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해빙기
(4) 시대극화를 개척한 김종래
김종래 씨는 일본 군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1927년 교토(京都)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대한 소질이 남달랐던 그는 문학에도 심취, 눈앞에 보이는 책이란 책은 모두 읽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미였다. 따라서 어딜 가더라도 느껴야 했던 모진 민족차별에 대한 환멸도, 타고난 그림솜씨와 작문솜씨로 라이벌 친구들의 코를 눌러 그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었다 한다.
미군의 마지막 폭격으로 인해 항복하지 않고 버티던 일본 전국이 풍비박산되었을 때, 김종래씨는 교토회화 전문학교 재학 중이었다. 이 교토는 국보급 유물들이 가장 많이 산재해 있어 폭격을 면할 수 있었고, 그곳을 생활의 터전으로 삼아왔던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있어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종전이 되자 김종래씨는 가족과 함께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고국에 돌아왔어도 마땅한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던 그는 고향인 충남 당진으로 내려가 2년 반 동안 미술교사 생활과 농사 일을 하였다. 처음으로 전혀 생소한 농사 일을 손에 접하고 보니 절망감부터 앞서 왔지만, 그 동안 몰랐던 시골 생활에 대한 많은 것들을 터득하게 되는 좋은 체험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사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시골 풍경들, 철마다 달라지는 일거리와 땔감 대책, 멍석과 가마니를 짜고 짚신을 삼는 일, 소와 돼지등 가축 키우는 일 등.... 하루도 빠짐없이 일에 묻혀 사느라 지게 짐을 지고 살다시피 했으니, 이 모든 것은 사극만화가의 운명을 걸머지고 태어난 김종래씨에게 있어 필요 불가결한 산지식으로 내재하게 되었던 것이다.
1947년 김종래씨는 육군에 자원, 상사로 전역하기까지 군에 몸담았고, 이때 비로소 만화와 인연을 맺게 된다. 1952년 육본 작전국 심리전과에 배속 받아 지리산 무장공비들을 회유하는 전단을 만들었는데, 그때 전임자로 있었던 코주부 김용환 씨의 작품들이 견본 역할을 해 주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동양화를 전공한 김종래씨로서는 만화적인 선을 내기가 힘들었지만 끈기 있게 도전하여 상관에게 인정을 받게 되었고, 이듬해는 육군화보에도 만화를 투고하였다.
제대할 즈음은 1954년에는 군 정보 지원을 받아 계몽지 형태의 국판 93쪽짜리 반공만화 ‘붉은 땅’을 펴냈는데, 공산주의자의 실상을 낱낱이 파헤친 작품으로서 큰 반응을 얻었다. 부대가 대구에 있었던 관계로 김종래씨는 제대 후 그곳에서 만화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 당시, 극장에서는 이동 악극단이 인기가 있었다. 인기가수의 노래와 춤, 그리고 전쟁의 참화로 지쳐 있던 국민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기 위한 내용의 신파극이 인기가 있었다. 한 마디로 울분을 달래주기 위한 스트레스 해소용의 극이다. 영화제목이나 연극제목도 ‘슬픔’‘눈물’‘울어라’같은 것이 들어가야 반응이 좋았고, 신파 연극계에서는 ‘눈물의 여왕 전옥’이란 배우가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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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눈물의 수평선’표지이미지 (오른쪽) ‘눈물의 수평선’ 주인공이 추위에 얼어죽고만 동생 철 안고 있다. |
그 역시 유행을 무시할 수 없어 1955년 ‘눈물의 수평선’이란 단행본을 펴냈다. 이 작품이 인기를 끌었으므로 이어서 이광수 원작의 ‘꿈’을 각색한 ‘꿈의 인생’과 ‘복수’등을 발표해서 주가를 높였다. 그 시절만 해도 만화는 아동과 청소년 독자가 대부분이었는데, 김종래씨의 작품은 성인도 볼 수 있도록 수준을 높여 놓은 것이 성공의 요인이었다.
김종래씨의 단행본이 하루가 다르게 판매부수가 올라간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자, 서울 대형출판사의 청탁이 들어오게 되었고 이윽고 김종래씨도 상경을 결심하게 되었다. 서울 용두동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기가 무섭게 잡지사와 단행본 출판사들의 청탁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당시 ‘만화집’이란 격월간 잡지와 단행본 출판 일을 하고 있었던 나도 1961년 겨울, 처음으로 김종래씨를 방문하였다. ‘비 내리는 추풍령’이란 연재물을 청탁하기 위해서였다. 김종래씨는 서글서글한 성격의 부인과의 사이에 두 남매를 둔 가장으로서, 노모도 모시고 있는 효성이 지극한 분이었다.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었지만, 첫 대면부터 얼굴이 밝지 않았던 것은 그가 기관지와 심장계통의 지병이 있었기 때문이란 것을 후에 알게 되었다.
그러나 김종래씨는 다른 인기작가들과는 달리, 1970년 전까지 문하생도 두지 않고 모든 작업을 혼자서 했다. 작품의 양보다 질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 까닭이라고 했다. 1956년 ‘만화세계’에 ‘무정만리’, ‘만화학생’에 ‘눈물의 별밤’을 연재, 1960년 ‘인정의 꽃’ ‘어머니’ ‘마음의 왕관’ ‘앵무새 왕자’ 시리즈, ‘흑두건’, ‘쌍둥이전’, 1970년에는 ‘주간경향’에 ‘도망자 시리즈’와 ‘암행어사’를 2년 7개월 연재하던 중이었는데, 지병의 악화로 인해 마침내 만화를 중단해야 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으므로 김종래씨의 동생이 맡아서 마무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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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김종래씨가 마지막으로 남긴 ‘주간경향’에 실렸던 대장편극화 ‘암행어사’ |
진작에 술을 끊어야 했는데 부인이 극구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통하지 않아서 지병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김종래씨가 선배인 박광현씨와 박기당씨 등과 함께 했다 하면 술집 안방 자리를 차지하고 하루 이틀을 보내는건 예사로 있는 일이었다. 극화가 삼총사로 불리우는 이 세분은 틈만 나면 함께 술자리를 하면서 할 이야기가 없을 때는 호랑이와 사자가 싸우면 누가 이기지?“하고 물었고, ”사자가 이기지, 으르릉!“하고 껄껄 거렸다는 일화를 들려주던 목소리가 아직 들리는 듯 하다.
김종래씨는 20여 년간 약 200타이틀로 1천5백 여권의 책을 펴냈다. 김종래씨의 특기는 자기가 택한 원작을 자기 나름대로 편작해서 더 실감나게 재구성하는 데에 있다. 희로애락을 표현하는데도 고증은 물론, 사계절 변화도 비유법으로 잘 묘사하였으며, 돋보이는 특유의 문장력으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한편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데 명수라는 찬사를 많이 받았다.
김종래씨가 붐을 일으킨 극화(劇化)라는 명칭은 이웃 일본에서 처음 쓰여진 것이다.
1957년 대본용 성인지 ‘가(街)’에 실렸던 다츠미 요시히로, 시라토 산페이(白土山平)등을 중심으로 한 그룹의 독특한 연출과 표현기법인데, 현실감이 강하고 유머 요소는 없는 줄거리를 말한다. 마치 연극을 보듯 실감나게 보여 준다는 데서 다른 만화들과 차별화 하였다. 이 극화 붐이 일었던 그 시기에, 최고의 인기 만화가로 자부하던 ‘아톰’의 데츠카 오사무 같은 작가들도 경쟁에 밀려 한동안 고심하였다고 한다.
김종래씨는 한국만화가협회 제 4대이사로, 그리고 그 후엔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96년에는 제2회 한국만화가 협회상을 수상하였다. 제자로는 한재규, 이희재 등이 있었다.
후배들에겐 너그럽고 다정다감했던 분으로, 건강이 가장 큰 재산인데 무리하다간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게 된다고 충고하길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초창기 우리 만화사에 큰 획을 그었던 원로 극화가 김종래씨는 2001년 1월 28일 향년 70세로 세상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