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해빙기
1953년 휴전이 성립되자, 부산역과 대구역 등 모든 역에는 피난지를 떠나 서울로 가려는 인파로 북적댔다. 라디오에서는 연일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부산에서 활동하던 박광현 씨, 전통 사극 ‘녹슬은 칼’, ‘유관순’, ‘타잔’ 등 일찍부터 붓그림으로 극화를 그리고 있던 최송산(최상록) 씨, 그리고 서봉재 형, 신인작가로 발돋움하던 오명천, 손의성, 서정철 등도 하나둘씩 짐을 싸서 상경길에 올랐다.
그때까지 오명천 씨는 ‘싼디만’을 손의성씨는 ‘동경2번지’를 발표하기 전이었다. 서정철 씨도 스토리작가의 스토리를 받아서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때쯤 수요에 비해 만화의 공급이 부족했던지, 출판업자가 중학생인 고우영 씨를 찾아와 출간할 것을 제안, 16쪽 짜리 딱지만화 ‘쥐돌이’를 발행한 일화도 유명하다. 그 시절 딱지만화란 제작비를 아끼려고 최저가로 만든 만화책 A형과, 사진 비용까지 줄이려고 원고 작업을 인쇄판(아연판)에 해먹으로 펜과 붓으로 직접 그려 찍어낸 더욱 조잡한 만화책 B형이다. B형은 판매용이 아니고 점이나, 캬라멜, 풍선 등을 두꺼운 종이에 다량 붙혀 놓은 상단에 당선경품으로 만화책을 접어서 부착해 놓은것이데, 일부만 보이는 겉표지는 그럴듯하게 보이기 때문에 아동들이 만화책을 탐내고 먹거리를 선택하는 떼기(뽑기) 만화가 피난시절에 대 유행하였다. 신동우와 고우영의 딱지만화는 A형이라고 하겠으나, A형도 판매가 신통치 않으면 제과점에 재고처분하여 떼기만화로 쓰여지기도 했다.
(1) 신문만화 시대를 연 만화계의 대부 김성환 |
독립운동가인 아버지를 둔 김성환 씨는 일제 후반기인 1932년 개성에서 출생하였다. 가족과 함께 개성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으며 1946년에 월남, 서울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는 명문 경복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천부적으로 타고난 미술적 재능을 보여 미술교사는 물론 전교생들을 놀라게 했다. 가장 우수한 미술학도만이 미술반장이 될 수 있는 게 당시 그 학교의 전통이었는데, 어렵지 않게 반장직을 맡으면서 그의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1949년 중학교 5학년 때 ‘연합신문’에 ‘멍텅구리’ 만화를 연재하여서 다시 한번 전교생들을 놀라게 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던 1950년에는 ‘만화뉴스’에 입사, 기자 겸 편집과 만화 담당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사병만화, 캐리커처는 물론 고사리, 꽁생원 등 차원 높은 성인만화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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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환의 초기 사병만화 <김멍텅구리> |
그러나 6.25 한국전쟁으로 인해 대구로 피난, 육군 정훈감실의 문관으로 3년간 육군화보지 일을 하게 된다. 대구 매일신문의 시사만화도 잠시 맡은 적이 있었다.
그때 피난지에서 창간된 ‘학원’지는 청소년들에게 가뭄에 단비 같은 커다란 즐거움을 주었다. 특히 2쪽에 불과한 연재였지만 김성환 씨의 ‘꺼꾸리군 장다리군’은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청소년들에게 커다란 위안과 낙이 되었던 걸작이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연속으로 그려졌던 ‘새침이 일기장’ ‘빅토리 조절구’ 그리고 새벗에 연재되었던 ‘세모돌이 네모돌이’ ‘소케트군’ 등 학원만화들은 새로운 만화의 기풍을 보여 주었을 뿐 아니라 많은 독자들을 매혹시켰다.
이윽고 휴전협정으로 한국전이 종식을 고하면서 서울은 본격적인 재건의 망치소리가 시작되었고, 그와 함께 출판계도 용트림하기 시작했다.
김성환 씨의 캐릭터 ‘고바우’는 한국전이 발발하던 해에 구상하기 시작, 1년만에 태어났다고 한다. 우리의 정겨운 옛이름 바우에다 높을 ‘고’자를 성으로 붙여서 높은 바위라는 뜻을 암시하여 운치도 있고 오늘날까지도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이 ‘고바우영감’이 처음 선보이게 된 것은 1955년 2월 1일 동아일보를 통해서였는데, 초창기의 소재는 생활 주변의 에피소드로서 판토마임 기법의 생략된 4단 만화였다. 그러던 것이 몇 달 후부터 시사만화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 4단만화가 1단만화와 다른 점은 둘째 칸이나 셋째 칸에서 결과를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첫째 칸에서 셋째 칸까지는 독자로 하여금 의문을 품게 하여 결과에 대한 흥미를 고조시킨 다음 넷째 칸에서 의문을 해결하여야 하는 것이다. 일종의 추리소설 같지만 이 점이 4단만화의 매력이라 할 수 있다. 기(起), 승(承), 전(轉), 결(結) 이라는 4단 작전 구성을 통해 표현된다. 동아일보에서 풍자만화 ‘고바우영감’을 연재시켜 독자들의 대폭적인 인기를 끌게 되자 만화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던 타 신문사들도 술렁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엔 눈치만 보고 있던 신문사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덩달아 만화를 싣기 시작했다. 이후 세태를 풍자하여 많은 애독자를 갖게 된 ‘고바우영감’은 가장 오랫동안 연재된 신문만화의 대명사가 되었다. 1958년에는 영화화되기도 하고 노래로도 만들어져 동네 아이들이 즐겨 부르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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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학원만화 [빅토리이 조절구], 우:한국화로 그린 [고바우와 소케트군] |
여러 번 필화사건에 의한 고충도 많았지만 국민들의 지극한 애정 속에서 다시 일어설 힘을 되찾곤 했다. 그가 즐겨 사용하던 신문 풍자 유형으로는 판토마임, 캐리커처, 비유, 계단식, 동문서답, 유행어 응용, 그림자 응용, 닮은 꼴 그림 응용 등 다양한 표현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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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환씨의 <거꾸리군 장다리군>, 1954년 단행본 발행 그리고 영화화 되기도 했다. |
김성환 씨와 내가 알게 된 것은 우리가 회기동으로 이사하고 난 후였다. 우리 집에서는 불과 일백미터 떨어져 있는 한옥에 살고 있었는데 무척 조용한 분이었다. ‘주간 만화뉴스’ 지에서 편집기자로 일했을 만큼 필력도 갖춘 그는 틈만 나면 수필, 잡문, 기행문 등 집필활동에 힘을 쏟아서 해외여행기 ‘고바우 인간동물원’에 이어 세계일주 스케치 ‘고바우 방랑기’ 등을 펴내기도 하였다. 나는 내가 몸 담고 있던 크로바문고에 씨의 작품을 펴내기로 하고, 학원지에 연재했던 ‘꺼꾸리군 장다리군’ ‘빅토리 조절구’ ‘새침이 일기장’ 3권을 계약 발행하였으며, 친히 내가 집필한 ‘만화작법’의 추천서를 써주기도 하였다.
김용환씨의 부인 또한 친절하고 상냥하며 활동적인 분으로, 명문대 영문과 출신인 그녀는 씨의 전시회가 있을 때마다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하면서 해외 전시 때는 번역하여 알리기도 하는 등 후배들로부터도 존경을 받고 있다.
우리가 살았던 회기동 주변에는 안의섭씨, 정운경 씨도 가까이 살고 있어서 현대만화가 협회 본부가 차려져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김성환씨는 재능 있는 후배만화가들을 여러 모로 후원해 주었으며 신인만화가 김기율, 홍모래, 김이구(김승옥) 후에 소설가 등 신문잡지에 적극 추천하는 일에 힘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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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우 김성환 작품 전시실 사진] 좌로부터 허어, 사이로, 박기준, 신동헌, 김성환, 이홍우, 이두호, 권영섭 |
그의 만화와 수필집 등은 해외에서도 출간되어 세계적인 만화가 대열에 서게 된다. 이웃 일본에서는 ‘고바우 작가론’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대학원 졸업생도 있어 화제를 낳기도 했다. 2001년, 그는 자비로 고바우만화상을 제정, 매년 만화 창작에 크게 기여하였거나 만화 문화 발전에 공헌한 만화가를 선정, 상장과 상금을 수여함으로써 만화계의 역사에 남을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얼마 전 한국전쟁 현장기록화를 정리, 한국과 일본에서 전시회를 가져 대성황을 이루었는데, 지금도 틈만 생기면 한국화 전시를 갖는 등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어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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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일본에서 박사 논문을 받은 <고바우 작가론>표지 이미지 우, 한국전쟁 현장 기록화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