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개화기
(05) 만화가에서 한국화의 대가가 된 3인방(3) : 이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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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승이 ‘속담’을 만화한 작품(‘만화선집’, 1971년) |
이필승의 본명은 이필언으로, 1941년 경남 출신이다.
그는 풍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 왔으나 모든 것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포기할 줄 모르는 노력에 의해 마침내 작가로 등단하고 만다.
데뷔작 스포츠만화 ‘박치기’. 추리만화 ‘4호실’ 등을 통해 그동안 연마해 온 실력을 만화작품을 통해 마음껏 발산하였다. 특히 그는 야구에 남다른 소질과 열의가 있어서 문화인 야구대회가 있을 때면 앞장서서 국가 대표출신 명코치를 수배하여 데려 오기도 하고, 연습할 운동장을 미리 수배해서 빌려 놓는 등, 야구부장으로써 할 일을 충실히 이행하는 열성파였다.
1974년 시합을 앞두고 이필승 씨의 거처였던 수색 밖의 외진 곳에서 맹훈련을 하였던 화전 팀은 제일 부지런한 열성파들이었다. 연습 중 부상당했어도 절룩거리며 연습장에 나오는 결사대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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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였던 이필승씨가 회화, 조각전을 신문을 통해 알리고 있다.(1997년) |
야구팀은 당시 협회 부회장이었던 하고명 씨와 손의성 씨가 이끌어 가고 있었는데, 매년 열리는 문화인 야구대회에서 우승과 준우승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3총사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이필승 씨는 그가 가진 야구열만큼 만화작품에도 열의를 쏟아 붓는다면 최고가 되고도 남을 것이라고 야구 연습 때마다 생각하곤 하였다는데, 1986년 서양화로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함으로써 그는 명실공히 최고가 되었다.
캔버스에 주로 돌담을 묘사하여서 ‘담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서양화가 겸 조각가로 활약하고 있다. 그보다 훨씬 이전인 1978년에는 르살롱 공모전에서 금상을 차지하기도 한 실력 있는 작가이다. 이필승씨는 한동안 미술학원을 운영하면서 입시반 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하였는데, 지도방식이 남달라서 많은 입시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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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언 담 설경 8호 1979년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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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만화를 우습게 여겨오던 미술계에서, 만화가가 두 번씩이나 당당하게 영예의 대통령상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우리 만화가들의 숨은 실력을 대변해 준 것만 같았던 자랑스럽기 그지없는 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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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미술시자에서 고가로 팔린 리히텐슈타인의 ‘차안에서’ |
만화를 예술로 승화시킨 로이 리히텐슈타인
근래에 만화를 응용한 미술품들이 등장, 전세계 미술시장과 애호가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1960년대 미국 팝아트의 작가 앤디 워홀이 마를린 몬로, 코카콜라등 대중문화에서 영감을 얻어 독특한 작품세계를 연출하자,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만화, 신문잡지의 광고등에서 이미지를 얻어 새로운 작품을 발표해 만화의 순수 미술로서의 재탄생을 보여주고 있다.
이웃 일본에서는 만화지 예술이냐? 로 미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국제미술 시장에서는 값비싼 작품 작가명단 상위권에 든다고 한다. 얼마전 국내 삼성그룹에서도 구입했다는 ‘기쁨의 눈물’을 두고 한동안 떠들썩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