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개화기
(03) 만화가에서 한국화의 대가가 된 3인방(1) : 송영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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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방의 사극만화 ‘박문수(1959년)’, 대부분 붓그림이다. |
경기도 화성 출신인 송영방 씨는 1936년 생으로, 집안 형편이 어려운 고학생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던 그는 중학시절부터 주변에 천재로 알려질 정도였다 한다. 그가 만화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용산중학교 동창이자 서울미대에 함께 다녔던 신동우 씨의 도움이 컸다. 당시 학생 신분이면서도 인기만화가로 유명세를 탔던 신동우 씨는 잡지사며 출판사 어디를 가나 크게 환영을 받았고 수입도 좋았다. 그런 그의 뒤를 따라다니면 일거리가 생기는 셈이었으니 궁핍하던 시절의 송영방에게는 구세주 같은 친구였다.
1957년에는 아동지 ‘새벗’과 ‘소년세계’ ‘새소년’ 등에 삽화가로 활동하였으며 그런 대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은 크게 욕심을 내 보았다. 몇 장짜리 삽화와는 달리 만화 원고료는 인기에 따라 상당한 고료를 받게 된다는 것, 그리고 단행본을 내게 되면 큰 목돈이 생긴다는 것은 적잖은 유혹이었다. 그는 신동우 씨의 도움을 얻어 1958년 성문사 시리즈에 세계명작 ‘철가면’을 각색한 만화와, 동문사에서 ‘박문수’를 펴내기로 하였으나 일은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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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방의 일러스트 여학생지의 단행본 레먼문고의 ‘수우언니’표지화 |
달에 두세 권씩 쓱쓱 그려대는 신동우에 비해 섬세한 화력을 지닌 그는 석달이 걸려서도 채 한권을 끝내지 못하는 데다가 신인이라 원고료도 신통치가 않았다. 1959년 천신만고 끝에 발행된 ‘박문수’는 이조말엽, 양반가의 자제 일엽이 조실부모하고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공부하여 장원급제, 암행어사가 되어 전국을 돌며 임무를 수행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는 보통의 만화처럼 인물 중심으로 섬세한 묘사를 하는 대신, 넉넉한 구도의 동양화를 그리듯 큰 틀의 배경 속에 사소한 것들은 과감하게 생략해 버렸기 때문에 만화라기보다는 신문삽화, 혹은 그림 이야기 형식의 붓그림 책이 되어 버렸다.
결국 송영방 씨는 만화를 포기하고 삽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여학생지’에도 그의 삽화와 컬러화 등 많은 작품이 남겨져 있다. 이후 신문삽화, 아동 그림책, 컬러삽화 등 작업을 하는 틈틈이 한국화 그리기에 정진하였던 씨는 1960년대 국전에서 특선을 하게 되고 국무총리상을 수상하고 국전추천작가, 국전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었다. 지금은 만화가라기 보다는 한국화가로, 미대교수로, 그리고 한국화의 대가로서 대접받고 있다.
그의 호는 우현(牛玄)으로 그림 값도 꽤 비싼 측에 들어간다. 학창시절 신동우 씨는 시대활극 만화의 검투 장면에서 ‘송’ ‘방’하는 기합 소리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이는 절친한 친구 송영방의 이름 앞뒤 글자에서 따온 것으로, 보낼 송과 방어할 방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하며, 송! 방!은 이후 신동우 씨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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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방(牛亥) 한국화, 장강삽협 95×28cm 19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