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격동기
(4) 디자인 일을 하며 싹틔운 만화의 꿈
중학교를 마친 1955년, 부산 범일동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사촌형한테서 반가운 소식이 왔다.
부산 미 공보원과 북부교회 뒤편에 정치신문사라는 간판이 붙어있는 청계천 위 신문사 지사였는데, 주재기자와 곁들여 출판도 하고 인쇄 전문 디자인부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대에는 인쇄, 사진제판소 등이 밀집해 있어서 큰 관심을 끌고 있던 곳이었다.
그동안 갈고 닦은 나의 솜씨를 시험할 기회가 온 것이다. 지사장은 나의 포트폴리오를 펼쳐보고 그림을 그려보게 한 후 전문가에게 나를 넘겨 그의 평가를 들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런 다음 나는 비록 얼마 되지 않는 봉급이었지만 그곳에 채용되어 침식을 제공받으면서 디자인과 인쇄 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5시에 퇴근해서 다닐 수 있는 야간학교에 등록하였던 것이다.
가장 운이 좋았던 것은 그곳에서 디자인에 소질이 있는 세 살 연상의 배상환이란 친구를 알게 된 것이었다. 우리는 침식을 함께 하는 선의의 경쟁자로서, 꿈을 키우기 위해 서로 최선을 다해 살았다.
훗날 그는 경남 부산의 인쇄 디자인 업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지난해 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늦은 밤 사무실의 야전침대 위에 피곤한 몸을 눕히고는 우리는 기필코 목적을 달성해야만 한다고 잠이 들 때까지 서로의 각오를 다지곤 했던 사이였건만.....
정치신문사에서의 일은 고되긴 하였지만 일찍부터 글 쓰기, 컷, 디자인, 제판기술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에 내 훗날을 위해서도 이때의 경험은 크게 도움이 되었다.
1951년 부산역 맞은편 공터에는 여기저기 가건물이 서 있었는데, 그 중 한곳에 우리 시대 최초의 청소년 만화지인 ‘만화세계’를 발간한 세계문화사가 있었다. 사장 김성옥 씨는 부산 남성여고 교직에서 물러나 그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이 출판사와 깊은 관계를 맺어오고 있던 만화가 서봉재 형을 만나게 된 것도 내게는 희망적인 일이었다. 그는 우리가 만주에서 살았던 일정시대 때부터 친척처럼 지내왔던 사람으로, 당시 시간만 나면 초상화에 몰두하거나 만화와 소설을 즐겨 읽으면서 학업보다는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기를 즐겼던 낙천적인 성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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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한 장의 사진 : 피난 시절부터 자주 볼수 있었던 노점 만화방 |
그러나 호강을 누리던 그도 부산 피난생활에서는 별 수 없이 노상에 만화를 펼쳐놓고 대본업으로 끼니를 연명하고 있었고, 장소는 달랐어도 신동헌, 신동우 형제도 다른 공터에서 대본업을 하고 있었는데 신간 구입비가 부족해서 신동우가 직접 그린 만화까지 내놓고 빌려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서봉재 형의 부친은 부두 노동조합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일본을 왕래하던 일본인 선원들이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쌓아놓고 읽었던 만화를 손에 넣을 수 있었던가 보았다. 그 중에서 ‘소년 케냐’라는 작품을 번역해서 그려 ‘밀림의 왕자’라는 제목을 붙여 세계문화사를 통해 출간하게 된다. 이 책은 당시로선 파격적인 100쪽짜리 고급 단행본으로서 독자들의 대환영을 받았다.
1, 2편 모두 최고의 판매기록을 경신할 정도로 성공작이었기 때문에 원고료에 대한 기대가 컸던 서봉재 형은, 그러나 얄팍한 봉투 하나를 받고는 몹시 실망했노라고 고백했다. 이유는 창작이 아니라 일본 만화를 베꼈다는 것이 약점으로 작용해서였다. 그는 3편부터는 타 출판사에 줘야겠다고 벼르며 출판사 문을 나왔으나 ‘밀림의 왕자’는 그걸로 끝이 되고 말았다.
1,2권을 출간하여 재미를 본 김사장은 3,4편은 윤영기 등 손재주가 있는 사람들을 회사로 불러서, 일본 만화책을 뜯어 분담시켜서 그 위에 트레싱 페이퍼를 씌우고 제도잉크로 펜 작업을 하게 하는 방법으로 원고를 양산했다. 그렇게 하여 윤영기라는 이름으로 3,4편이 출간되자, 이 정보를 들은 다른 출판사에서도 약삭빠르게 먼저 5, 6편을 만들어 출간시킴으로써 ‘밀림의 왕자’는 복사 경쟁작품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 후 서봉재 형은 내가 근무하고 있던 아동세계사를 방문해 왔다. 그와 협의 끝에 ‘아라비안나이트’를 환타지 만화화한 ‘사막의 마왕’과 일본판 명랑타잔류 산남단상의 작품을 계약, ‘황금마왕’과 ‘싸우는 털보 아저씨’로 제목을 붙여서 고급 단행본으로 제작해 문명국이란 이름으로 발간했지만 반응이 썩 신통치 않았으므로 출간을 중단했다.
그 당시 부산 국제시장 안에 만화 전문점도 겸하면서 전국에서 발행한 만화를 판매대에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도매도 하고 출판도 하는 ‘승리상회’라는 출판사가 있어 신인 작가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주로 16쪽짜리 딱지만화를 발행, 작품으로서도 미흡한 것들이 많았지만 겉표지만큼은 박광현 씨 등 실력 있는 분들이 그렸기 때문에 표지 그림에 홀려서 사는 독자들이 많았다. 그밖에 껌이나 캐러멜, 풍선 등에 끼워 넣는 경품으로서 이 딱지만화가 매우 유용하였다. 나는 이 산해당 출판사의 작품 수준을 내 실력과 비교하면서 상당히 희망적으로 만화가의 길을 생각해 보기도 하였다.
서봉재 형은 오래 전부터 딱지만화를 통해 창작생활을 해 오고 있었다. ‘파도’ ‘암행어사’ ‘쌍무지개’ ‘갈랫길’ 등 기초실력은 이미 충분히 다져진 분이었다.
그 시절의 만화계에는 김성환, 김의환 씨의 ‘도토리 용사’가 대구에서 발간된 이래 전시 상황하에서 최고의 판매 부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일본만화 ‘밀림의 왕자’를 능가할 정도였으므로 통쾌하기까지 했다.
이어서 부산에서도 박광현씨의 붓그림 ‘숙향전’ 상하권이 고급단행본 50쪽짜리로 발간되어 화제가 되었다. 해방 후부터 ‘조국의 누나’, ‘피 묻은 수첩’, ‘백마성의 비밀’ 등으로 잘 알려진 분이었는데 부산 피난시절엔 어째선지 활동이 뜸해 있었다. 원고료가 싼 까닭인지 주로 딱지만화 표지와 인쇄물에만 손을 대고 있더니 극화 숙향전‘을 발표하는 순간 ’역시 대가는 살아 있었구나!‘하고 모두들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또 하나, 그는 이 책을 평소 지면이 있던 인쇄소, 지업사, 제본소 사장들의 협조를 구해서 외상으로 자신이 직접 출판하였던 것이다. 전국적으로 판매에는 성공한 셈이었으니 수금만 잘하면 외상을 갚고 이익금을 챙겨서 본격적인 출판사 진출을 꿈꿔도 좋을 터였다.
그러나 평소 낙천적인 성격에 애주가였던 그는 출장 후, 방석집 때문에 수금한 알토란 같은 돈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변명하면서 빚쟁이들에게 빈 가방을 내보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