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안정기
(2) 최고의 오락물이었던 만화
그 어려운 시절, 우리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던 것은 영화뿐만 아니라 소설, 만화책이기도 했다. 만화도 몹시 귀한 인기 품목이었다. 그런데 각 반마다 한두 권씩 만화를 갖고 오는 소위 특권층 아이들이 있어, 쉬는 시간이면 이 아이들의 주가가 크게 오르게 된다. 커닝하듯 곁눈질해 가며 만화를 함께 보기 위해서는 저자세에 아양이라도 떨어야 했다.
그러나 만화를 보는 행복한 시간은 너무나도 짧게 끝이 났다. 그 시절 만화는 앞뒤 표지, 광고, 판권을 빼고 나면 32쪽 밖에 안 되는 얄팍한 것이었다. 그때는 빌려볼 수 있는 대본소도 없었을 때다.
그 해 가을, 우리 장충초등학교 야구선수들이 전국 대회에서 부산 대표를 물리치고 준우승을 했다. 경마장에 자주 가면 말을 타고 싶어진다고 했던가. 작은 형 박기정은 야구 도구를 구입 야구에 열중하고 있었다. 특히 투수에 매력을 느낀 때문인지 나를 캐처로 앉히고 공을 세게 던져대는 통에 손과 팔, 어깨, 얼굴이 항상 멍투성이였다. 게다가 저녁이면 새로 구입한 악기에 몰두하는 것으로서 그 시끄럽게 반복되는 아코디언 소리에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그와 같은 시달림 속에서 벗어난 것은 형이 경복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였다. 그 학교에 영어선생으로 재직하고 있던 큰형은 엄격한 성격의 소유자로, 동생들이 공부를 게을리하는 것과 그림 그리는 것, 특히 만화책을 보는 것에 대해 절대 눈감아 주지 않았다. 엄격한 벌은 물론 서슴없이 회초리도 사용했다. 또 밤 12시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책을 보고 있게 했다.
그러나 남몰래 취미를 키우고 있는 작은 독수리 3형제를 어느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그 시절 소설, 동화, 시, 만화가 곁들여진 ‘소학생’ ‘어린이나라’ ‘소년’ 등은 최고의 오락물이었다. 누가 무슨 잡지를 갖고 있다더라 소문이 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빌려 읽는 것이었는데 그래도 읽을거리가 많이 부족한 시기였다.
|
|
|
| |
[가장 오래된 만화책 BEST 6] 1. 김규택(1906-1962) ‘만화풍자 해학가 열전 (1946년 9월, 을유문화사) 2. 김용환(1912-1998) ‘토끼와 원숭이(하)’ (1947년 12월, 청구문화사) 3. 정현웅(1911-1976) ‘노지심’ (1948년, 동문사) 4,5 김용환 ‘홍길동의 모험’, 정현웅 ‘콩쥐팥쥐’(1948-1949년 추정) 6. 임동은 ‘코공주’ (1948년, 아문사) |
지금까지 발견된 한국 단행본 중에서 가장 오래된것은 김규택(1906-1962)의 ‘만화풍자 해학가 열전(김응수 소장)’이다. 한국만화에서 단행본은 해방이후에 나오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용환(1912-1998) ‘토끼와 원숭이’ 역시 (상)권은 1946년에 출간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발견된 것은 아직 (하)권밖에 없다. 공동으로 4위에 오른 김용환의 ‘홍길동의 모험’과 정현웅의 ‘콩쥐팥쥐’는 1948년 경 출간된 책들로 추정되나 발행사항 부분이 훼손되어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
잡지 못지 않게 인기가 있었던 만화 단행본도 우리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서점이나 학교 근처 문구점에서 몇 십 권씩 펼쳐서 빨랫줄에 걸어놓고 전시 판매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만화를 좋아하는 우리들에게 대단한 유혹이었다. 김용환의 ‘흥부와 놀부’ ‘똘똘이의 모험’, 김의환의 ‘푸른별’ ‘어린 예술가’(프란다스의 개), 그 시절에는 영어를 쓰면 독자가 이해 못하던 시절이라 ’어린예술가‘로 제목을 쉽게 했음.), 웅초 김규택의 ‘봉이 김선달’, 정현웅의 ‘알리바마와 40인의 도둑’ 김기창의 ‘허생전’, 임동은의 ‘효동이’ ‘늑대소년’, 김용필의 ‘왕팔이와 토남이’, 최상권의 ‘고비사막’, ‘깨진접시’, ‘배트맨’을 독립군만화로 바꾼 박광현의 ‘푸른만도(망토)’ ‘정의의 쌍칼’ 등 32쪽짜리 만화를 빼놓지 않고 구해 읽었다. 만화중에서도 을유문화사에서 발행한 국내외 명작 시리즈가 10여권 있었는데 종이도, 인쇄도 그 당시 출판된 만화들중에서도 제일 좋았고 쪽수도 타 출판사 것 보다 많았다. 또한 표지장정도 일정했으며, 판형도 4×6판에 아협이란 마크가 붙어 있어 타 만화와 차별화 했고 최고수준 만화가들에게만 청탁했다고 한다.
1950년 이른 봄, 어머니 같은 형수님을 우리 식구로 맞이하게 되어 무척 기뻤다. 우리는 신당동 생활을 접고 상왕십리 한옥으로 이사하였다. 창문 밖으로 경마장의 푸른 잔디가 훤히 보이는 곳으로 마당이 있어서 닭과 병아리도 키울 수 있고 나무도 있어 맑은 공기가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