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준의 한국만화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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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12) 3박자를 갖춘 만화계의 대부 김용환

김용환 씨는 1912년 경남 진해군 진영에서 큰 과수원을 운영하는 집안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던 씨는 부산 동래고를 졸업하던 해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회화 전문학교인 가와바다 미술학교에서 데생공부를 하고 이듬해 제국미술학교에 입학, 정식 교육을 받으면서 학비와 부족한 용돈을 벌기 위해 신주쿠에서 즉석 초상화를 그리는 아르바이트도 했고 유명한 삽화가의 조수로서 삼성당의 백과사전 그림을 그리는 일도 했으며...

2009-03-10 박기준



                                      제7장 개화기

       (12) 3박자를 갖춘 만화계의 대부 김용환

김용환 작가 사진
김용환 작가

김용환 씨는 1912년 경남 진해군 진영에서 큰 과수원을 운영하는 집안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던 씨는 부산 동래고를 졸업하던 해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회화 전문학교인 가와바다 미술학교에서 데생공부를 하고 이듬해 제국미술학교에 입학, 정식 교육을 받으면서 학비와 부족한 용돈을 벌기 위해 신주쿠에서 즉석 초상화를 그리는 아르바이트도 했고 유명한 삽화가의 조수로서 삼성당의 백과사전 그림을 그리는 일도 했으며 일본소년 잡지에 기다고지(北宏二)라는 필명의 삽화를 게재해 주목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실력을 인정받게 된 그는 대형 출판사 고단샤의 세계명작동화 삽화를 그리게 되면서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코주부 삼국지 이미지
코주부 삼국지

그 시대는 칼라인쇄는 높은 가격 때문에 엄두도 못 내고 겉 표지 외에는 모두 흑백인쇄로 책을 만들었으므로 삽화는 섬세한 펜화로 그려지고 있었다. 그는 펜화의 대가로 알려진 가바시마 가쓰이치의 작품에 매료되어 그를 본보기로 연습하였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일본 펜화가 사이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사실화, 간소화 데생에서 펜화, 붓그림, 채색에 이르기까지 완벽하여 일본에서도 따를 자가 없었다.
1942년 동경에서 작가생활을 하면서 ‘동경조선민보’에 만화연재도 한 적이 있는데 무지한 재일 노동자들을 선도하기 위해 만든 만화가 ‘코주부’였다.

8.15해방을 전후해서 재일 문필가, 화가들과도 교류가 활발했다. 1945년 귀국한 그는 ‘서울타임즈’에 ‘코주부’를 연재하면서 출판사들의 청탁에 따라 32쪽짜리 단행본 ‘흥부와 놀부’ ‘똘똘이의 모험’ 등을 발표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신문과 성인잡지에는 ‘코주부’에 이어 ‘허풍선’ ‘깡통여사’ 등이 연이어 실렸다. 또한 출간된 잡지에 비해 실력 있는 삽화가가 부족한 시대였으므로 삽화 청탁도 폭주하였다. 그러나 일본에 비해 원고료는 턱없이 낮은 수준이었다. 책 판매 부수부터 워낙 차이가 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었던 그는 원고료가 낮은 곳에는 그림을 간소하게 그리고 목정(木丁)이란 필명을 쓰기도 했다.

김용환 코주부전 전시회 사진
김용환 코주부전 전시회

1949년 3월, 씨는 ‘만화뉴스’를 자비로 발행, 4만여 부가 판매되는 성적을 올린다. 그러나 6.25사변이 발발하면서 그의 역경은 시작되었다. 북한미술동맹이 그를 끌고 가서 벽보 계시용으로 스탈린, 김일성 초상화는 물론 이승만과 국군을 비방하는 포스터를 강제로 그리게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9.28 국군의 서울 수복 때는 반공법에 걸려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김용환과 부역혐의로 끌려온 만화가들 중 임동은씨는 이곳에서 아깝게도 병사했다. 총살 직전까지 갔던 김용환의 명성을 알고 있던 장교 등의 진언으로 간신히 살아남게 되었다 한다.
휴전기간에는 피난지 대구에서 육본의 작전국 심리전과에서 문관으로 근무하며, 국군의 사기를 높이고 침략자인 북한의 만행을 알리는 일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후 신문과 ‘학원’ ‘아리랑’ 등에 연재를 하며 안정을 찾는가 싶더니 복잡한 가정문제로 일본으로 떠나버린다. 그리고 1959년 동경주재 미극동사령부 심리전과에서 근무하며, 대민 홍보물 ‘자유의 벗’에 만화와 삽화 등을 그렸다.

화판에 이순신의 해전을 연출하고 있는 김용환 작가 사진
화판에 이순신의 해전을 연출하고 있는 김용환 작가

친필신년 연하장 이미지
김용환씨가 ‘학원사’ 최덕교 편집장에게 보낸
친필신년 연하장(1978년)

1973년 재일교포지 ‘통일민보’가 창간되자 상임고문으로서 ‘코주부’와 시사만화를 그렸으며 안수길 소설 ‘북간도’의 삽화도 맡아 그렸다. 2007년 11월 국내 최초의 만화영화로 추정되는 필름이 공개되어 문화계에 큰 화제가 되었다. 1950년대에 제작된 ‘성웅 충무공’ 만화영화는 김용환씨가 그림을 그리고 전 KBS 아나운서 박종세씨가 나레이션을 담당했다.

한국최초의 만화영화
한국최초의 ‘만화영화’로 간주되고 있는 ‘성웅 충무공’의 원화.
‘성웅 충무공’은 김용환의 원화들을 그대로 찍어서 음성을 붙여 영상물로
만든 것이다.(1950년대)

이순신장군의 어린시절과 용감하게 왜군을 격퇴하는 모습까지 담긴 30분 분량으로, 한국 영상기록원에서 국내 만화계의 원로 인사들을 초청해 시사회를 가진바 있다. 특히 거북선 모형을 한국 최초로 구성하고 정밀하게 입체적으로 그린 분이 김용환씨였다는것도 증명하고 있다.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의 초기 단계로 수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솔직하며 낙천적인 품성으로 가식이 없는 인생을 살아온 김용환씨는 1994년 미국의 가족들에게 돌아가 노년기를 보내던 그는 지병으로 아쉽게도 타국에서 눈을 감아야 했다. 끊임없는 만화예술에 대한 그의 열정과 함께 그가 남긴 많은 명작들은 우리 만화역사에 길이 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