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베 (JINBE)
“몇 골을 넣어도 그 이상 허용하면 지고 말지. 하지만 설령 골을 못 넣어도 골을 허용하지만 않으면 지지 않아. 이기는 것보다 지지 않는 것의 소중함을 가르쳐주는 포지션” 아다치 미츠루의 중편 “진베”는 피가 섞이지 않은 딸과 상처(喪妻)한 양아버지의 위험하고 미...
2007-09-21
이지민
“몇 골을 넣어도 그 이상 허용하면 지고 말지. 하지만 설령 골을 못 넣어도 골을 허용하지만 않으면 지지 않아. 이기는 것보다 지지 않는 것의 소중함을 가르쳐주는 포지션” 아다치 미츠루의 중편 “진베”는 피가 섞이지 않은 딸과 상처(喪妻)한 양아버지의 위험하고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아주 상큼하게 펼쳐낸 작품이다. 언뜻 보기에 아주 무겁고 음울하며 반사회적인 위험함이 도사린 소재 같지만 이런 소재조차도 그의 손에 걸리면 아주 쾌활하고 상큼해진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진베는 대학시절 명성을 날렸던 골키퍼 출신으로 현재는 수족관에서 일하고 있는 듬직하고 재미있는 중년의 사내다. 이 중년의 사내에게 숙제처럼 남아있는 복잡한 사연이란 이렇다. 진베의 대학선배이자 축구부의 스트라이커였던 미야시타의 처 리카코는 8년간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접고 딸인 미쿠를 데리고 이혼한 후, 4년이 지나 진베와 재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1년하고 2개월 14일’이라는 짧은 결혼 생활을 함께하고 리카코는 죽음을 맞이하고 결국 피 한 방울 안 섞인 부녀(父女) 미쿠와 진베만 부자연스러운 ‘가족’으로서 남게 된다. 리카코가 죽은 지 3년, 어느새 고등학생이 되어버린 미쿠는 알 수 없는 의미의 말과 행동을 진베에게 종종 표현하고 진베 역시 미쿠를 딸이라 생각하지만 가끔씩 울컥하는 의미 없는 신경전을 벌인다. 그리고 미쿠의 친아버지이자 사랑의 라이벌이었던 미야시타는 진베에게 미쿠를 돌려달라며 계속 도발을 일삼는다. 진베는 과연 리카코가 남기고 간 이 어려운 숙제를 풀 수 있을까? “태어난 지도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다 컸더라. 지금 보면 누가 부모고 누가 새끼인지 구분도 안 간다니까... 어쨌거나 부모 역할은 자식이 다 크면 끝나는 거잖아,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며 죽을 때까지 부모니 자식이니 하는 건 아마 인간 밖에 없을 걸.” 수조 속의 금붕어들을 보고 있는 진베에게 미쿠가 던지는 한 마디는 매우 의미심장하며 위험하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등장하는 이 씬은 이 만화의 주제이자 소재가 어떤 것일지 독자에게 넌지시 알려주는 아다치 미츠루식의 연출법이다. 이 대사는 에피소드 말엽에 수족관에 놀러온 연인들이 똑같은 모습의 물고기들을 보는 장면에서 다시 한 번 강조된다. “그럼 뭐야, 부모 자식끼리 결혼할 수도 있겠네?”라는 여자의 질문에 옆에 서있던 미쿠는 “그렇겠지?”라고 대답한다. 등장인물과 현재의 관계들이 소개되는 첫 번째 에피소드가 이런 식으로 끝이 나면, 독자들은 설마, 하는 마음과 함께 아다치가 준비해 놓은 올가미 같은 연출 속으로 정신없이 빠져들기 시작한다. “H2”나 “터치”, “미유키” 등의 전작을 통해 작가가 보여준 위험하고 애매모호한 감정표현들 속으로, 책장을 넘기면서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되는 나의 모습이, 정말 ‘마법’에 걸린 것 같다. 아다치 미츠루의 강점은, 아무리 무겁고 어려운 소재라도 그 만의 재미있고 상큼한 연출법을 통해 아련한 여운을 느끼게 하는 결말로 독자들을 안내하는 작품구성능력에 있다.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이다. 작품의 마지막, 수족관의 수조 앞에서 진베에게 말하는 미쿠의 대사 “같이 밥 먹으러 갈래요?”는 그 어떤 확실한 결말보다도 훨씬 더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명대사이자 아다치 미츠루다운 결말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