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준의 한국만화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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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02) 억지 검열로 울고 웃고

1961년 11월, 당시 군사정부 검열관은 정훈장교 출신으로 만화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이면서도 칼로 무 자르듯 마구 검필을 휘둘러대었던 것이나, 우리들은 어디에도 그 억울한 마음을 호소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들의 횡포는 하늘도 말릴 수가 없던 시대였다...

2008-09-11 박기준


                                         제6장 침묵기

                        (02) 억지 검열로 울고 웃고

1961년 11월, 당시 군사정부 검열관은 정훈장교 출신으로 만화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이면서도 칼로 무 자르듯 마구 검필을 휘둘러대었던 것이나, 우리들은 어디에도 그 억울한 마음을 호소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들의 횡포는 하늘도 말릴 수가 없던 시대였다.

왼쪽의 두쪽 원고를 오른쪽의 한쪽 원고가 되도록 수정한 것.
왼쪽의 두쪽 원고를 오른쪽의 한쪽 원고가 되도록 수정한 것.


나에게도 오랫동안 캐릭터로 사용해 왔던 주인공의 이름을 바꾸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캐릭터명은 독자들이 알고 기억하기 쉽도록 성격이나 습성, 풍채 등을 동물이나 물체들에 비유하여 만들어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의 메인 캐릭터 ‘두통이’는 머리가 두 사람의 머리통을 포개놓은 것만큼 크다는 뜻과 두통꺼리라는 두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콤비인 ‘오징어’는 청소년들이 가장 좋아하는 먹거리이자 모양새도 우주괴물 같아서 재미있고 정감이 가서 캐릭터명으로 사용했던 것이나 그걸 바꾸라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오준호라는 평범한 이름으로 개명할 수밖에 없었다. 또 그와 함께 곰팽이란 캐릭터도 쓰고 있었는데, 박테리아 부류명을 쓰지 말고 사람 이름으로 바꾸라는 명령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이도 고팽이로 고칠 수밖에 없었다.
그 옛날에는 임금까지도 어렸을 때의 아명을 개똥(開童)이라고 지어 불렀다고 했다. 인간은 타고나길 약한 동물이었던 것인지, 면역력이 약한 어린 동안에는 조금만 부주의해도 병에 걸려 죽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개나 돼지, 말 등은 아무렇게나 먹으면서도 병에 걸리지 않고 튼튼하게 잘 자라는 것이었으므로, 이를 부럽게 여겨서 신분이 높은 집의 자제라 하더라도 어려서는 별명처럼 동물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 그 유래다. 한데 오락물에 등장하는 이름을 사람답게 바꾸라고 강요하는 것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일은 거기서만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만화가들의 필명도 사람의 이름임을 알 수 있게 고치라는 명령이었다. 그 때문에 인기절정에 있었던 ‘산호’도 필명을 ‘김산호’로 바꾸었고, ‘토니 장’은 ‘장병욱’으로, ‘향원’도 ‘이향원’으로, ‘우정’은 ‘이우정’으로 개명하는 등, 마치 일정시대에 일본 성으로 강제로 개명해야 했던 때를 회상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의 고전이나 영화, 만담에 등장하는 스타들의 예명이란, 평범한 사람들의 이름과 차별화함으로써 보다 빨리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시켜 주기 위한 방법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가령 인기 만담가 장소팔(長笑八)씨의 한자 이름의 뜻은 자기를 만나면 길게 여덟 번 웃지 않고는 못견딘다는 뜻에서 지었다 한다. 해방 후 신카나리아라는 인기 가수의 이름은, 목소리가 마치 카나리아처럼 아름답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민주화가 된 작금에 이르러서는 곰팡이라는 코미디언이 등장해 아무 제약도 받지 않고 활약하고 있으니, 문득문득 그때 그 검열 시대를 회상하는 나로서는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다.

이름만이 문제였던 것은 아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편수까지 제한하는 엄명이 떨어졌다. 그 시대 유행은, 대장편 시리즈 만화가 매우 인기를 끌고 있었다. 1편부터 시작해서 몇 권이고 연속편이 이어지게 되는데, 독자들은 다음 속편이 나오길 애태우며 기다리곤 하였다. 한데, 검열 당국은 이 연속 시리즈를 허용하지 않는다며, 무조건 상하권으로만 끝내라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런 법이 대체 누구의 발상으로 만들어져 하달되었던 것일까?

두통이 중령과 두통이 소장, 모두 상-하
‘두통이 중령’과 ‘두통이 소장’, 모두 상-하로 한정하여 그렸다.- 훈련병에서 대장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월남전 만화 (1972년)

당시 나는 군인만화를 기획, 훈련병에서 대장에 이르기까지의 영웅담을 대장편으로 펴내려고 추진 중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은 두통이 훈련병을 상하편으로 일단 끝내놓고, 이등병 시절도 상하편으로 단락을 지어 가면서 ‘두통이 대장’에 이르기까지 계속 단편으로 된 장편만화를 만들었다. 연속극은 기다리는 맛으로 본다고들 한다. 속편을 앞두고 승리냐, 패배냐? 죽느냐, 사느냐? 스릴과 서스펜스를 펼쳐가며 애타게 다음 편을 기다리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단락마다 끝을 내며 진행시켜 가자니 김빠진 콜라를 마시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어찌됐든 내친김에 ‘두통이 대통령’ 상하편까지 이어가려 했더니 통과시켜 주지 않았다. 당시 대통령이 육군대장에서 대통령이 되었으니 비꼬는 것 같아서인지 아무튼 ‘대통령’ 편은 끝내 빛을 보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천국의 신화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는 기소당했으나 무죄 선고를 받게 된 사연이 많은 만화다

지난 1997년 4월 15일 음대협(음란 폭력성 조장매체 공동 대책 협의회)의 고발에 따라 국내 3대 스포츠신문 편집국장과 10여명의 만화가를 기소한 검찰이 1998년 2월 ‘천국의 신화’의 작가 이현세씨를 미성년자 보호헙 위반으로 기소하면서부터 시작된 재판은 5년간 법정투쟁 끝에 2003년 1월 24일 대법원 2부(주심 강신욱 대법관)으로부터 무죄를 최종 선고 받는 희소식이 있었다. 이로써 음란물이라는 오명을 벗은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만화문화계는 걸작을 펴내는 일에 더욱더 매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