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가장 일상적인 존재인 ‘음식’이란 매개체를 통해 사람들과 특별한 이야기와 다양한 추억을 나누고 싶었다.” -작가의 말 중에서 순정만화잡지 “윙크”에 연재 중인 조주희의 “키친”이 단행본으로 출시되었다. 여성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 본 “음식에 대한 단상”과 여성 작가의 손끝으로 만들어진 “요리 만화”는 어떤 느낌일까, 하고 궁금했던 나는 망설임 없이 이 예쁜 표지의 책을 구입하여 천천히 읽어 보았다. 결과는 대만족! 벌써부터 이 얇은 책의 다음 권이 빨리 나오길 고대하고 있다. “아, 맞다...그때...나...처음 끓인 된장찌개를 앞에 두고 왠지 서글퍼졌었지, 엄마에게서 떨어져 드디어 혼자가 된 건가...라면서... 아마 아빠도 그러시겠지, 지금까지 요리라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으신 아빠는...‘아, 진짜 내가 혼자가 되었구나’....라고, 찌개 중 가장 만들기 쉽다는 된장찌개, 누구나 제일 먼저 시도하는 요리, 그래서 가장 씁쓸하고 슬퍼지게 만드는 소박하고 그리운 그...맛....”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세기, 21세기는 여성(Feminine)· 감성(Feeling)· 상상(Fiction) 의 ‘3F’가 중요한 시대가 됐다고 말하는 어느 신문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사회과학적인 분석방법론을 굳이 적용하지 않더라도, 이건 분명히 맞는 얘기다. ‘소비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소비의 주체로서 여성들의 경제력과 구매력이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나게 커졌고, 모든 문화상품, 유행코드, 엔터테인먼트에서 ‘여성의 취향’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아예 흥행이 되질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즉물적이고 상상력이 가미되지 않은 상품을, 여성들은 남성들처럼 구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건 아주 중요한 포인트다. 단순히 시장의 관점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앞서 얘기한 것처럼 여성성, 상상력, 감성이 가미되지 않은 것은 시장에서 팔리지 않기 때문에 만들기 쉽지 않을 것이고, 모든 생산활동과 소비활동의 전 과정에 있어 이러한 감수성이 가미되는 것이 필수적인 것이 된다는 얘기다. 그런 방향으로 세상이 변해간다면, 세상은 분명 지금보다 더 평화로울 것이고, 지금보다 더 아름다울 것이다. 세상의 색깔이 여성적인 감성과 상상력으로 점차 물들어간다는 것, 그 것이야 말로 진정한 진보이자 아름다운 변화다. 물론 주식과 부동산, 자동차에만 관심 있는 남자들이 온 세상을 설치고 다니는 ‘마쵸’ 한국에서는 아직도 먼 미래의 얘기지만 말이다. “그 빵은...오랫동안 반죽을 쳐대야 하는 투박한 단팥빵이었는데...처음이어서 그런지, 빵은 질기고 딱딱한데다 맛도 별로였죠, 그 뒤 난... 다시는 엄마의 빵을 맛볼 수 없었어요. 그 빵을 마지막으로...엄마는 절 찾아오지 않았으니까....하지만 그 때...움켜진 빵의 말랑한 촉감과 따뜻함...달콤한 향기...그건 분명, 엄마의 살처럼 형체가 있는 사랑이었어요.” 서울 목일중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기도 한, 이 독특한 이력의 데뷔 8년차 중고신인 만화가 조주희는, 여성 특유의 섬세하고 잔잔한 감수성을 ‘음식’이라는 원초적인 소재에 아름답고 깔끔하게 가미한다. 이 같은 상상력과 감수성이 가미된 요리만화는 내겐 첫 경험이었는데, 같은 장르의 대표작인 허영만의 ‘식객’이나 일본 요리만화 ‘맛의 달인’과는 아주 다른 느낌의, 마치 처음 맛보는 맛있는 음식처럼, 내게 신기하고 생경한 느낌을 주었다. “인어공주도 그런 식으로 바다마녀를 찾아갔지, 유치하고 투정 많은 막내공주로 자라 스스로 하는 건 하나도 없는 주제에, 징징대며 마녀에게 부탁하러 갔던 거야. 하지만 마녀는 말이지, 공짜 장사는 절대 안 해, 모든 거래엔 대가가 필요한 법이거든, 마법을 쓸 수 있는 막강한 능력의 마녀에게 애송이 공주쯤이야 상대도 안 되지. 이건 마법에 걸린 도시락이야, 난 주문을 걸어두었어, 왕자, 넌 내 거야...라고, 공주 따윈 하찮은 물거품이 되어버리라지.” “키친”은 하나의 에피소드에 8p의 컬러를 배정한 편집방식으로 제작되었고, 모든 에피소드는 전체적으로 잔잔한 일상의 느낌을 유지하다가 결말부분에 가벼운 임팩트를 가미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만화를 읽고 글을 쓰는 것이 취미인 내게 있어 조주희의 “키친”은, 2009년의 말미에 만난 또 하나의 새로운 발견이다. 1권에는 총 16개의 에피소드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된장찌개 끓이는 법”, “체온”, “마녀의 솥”, “그의 처방”, “고추가 좋아”, “인생의 참맛”, “하지(夏至)” 가 너무 좋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남편은 내게...운명을 거스르면서까지 너무 많은 애는 쓰지 말자고 했다. 또...부질없는 희망에 매달려 휩쓸리지 말자고 했다. 그러니까 이건 남편을 위한 약이 아니라 나를 위한 약이었다. 나 대신 남편이 먹어주는 약, 잠깐의 기대와 희망을 품게 만들어주는 약, 언제나 치료받는 쪽은 나였다.” 박완서의 산문집에서 소재를 따왔다는 “그의 처방”은 6개월의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고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한 남편과 그를 간호하는 아내의 에피소드다. 읽는 이에게 짧고도 굵은, 먹먹한 느낌을 전달해주는 이 에피소드에서, 남편의 체념한 듯 잔잔한 미소와 자상한 말투, 남편을 떠나보내기 아쉽기만 하고 무언가 해주지 못해 미안하기만 한 아내의 억지는, 정말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특히 마지막의 “언제나 치료받는 쪽은 나였다”는 아내의 짧은 독백은, 그 상황과 그 마음에 담긴 인생의 깊은 ‘맛’을, 오래도록 여운으로 느끼게 해주는 완벽한 마무리였다고 생각된다. “아뇨, 화를 내려는 게 아닙니다. 순간이었지만...동생이 평생 아팠던 게 아니라 제 또래처럼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다 갔다고...그래서 당신 같은 학교 친구도 있는 거라고...그런 따뜻한 상상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생각지도 못한 위로를 받았네요, 동생도 분명 당신의 방문을 기뻐할 겁니다. 부디 맘 편히 머물다 가세요.” “인생의 참맛”은 씁쓸한 단편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의 애잔한 에피소드다. 돈이 없어 밥을 굶은 배고픈 백조 처녀가 장례식장의 문상객으로 가장, 도둑밥을 얻어먹으며 벌어지는 짧은 이야기로, 자기 또래의 아가씨인 고인의 영정을 주인공이 보는 순간, 독자에게 전달되는 임팩트와 상주인 오빠를 통해 듣는 고인의 진실은, 건강하게 살아간다는 단순한 일이 진정한 축복임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정말 제목 그대로 “인생의 참맛”이 느껴지는 순간인 것이다. 이 글의 마지막으로, 이 책의 마지막 에피소드인 “하지(夏至)”의 문구 전부를 적어본다. 한 편의 아름다운 시를 읽는듯한 잔잔한 여운이 남는 이 마지막 에피소드는, 노스탤지어가 느껴지는 쓸쓸한 느낌의 그림과 담담한 문구로 표현된, 서울을 떠나 시골로 들어간 어떤 젊은 부부의 ‘사랑’이, 구체적인 형태를 띠고 독자에게 전달되는 황홀한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