답답한 이야기는 안 먹힌단 말야. 해피앤드를 쓸 줄 알아야지.” “우동여자”, “분발해, 켄타우로스!” 등의 작품이 우리나라에 소개되면서 서서히 자신의 인지도를 끌어올리고 있는 일본 작가 에스토 에무(EST EM)의 단편집 “해피앤드 아파트”는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펼쳐지는 ‘남자들의 사랑이야기’, 즉 ‘BL(BOYS LOVE)물’이다. “애인이 새로운 남자애인을 만들어서 집을 나갔다...라고 하면 그나마 낫겠지만 실은 쫓겨난 건 나다. 해피앤드?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쓸 수가 있겠어.” 소설가 지망생인 루카는 그날도 출판사 편집자에게 ‘네 글은 너무 음울하고 답답해, 해피앤드를 써 봐.’라는 지적을 당하고 퇴짜를 맞은 뒤 집을 알아보기 위해 거리를 헤매던 중이었다. 동거하던 애인(남자)에게도 버림을 받은 후라서 무척이나 기분이 우울했다. 그러던 중 가로등에 붙은 ‘거주자 모집’ 광고를 보고 전화를 걸어 찾아간 그 곳은 ‘까제 팰리스(행복로)’ 막다른 곳에 있는 고풍스러운 아파트였다. 아파트 주인인 하비는 반가운 얼굴로 루카를 맞이했지만, 사실 빈방이 없는 상태였다. 실망하고 되돌아가려던 루카에게 집주인인 하비가 ‘집세 무료에 광열비만 절반, 인터넷도 자유롭게 쓰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며 자신이 사는 집에서 동거를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 너무나 파격적인 조건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선뜻 대답을 못하는 루카에게 하비는 말한다. “당신이 너무 좋아서”, 이 책의 프롤로그에 등장하는 하비와 루카의 첫 만남 장면이다. “이 집엔 모든 물건이 2개씩 있다. 내가 오기 전에 누군가가 있었구나. 쫓겨났나? 딱하군. 사진 1장도 안 남았다니 말야.” 이 작품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까지 포함해 총 여덟 편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사랑이야기다. 속칭 ‘야오이’라고 불리는, ‘남자들끼리의 동성애 장르’에 심한 거부감을 가진 사람만 아니라면, 읽기에 아주 괜찮은 내용을 담고 있는 ‘사랑 이야기’다.(이 책에 등장하는 커플들을 ‘남자X남자’가 아닌 ‘남자X여자’로 바꾸어놓아도 이야기를 진행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그만큼 본편의 에피소드들이 자연스럽고 담담하다. 그리 야하지도 않다) “소설 써?” “응, 근데 막혀서 안 써져...편집자는 해피앤드로 쓰라고 했지만 쓸 수가 없어...본인이 행복하지 않은데 어떻게 쓰겠어.” “이 아파트가 뭐라고 불리는지 알아? 까제 팰리스(행복로) 막다른 곳에 있어서 파이널 팰리스(해피앤드), 이곳 거주자들을 소설로 쓰면 어떨까?” 이 작품의 구성법은 아주 간단하다. 프롤로그에서 첫 만남을 가진 하비와 루카의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파이널 팰리스에 사는 거주자들’을 소재로 한 사랑이야기로 독자들의 시선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소설가 지망생인 루카가 ‘해피앤드’를 소재로 한 작품을 쓰기 위해 같은 아파트에 사는 거주자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창조해낸다는 설정이지만, 각각의 에피소드가 모두 자체적으로 훌륭한 완결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 설정엔 큰 의미가 없다.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야....해피앤드 얘기만 중간까지 읽다가 말았어...해피앤드를 만들어 내라고 해놓고는 해피앤드를 싫어하는 거 아냐...?” 첫 번째 에피소드에 해당하는 “디노와 살바도르”는 3층 오른쪽 집에 사는 두 남자, 디노와 살바도르에 관한 이야기다. 디노는 패션 디자이너, 살바도르는 아티스트로 파트너로서 흠잡을 데 없는 조합이지만, 살바도르가 매우 별난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설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옷을 전혀 입지 않고 전라로 지내는 살바도르는 집밖으로 나오지 않은지 3년째,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외부와 소통해야 하는 경우엔 상반신만 비추는 웹카메라로 화상통화를 하고 그 외에는 자신의 파트너인 디노와 집안에서만 지낸다. 이 특이한 커플들의 이야기는 ‘해피앤드’를 소재로 한 첫 번째 에피소드로서 매우 적합하다. ‘전라’로 지내며 집밖으로 나가지 않는 살바도르와 그런 그의 곁에서 3년 동안 지내온 디노의 관계를 소박하게 보여주면서 ‘사랑이 일상이 되어 서로에게 익숙해지면 관계는 어떻게 변하는가?’에 대해 작가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진지하면서도 유쾌한 질문 같은 에피소드라고 하겠다. 두 번째 에피소드인 “노에와 쌍둥이” 역시 매우 독특한 설정으로 ‘사랑의 실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다. 성실한 우체국 직원인 노에가 일란성 쌍둥이 슈우와 소우 중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해 결국은 셋이 같이 동거 중이라는 것이 이 에피소드의 핵심인데, 이야기의 마지막에 가서 노에가 남기는 대사가 은근히 설득력 있게 들린다. 세 번째 에피소드인 “마티아스와 페페”는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였는데 드라마틱한 구성과 애잔한 감수성이 느껴지는 전개가 너무 좋았던 에피소드다. 소년인형을 특히 잘 만들어 ‘인형작가’로서 전 세계에 팬이 있는 페페라는 노인과 그의 집에 수시로 드나들며 인형하고만 대화를 하는 ‘말하지 않는’ 사춘기 소년 마티아스의 이야기다. 에피소드의 극적인 짜임새가 너무 좋아서 마지막 장면이 끝나자 오랫동안 여운이 남았다. 네 번째 에피소드인 “호세와 에바”는 귀가 들리지 않아 조용한 침묵을 지키는 남자 호세와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시끄럽게 동거중인 에바의 사랑이야기다. ‘정적’과 ‘소음’이라는 ‘소리의 질감’을 가지고 ‘사랑의 느낌’을 색다르게 표현해낸 에피소드였다. 이 책의 프롤로그와 중간에 나오는 엑스트라 에피소드, 그리고 다섯 번째 에피소드 “하비와 루카 그리고 루카”는 소설가 지망생 루카와 그의 동거인이자 집주인인 하비의 사랑이야기다. 프롤로그의 인상적인 첫 만남 이후 동거에 들어간 하비와 루카는 서서히 서로를 알아가려 하지만 하비에게는 ‘이상한 벽’이 느껴져서 루카는 그의 마음 안으로 깊게 들어갈 수가 없다. ‘열정적인 사랑’이 예기치 못한 사고로 끝이 나면서 ‘관계를 맺는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하비는 상대를 바라보기만할 뿐 다가오질 못하는 것이다. 하비와 루카가 등장하는 위의 세 가지 에피소드를 모두 다 읽고 나서, 맨 마지막의 ‘에필로그’를 읽으면 마치 영화 ‘첨밀밀’의 라스트 씬을 볼 때처럼 먹먹하고 아련한, 뜨거운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꽤나 긴 여운을 남겨준 작품이었다. 가을에 잘 어울릴 것 같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