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해빙기
(6) 꿈과 희망, 현실과 절망...
충무로 주변에는 인쇄소와 지업사들이 즐비하게 자리하고 있어서 출판사로선 일하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그래서인지 충무로에서 ‘만화소년소녀’지가 새로이 탄생하게 된다. 박광현 씨와 박기당 씨가 주축이 되어서 어떤 해군 문관의 자본으로 합자회사로 시작한 것이다. 신동헌과 신동우 형제, 이병주, 김정파, 황정희 씨 등이 기고했지만 갈수록 운영이 어렵게 되자 얼마 못 가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 당시 작품의 인기가 높았던 박기당 씨는 그런 대로 타격이 적었지만 하향 추세였던 박광현 씨에게는 사업 실패는 커다란 타격으로 다가왔다. 많은 지면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수입에 큰 차질이 생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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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현, 박기당 콤비사진(엽전열닷냥) |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좋은 작품이 필요했지만 한국전쟁 전후에나 통했던 세계명작이나 전래동화, 역사를 줄거리로 한 작품들이 이제는 먹혀들지 않았고, 후배들의 기발한 소재와 연출 경쟁에도 밀려서 오랫동안 고전했다. 그런 박광현 씨를 돕기 위해 박기당 씨는 ‘엽전 열닷냥’ 상하권을 글, 그림으로 합작, 원고료를 반분한 적도 있을 만큼 선후배간의 우정은 돈독했다 한다. 그러나 말년에 후두암으로 세상을 뜨기까지 그의 험난한 가시밭길은 계속되었다.
1978년 내가 만화가 협회장으로 있을 때 그를 문병 간 적이 있다. 그때 “나 천당행 티켓 손에 잡았어.”하고 여전히 호탕한 목소리로 빙긋이 웃던 그 6척의 체구. 버릇없다고 알려진 후배는 즉석에서라도 손봐주지 않고는 성미가 풀리지 않았던 정의감이 강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병상에 있는 동안 생활비와 병원비의 뒷감당은 딸이 도맡았다고 하는데, 아버지의 외모를 그대로 빼 닮은 배우 박원숙이 그의 딸로서, 지금도 그녀의 왕성한 활동을 지켜보면서 예능인의 혈통이 대물림하고 있음에 진한 감동을 느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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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만화전’에서 만화가들과 함께 있는 배우 박원숙, 1999년 5월 24일 (좌로부터, 박기소, 신동헌, 박원숙(영화배우, 古박광현씨 딸), 박기준, 김산호) |
박광현 씨 작품의 특징은 김용환 씨의 사실화 붓그림 전통을 시대극화로 계승 개발한 것으로, 김종래, 박기당, 서봉재, 계월희, 방학기, 백성민 등 후배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음은 그 누구도 부인치 못할 것이다. 서울로 올라온 서봉재 형도 살길을 찾아서 신문사며 잡지사, 출판사를 방문해 만화는 물론 삽화로도 탈출구를 찾아보려 무진 애를 썼지만 실력 있는 후배들에게 점차 밀리고 있었다. 마지막 희망인 ‘세계일보’의 ‘Mr.싸이렌트’도 연재가 중단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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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학생’ 표지 (출처:한국만화자료원) |
그는 창작보다 일본만화를 이용하는데 익숙해서 점차 창작력을 잃게 된 것이 문제였다. 마침내 그는 한국 생활을 청산하고 미국 로스앤젤리스로 이민의 길을 선택, 그곳에서 아들과 함께 노후를 보내고 있다. 그런데 한국 최초로 국립 공주대학에 만화학과를 설립한 임청산 교수의 딸을 며느리로 맞고 사돈간이 되었다 하니 참 인연이란 묘하다는 생각을 한다. 만주 생활을 하던 시절, 초상화를 그리던가 소설을 읽으며 낙천적으로 살던 그가 기타를 치며 즐겨 불렀던 고가 마사오 작곡 ‘사케와 나미다까(술은 눈물이던가)’라는 노래는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마치 귀에 들리는 듯하다.
최상권 씨가 운영하던 ‘만화학생’지도 부도가 나는 바람에 그는 빚만 남기고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한 가운데, 서서히 잡지 시대도 윤곽이 흐려졌고 단행본만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만화학생’의 편집을 맡았던 고일영 씨는 큰형 고상영 씨에 이어 이미 30년 전에 안타깝게도 심장마비로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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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델박사’ 최상권(문철) 작품 |
행방불명되었던 최상권 씨는 부산으로 피신하여 그림체를 간소화하여 ‘문철’이란 필명으로 작품도 만들고 후진 양성도 하면서 재기의 길을 걷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으나, 서울로 상경해서 아동만화 자율위원회 위원장을 맡는 등 활동을 계속하는가 싶더니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 그는 국내 생존만화가 중 연세가 가장 많았던 분으로, 해방 전후부터 활동해온 인기와 더불어 명망이 높았던 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