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준의 한국만화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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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04)만화가에서 한국화의 대가가 된 3인방(2) 박부길

박부길은 1942년 충남 부여 태생으로 동양화가의 꿈을 안고 홀로 상경하였다. 그 역시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에 따라 학비 등을 마련하기 위해 자기가 그린 만화를 들고 여기저기 출판사를 찾아 다녔다..

2009-01-08 박기준



                                            제7장 개화기

 (04) 만화가에서 한국화의 대가가 된 3인방(2) : 박부길

만화선집
박부길이 ‘작가정신’을 강조한 작품(만화선집 1971)

박부길은 1942년 충남 부여 태생으로 동양화가의 꿈을 안고 홀로 상경하였다. 그 역시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에 따라 학비 등을 마련하기 위해 자기가 그린 만화를 들고 여기저기 출판사를 찾아 다녔다. 학창시절부터 그림 기초가 탄탄하였던 그는 다행히 ‘명마 킹’ ‘흙’ 등의 작품으로 무난히 데뷔하기에 이른다.

1973년 순진하고 착한 소년 캐릭터를 등장시켜서 밝고 명랑한 어린이 세계를 흥미진진하게 그려 나갔는데, 이것이 어린 독자들에게 잘 먹혀 들었다.
당시 우리 만화계는 박기정-박기준 형제와 박부성-박부길로 이어지는 소위 4박자 작가의 행진이 청소년 만화계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던 시기였다. 선배들의 그림체가 비슷한 것과 이름 또한 비슷하였던 것이 덕을 보았다. 그러나 성숙해지면서 ‘소년 이소룡’ 등 자기만의 그림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1970년대 중반에는 독점출판사 합동의 횡포에 반기를 들고 군소출판사 임창(땡이문고), 윤동근(화문각 사장) 등과 연대하여 출판업에 뛰어들어 게릴라식 판매, 또는 틈새시장 판매처를 개척해 나가기도 했다.
당시 신문가판대에는 고우영의 ‘삼국지’, 강철수의 ‘사랑의 낙서’ 4.6배판의 얄팍한 성인만화책들이 진열되어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그는 반공만화 ‘김일성의 침실’을 그려 가판대에 올렸다. 그러나 결국 이것으로 인해 중앙정보부의 눈총을 받아서 출판업을 접게 되었다. 이후부터는 한동안 중단했던 한국화 작업과 원고 작업에만 전념하면서 내가 몸담고 있던 친목회 만필회의 회원으로 가입, 만화가 협회의 5,6대 이사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그는 1982년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한국화로 수상, 한국화가로, 그리고 대학교수로 경남에서 활동하고 있다. 호는 그의 고향 백마강에서 가운데자를 생략하여 ‘백강(白江)이라 지었으며 본명은 전래식이다.

박부길 한국화, 산
박부길(전래식, 油江) 한국화(반추상), 산 106×98.5cm, 1994

오랫동안 만화가 생활을 하면서 씨를 도왔던 제자로는 낚시만화가로 잘 알려져 일본 잡지에 연재, 단행본까지 출간됐던 오세호와, 만협 이사였으며 대학 강사인 조득필 등이 있다.

대한민국 대상을 수상한 후에도 압구정동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하면서 목우회 등 화단멤버로 작품활동을 했고, 전시 때마다 카탈로그에 (사)만화가협회 이사였다는 경력을 또박또박 적어 넣었던 일, 만화가였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알리는 씨가 기억에 생생하다. 화단에서도 더욱 더 주목받는 거목이 되기를 옛 동료로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