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저갱 (無底坑)
“그 때에 무(無)도 없었고, 유(有)도 없었다. 공계(空界)도 없었고, 그 위에 천계(天界)도 없었다. 태초엔 어두움이 암흑 속에 덮여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표지도 없는 파동계(波動界)였다. 공허 속에 덮여 발동하고 있던 것, 저 유일한 것은 타파스의 힘으로...
2010-03-24
유호연
“그 때에 무(無)도 없었고, 유(有)도 없었다. 공계(空界)도 없었고, 그 위에 천계(天界)도 없었다. 태초엔 어두움이 암흑 속에 덮여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표지도 없는 파동계(波動界)였다. 공허 속에 덮여 발동하고 있던 것, 저 유일한 것은 타파스의 힘으로 태어났도다!” (※타파스 : 고행(苦行)을 통해서 얻어지는 힘, 명상) 무저갱(無底坑)이란, 기독교에서 쓰는 용어로 악마가 벌을 받아 한번 떨어지면 헤어나지 못한다는 영원한 구렁텅이를 뜻한다. 멸망, 죽음을 뜻하는 말인 아바돈(히브리 어, ?badd?n)과도 같은 뜻을 지닌 말이라 한다. 허영만의 1992년 作 “무저갱(無底坑)”은, 원제가 ‘벌레구멍’이라고 되어있는데, 원작의 여부는 자료가 없어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본문을 메운 수도 없이 많은 인용 글들과 철학서, 과학이론, 종교학 등에 비추어 볼 때 어떤 한 가지 원작에서 따온 작품은 아닌듯하다. “인간이란 육체와 영혼을 더불어 지닌 생명체(生命體)임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이것을 좀 더 과학적으로 말하면 탄소형 생명체(炭素型 生命體)인 육체 속에 전자파(電磁波) 에너지 생명체인 혼(魂)이 깃들여 있는 게 바로 인간이다. 이 혼(魂)은 또한 유체(幽體)라고도 부르며, 서구(西歐)의 심령과학계에서는 일종의 에텔체라고 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혼이라면 무슨 추상적인 존재로 알고 있고, 혼(에너지 생명체)이야말로 육체를 지배하는 진짜 생명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것이 인간의 정체(正體)가 무엇인지 아직도 완전히 규명되지 않은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무저갱(無底坑)”은 참으로 불친절한 만화다. 아무런 사전 설명도 없이 미선과 강토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어떤 특정한 사건의 일정한 축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환상과 현실을 뒤죽박죽 혼재해 놓은 상태에서 주인공 이강토의 상태가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작가가 강요하는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다. 왠만한 집중력 갖고는 이 만화의 흐름을 따라가기 힘들고, 너무 많은 철학, 종교학, 과학, 수학 등의 이론이 거의 두 장에 한 번 꼴로 등장하는 “형식 파괴”적인 작품이기 때문에, 독자들에게는 매우 어렵고 불친절한 작품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 악마는 누가 만들었을까?” “무저갱(無底坑)”은, 신과 악마 그리고 인간 사이에서 선과 악의 실체를 규명하고 진정한 존재의 의미가 무언지 끊임없이 고뇌하는 작품이다. 주인공인 이강토는 어느 수행자의 환생이고, 루시퍼와 계약을 맺은 악마의 대리인이며, 인간 본연의 모습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구도자이기도 하다. 허영만은 이강토의 끊임없는 변신을 통해, 인간이 아무리 다가가려 해도 아직까지 그 정확한 실체를 알지 못하는, 존재론(存在論)적 질문에 접근하려 애쓴다. 철학의 분야 중에서 가장 어렵다고 알려진 형이상학(形而上學)에 대한 허영만의 만화적 접근이 빛을 발하는, 매우 난해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