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장 개화기
(10) 만화가 협회 시대
참새가 방앗간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 1975년 여학생 잡지에서 손을 뗀 나는 그동안 잊지 못하던 만화의 매력에 이끌려 다시 만화계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해 2월 한국만화가협회 회장 선거에 출마, 9대 회장으로 선출되면서 두 번째로 협회 일을 보게 되었다.
같은 직업의 만화가들이 조직을 결성, 공동 문화권을 형성하고 이를 단체 이익과 자신들의 권익 옹호를 위해 공동 대처하는 장으로 활용하자는 것이 이 협회의 결성 목적이었다. 그리고 내적으로는 정보교환, 상호친목 등의 기능을 갖지만 대외적으로는 공동이익을 최우선하는 게 단체 공존의 목적이었다.
현재의 사단법인 한국만화가협회도 문화관광부의 출판진흥과에 소속되어 있다. 1948년 우리나라 최초의 만화가 단체는 김용환 씨가 중심이 되어 결성한 만화가 동인회이다. 회장 김용환, 부회장 김일소, 고문 웅초 김규택, 그리고 김의환, 임동은, 김용필, 최상권, 오주환, 채남인, 이영춘, 신동헌, 이병주 씨 등이 회원이었다. 그러나 월 2회 동인지 성격으로 간행되던 ‘만화행진’이 이승만 정부에 비판적인 내용을 담았다는 이유로 강제 폐간되자 이후 동인활동도 중단되었다.
그후 1954년 대한만화가 협회가 발족, 김용환 씨를 회장으로 옹립하고 신동헌 씨를 중심으로 아동과 성인잡지 연재만화를 창작했던 작가들이 결성하여 만들어졌다. 오랜 작가생활을 해 온 원로 보수파 중심의 협회로서 명동 몽블랑 다방이 그 모임장소가 되었다. 회장 김용환, 부회장 김일소, 고문 웅초, 사무국장 신동헌, 회원으로는 김의환, 최상권, 박광현, 안영배, 이병주, 김경언, 이상호, 백인수, 박기당, 정한기, 신동우, 송영방, 신현성, 임수, 김근배 씨 등이다. 다시 1956년에는 현대만화가협회가 탄생하는데, 선을 정리해서 표현했던 신문잡지 등 성인만화작가 계열의 혁신파 그룹이 김성환 씨를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들은 동방다방을 모임장소로 정한다. 회장은 김성환, 안의섭, 박기정, 정운경, 길창덕, 한성철, 김기율, 이재화, 이원수, 이서지(풍속화가), 김이구(소설가 김승옥), 노석규, 필자 등이 회원이다. 두 단체는 1959년 미국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만협(N. C. S.)에 공동가입했다. 그리고 두 단체는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만화의 위상을 높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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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열린 문화인 야구대회, 부산국제신보에 게재(1959.7.14) 아래/ 제1회 문화인 야구대회(1958년)에 출전한 만화가팀, 뒷줄 왼편부터 김용환, 신동헌, 박현석, 정운경, 희문고교의 야구코치(성명미상), 안의섭, 박기정, 앞줄 왼편부터, 이소림, 김경언, 정한기, 이상호, 박기준 |
1959년 경향신문이 주최한 문화인 야구대회에 만화가 야구 단일팀을 처음 결성 출전했다. 그리고 부산국제신보, 대구매일신보 주최 문화인 야구대회에도 영화배우 팀과 함께 기차편으로 원정시합도 여러 번 가져서 만화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단골피처와 캐처는 항상 형과 내가 시합 때마다 책임지곤 하였다.
그러나 큰 불상사도 일어났다. 1959년 7월 17일 부산국제신보가 주최하고 부산시 동아타이어사가 후원한 제1부 만화가 대 영화배우 교환 야구전(유료)과 제2부 시민 위안의 밤이 부산 서대신동 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됐다. 당시 편집국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원로만화가 김일소(벽창호) 씨가 기획에 일조하고 있었다. 국제신보사의 신사옥 이전을 기념하기 위해 벌인 이 행사의 친선교환 야구경기는 공설운동장 야구장에서 이 날 오후 1시부터 시작된 부산병기학교 팀 대 미군팀의 오픈 게임에 이어 3시부터 메인 게임으로 인기만화가 팀 대 인기스타 팀의 본선경기가 많은 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사히 끝났다. 이어서 밤 7시부터 육상경기장 야외 특설무대에서 벌어진 만화쇼, 무용, 가요, 코미디쇼 등 ‘시민 위안의 밤’을 구경하기 위해 약 3만명 이상의 관중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후라이보이 곽규석의 사회로 공연은 한창 흥겨워지고 있었는데 8시경 갑작스런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하자 운집해 있던 관중들이 일시에 소나기를 피해 뛰쳐나가려는 대소동이 일어나면서 3만 인파가 한꺼번에 좁은 운동장 출입구로 빠져나가기 위해 몰리다 보니 넘어지고 짓밟혀서 ‘시민위안의 밤’은 순식간에 ‘시민대참사의 밤’으로 변하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특히 사망자 중엔 밑에 깔려 압사한 어린이가 많았다. 이 사고로 68명이 사망했고 24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했다. 우리 만화가 팀은 개런티로 받기로 한 금액을 전액 희생자 추모금으로 내놓고 또 조위금을 걷어서 내놓으면서도 뭔가 죄를 지은 것 같은 심정 때문에 부산역이 아닌 초량역을 통해 기차로 쫓기듯 상경했던 것이다.
이처럼 불의의 사고는 있었지만, 사이좋게 공존해 오던 한국만협과 현대만협 두 단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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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만협총회 : 앞줄 왼편부터 정운경, 김성환, 이재화, 안의섭, 김근배 / 뒷줄 (미정), 김기율, 박기정, 한성철 |
1961년 군사 쿠데타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국아동만화 자율회라는 관 주도하의 어용 검열기구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1968년 10월에 문공부 산하에 한국아동만화 윤리위원회를 두어서 심의권을 이전시킴으로써 자율회는 다시 해체된다.
이에 따라 만화작가들은 자구책으로 새로운 협회 창립 준비에 나서는데, 신동우, 손의성, 김기백, 권영섭, 박부성, 하고명, 최백산, 이종진, 필자 등 9명으로 구성된 준비위원회가 결성되면서 1968년 10월 한국신문회관에서 발기인 총회를 가진 한국만화가협회는 정관 제정과 함께 임원을 선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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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당 만화가협회 멤버들 |
초대회장 : 박기정 / 부회장 : 권영섭 / 이사 : 신동우, 김기백, 서정철, 심명섭, 손의성, 백산, 이근철 / 감사 : 고우영, 황정희
이 종로구 당주동에 사단법인 한국만화가협회가 첫발을 내딛게 되는 것을 전후해서,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있던 만화가들은 뜻을 함께 할 동인회 성격의 군소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다.
1. 1960년 대한아동만화가회
회장:박기정 고문:안의섭 김완기, 이영복, 유림, 필자, 함일용, 김복남, 윤석환, 이종진, 박교순, 심명섭
2. 1961년 중앙아동만화가회회장:김산호, 조항리, 이덕송, 배봉규, 채일병, 양정기
3. 1977년 만필회회장: 필자, 차형, 정훈, 이우봉, 계월희. 최운정, 박부길, 박수산, 최정수, 김태곤, 이소풍, 여태수, 천광석, 김준, 심명섭
4. 1978년 심수회회장:고우영, 김원빈, 이정문, 신문수, 윤승운, 박수동, 이두호, 오성섭, 지성훈, 이진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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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들의 낚시모임. 심수회 회원들이 낚시터에서 |
5. 1983년 사다리회
회장:이우정 이향원, 허영만, 김철호, 이상무, 김영하, 장태산, 김수정, 이현세, 김동화, 황미나
6. 1993년 페코코리아(FECO KOREA) 결성벨기에에 본부를 두고 있는 유럽 카투니스트 연맹 한국지부이다. 초대회장 이원수에서 사이로, 필자 외 40명의 카툰 위주의 단체였다. 그러나 당시 사무국장으로 모임을 주도했던 조관제 씨가 한국카툰협회로 명칭을 바꾸고 회장으로 취임, 현재까지 활동 영역을 넓혀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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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코코리아 사인 |
7. 1995년 한국시사만화가회
회장 : 이훙우, 안기태, 김상택, 김송빈, 안백룡, 박상기, 유기송, 조민성, 조대현, 김을호, 박재동, 박호성, 김민섭, 신현준, 양병윤, 김종두, 김선학, 김용덕, 하종갑, 백주현, 양만금, 박순찬, 조태호, 조기영, 현회장 손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