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요리의 숲
“장마가 시작되자마자 엄마가 갑자기 젊은 남자랑 도망을 갔다. 난 그럭저럭 익숙해진 도쿄에서의 생활을 접고, 아득히 먼 아빠의 본가에 떠맡겨지게 되었다. 내가 조금만 더 아이답게 순종적으로 굴었더라면 엄마는 날 버리지 않았을까….그렇다면 나한테도 약간의 책임이 있을지도...
2009-06-22
김진수
“장마가 시작되자마자 엄마가 갑자기 젊은 남자랑 도망을 갔다. 난 그럭저럭 익숙해진 도쿄에서의 생활을 접고, 아득히 먼 아빠의 본가에 떠맡겨지게 되었다. 내가 조금만 더 아이답게 순종적으로 굴었더라면 엄마는 날 버리지 않았을까….그렇다면 나한테도 약간의 책임이 있을지도 모른다. 자식은 부부 사이의 끈이라는 속담이 있는데….” 어린 시절, 울창한 숲이나 으슥한 골목길을 걸을 때면 어른들이 놀리느라 장난스럽게 얘기해준 유령이라든가, 귀신이라든가 하는 스산한 이야기들이 떠올라 무서웠던 기억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또 동화책이나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나에게도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 기억도 누구나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여기에 소개하는 “미요리의 숲”은 어린 소녀가 체험하는 환상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작품으로 잔잔한 서정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혹시 모그리를 만난 거니? 걱정 마라. 전혀 무서운 게 아니야, 모그리는 나쁜 꿈을 먹어준단다. 이제 그 나쁜 꿈은 꾸지 않을 거야. 숲에는 아주 여러 가지 것들이 있단다….” 어린 아이치고는 너무 조숙하고 혼자서 망상에 빠지기 좋아하며 누구와도 잘 친해지지 못하는 붙임성 없는 아이 미요리는, 갑작스런 엄마의 외도로 돌봐줄 사람이 없어져 결국 시골에 있는 아빠의 본가에 맡겨지게 된다. 자신을 놔두고 도쿄로 돌아가는 아빠를 보면서 “그러니까 마누라가 도망을 가지…”라고 중얼거리는 미요리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말은 안 해도 엄청난 불만이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듯한 할머니도 불편하고, 핸드폰마저 통화권 밖인 시골에서 미요리는 할 것이 없다. 할머니의 권유에 따라 숲으로 간 미요리는 아주 커다란 벚나무 밑에서 호랑이를 만나고 그 옆에서 잠이 든다. 엄마와 아빠에 대한 나쁜 꿈을 꾸던 미요리는 울면서 잠이 깨는데 자신의 이마에 빨판 같은 입을 대고 서있는 괴이한 생명체를 본다. 깜작 놀란 미요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할아버지와 쿠로(개)가 나타나자 그 괴이한 생명체는 홀연히 사라진다. 집으로 돌아와 잠들기 전 할머니와 나눈 대화에서 미요리는 그 괴이한 생명체가 나쁜 꿈을 먹어준다는 ‘모그리’라는 생물임을 알게 된다. “10년 전 꽃구경 갔을 때 넌 숲의 주인으로 뽑혔단다. 그건 환각이 아니야. 그 숲은 내 거지만 말이야…언젠가는 미요리에게 물려줄 생각이란다. 숲을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인간하기 나름이니까 숲의 목소리를 정확하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지켜야 하지 않겠니?” “미요리의 숲”은 이런 류의 판타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주 좋아할 만한 만화다. 차분하고 안정적인 그림에 잔잔한 이야기의 흐름, 등장하는 숲의 요정들도 아주 귀엽고 유쾌하다. 어린 시절 체험했을 아련한 상상들을 한번쯤 접해보는 기분으로 읽을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