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준의 한국만화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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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03) 독점 출판사의 출현

그 시절 또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단행본 시장에 드리워지기 시작했다.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던 몇몇 출판사가 교묘하게 편법을 쓰면서 시작된 일이다. 그보다 앞선 시절에도 저질만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본소 체제가 자리를 잡으면서 작품 경쟁이 아닌 가격 경쟁으로 흐르려는 양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2008-09-18 박기준



                                      제6장 침묵기

                  (03) 독점 출판사의 출현

그 시절 또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단행본 시장에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던 몇몇 출판사가 교묘하게 편법을 쓰면서 시작된 일이다.
1966년, ‘라이파이’의 인기가 강세로 이어지자 그와 비슷한 소재와 배경에 그림체와 캐릭터까지 닮은꼴로 만들어놓고 ‘라파이안’이란 제목을 붙여서 독자들을 현혹시켜 이익을 취하는 곳도 생겨났다.
그보다 앞선 시절에도 저질만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본소 체제가 자리를 잡으면서 작품 경쟁이 아닌 가격 경쟁으로 흐르려는 양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갱지에 인쇄하였던 것을 선화지를 사용함으로써 재생용지는 폐지에 가까운 수준이 되었고 들쭉날쭉 인쇄도 엉망이었으며 규격도 줄이고 쪽수조차 속이는 졸렬한 방법까지 등장하였다. 이런 시중 상황을 틈타 1967년 막대한 자본을 앞세운 합동출판사가 거대한 공룡처럼 등장했다.
만화제작 공정을 모두 갖추고서 기존 출판사의 전속작가들을 회유, 빼앗아 가는 일은 물론 도작, 모작, 사이비작가 이용 등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어느 정도 인기작가를 확보하고난 다음 전국 총판을 통한 독점 판매권까지 확보하자 기존 출판사들은 모두 손들어 버리고 말았다.
1967년 7월 발행처가 ‘합동’이라 하여 하나로 통일된 후, 독점 출판사는 온갖 횡포를 서슴치 않았다. 기존 원고료를 일괄 인하하여 지불하거나, 한 달에 몇 권 배당된 권수 이상의 원고는 그릴 수 없게 배급제를 실시하면서 만약 이를 어기는 작가가 있다면 그걸로 활동이 끝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합동출판사의 횡포에 만화가들의 갈등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그러나 이에 대항할 뾰족한 수가 없었다. 합동에 도전했다가 맥도 못 추고 도산해버린 군소 출판사들의 예를 지켜보면서 그저 눈치만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참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 법. 한국 만화가 협회 임원으로 있었던 분들이 중심이 되어서 새로운 출판사를 태동시켜 출판 풍토도 개혁하고, 작가들의 권익과 출판의 자유를 쟁취하기로 다짐하고 나선 것이다.
박기정 형과 내가 주동이 되어서 한국일보 기획부와 조율, 인기작가를 비롯 3, 40여명이 한국으로 이동하기로 굳게 약속되어 있었다. 우리는 마치 빼앗긴 고향 땅을 되찾기 위한 투쟁이라도 하듯 숨소리를 죽여가며 모든 것을 비밀리에 진행시켜 갔다.

위) 한국일보사 만화 출판을 알리는 사고 아래) 소년한국일보사와 만화가들 전속 계약 맺어
) 한국일보사 만화 출판을 알리는 사고(1972년 1월 7일)
아래) 소년한국일보사와 만화가들 전속 계약 맺어(1972년)

마침내 그 날이 왔다. 한국일보 기획부에서 전속계약금을 받고 계약서에 서명도 했다. 이로써 소년한국 일보를 발행하던 한국일보사는 1971년 청소년 만화를 출판한다는 계획하에 본격적으로 만화시장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물론 이탈자도 있었고, 합동에서 더 좋은 보수를 받기로 하고 신의를 저버린 자들도 적지 않았다.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해 들은 합동에서 떠나간 만화가들이 다시 돌아오도록 감언이설로 유인하기도 하고, 군대에 가지 않은 작가는 고발을 하거나 세금 고발 등 보복에 나섰기 때문에 당시 어려움을 겪은 자도 많았다. 고우영은 군입대 기피자로 쫗기는 신세였다. 실질적인 가장인 그가 군대에 입대하게 되면 어린 동생들은 거리의 고아가 될 수 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고 당시의 일을 ‘한국 대표 만화가 18명의 감동적인 이야기’에 적고 있다. 또한 전국 판매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위력을 발휘, 한국일보의 판매 저지를 위해 모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일보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언론의 힘을 동원하여 합동의 부당함을 고발하였고, 불량만화 양산과 탈세에 대한 고발 등 양방의 치열한 전쟁은 한동안 기세가 사그라질 줄을 몰랐다.
힘 겨루기는 중반기에 이르러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는 걸로 끝났다. 한국은 일정한 판매시장을 확보했고, 합동은 권력과 함께 언론과 손잡는 타협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일보로 옮겨온 작가들에겐 실망이 컸다. 출판시장을 양분하는 데 그쳤을 뿐 작가들의 입장에선 별로 달라진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임창 씨는 몇몇 작가와 함께 땡이문고라는 출판사를 꾸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양대 출판사에 끼어서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거듭하고 있었다. 다행히 ‘땡이의 사냥기’ 시리즈가 인기가 있어 마치 밀조직 같은 판매망을 통해서 공급하며 때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1976년 임창 씨는 지성잡지인 ‘뿌리깊은 나무’ 8월호에 ‘더러운 만화장사’라며 그 부당함을 폭로하기도 했다. 합동과 한국의 총판을 통한 판매 공조로 인해 그토록 학수고대하던 만화가들의 개혁의 꿈은 멀어지고 만 것이다.

위) 만화 안보기 운동, 앞수해서 불태운 만화들 아래) 만화에 대한 편견의 역사 신문보도
위) 만화 안보기 운동, 앞수해서 불태운 만화들
아래) 만화에 대한 편견의 역사 신문보도

이렇게 격동기도 지난 후 다시 5월이 되었다. 만화는 매년 5월 청소년의 달만 되었다 하면 지탄의 대상이 된다. 대형 언론사가 만화를 출판하게 되었으니 상황이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공격과 비난은 조금도 덜해지지 않았다.
그때 나는 만화가협회의 회장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KBS 라디오 방송국의 청소년 특집 프로그램에 출연 요청을 받았다. 함께 출연하게 될 상대는 아동문학가 협회 소속 중진으로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 시절 만화 때문에 동화책의 판매가 부진하다는 소문이 나 있어서 만화가들에 대한 감정이 폭발 직전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앙숙인 두 전문가를 사각의 링 안에 집어넣고 치열한 난타전을 벌이게 해서 만화 팀 선수가 코피를 흘리며 다운되길 바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방송국의 그런 유도에 말려들지 않았다. 방송 대기실에서 아동문학가와 십여분 동안 대기하면서 서로 부딪칠 일은 없도록 비껴가게 만들었다. 그보다는 해외명작 동화들의 범람으로 국내 동화가 빛을 보지 못하니 국내 동화 사랑하기 운동으로 방향을 돌려놓았다.
그러나 안심은 금물이다. 가제는 게편이라고, 문인협회 등 글로 먹고사는 직업인들중 일부는 아동문학가편을 들어 기회만 있다 하면 신문 방송, TV 보도를 좌우, 공격자로 변하는 것이다. 그 당시의 상황을 김종래씨는 이렇게 적고 있다. “70년대 후반이었어요. 만화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에 패했다고나 할까... 만화란 용어엔 불량이라는 수사가 동반되었잖아. 5월만 되면 연례행사가 되어 모든 언론과 학부모들이 ‘만화잡기’에 나섰으니까- 때만 되면 ‘만화화 형식’을 했었어. 온몸을 바쳐 그리는데 돌아왔던것이 그랬어. 그래서 나는 지쳐버린거야”(‘만화동네’ 인터뷰에서 1999년)
어느 날, 소년한국일보의 김수남 주간(아동문학가로 당시 색동회 회장)이 내게 특이한 제안을 해 왔다. 아동문학가 들에게 도움이 될 일을 추진해 달라는 제안이었다. 즉 소년한국 발행 만화 중 일부 극본을 아동문학가들에게 청탁해서 합작하여 작품을 만들면 누이 좋고 매부 좋지 않겠느냐는 얘기였다. 그래서 판매 부수가 조금 떨어지는 10여명의 젊은 만화가를 선택, 아동문학가들이 써 준 극본을 구입하여 작품화하게 해 보았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이 합작 작품이 출간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얼마 되지도 않아 반품으로 가득 찰 만큼 창고가 재고로 채워져 버렸다. 햇빛은 쨍쨍, 흰 구름은 두둥실, 갈매기는 훨훨, 바닷물은 철썩철썩, 모래알은 반짝반짝, 소라는 노래하네...이런 식의 만화 극본이 십여 쪽 차지하며 넘어가다 보니 성질 급한 만화 독자들이 더 이상 보지 않고 책을 덮어버리려고 했다. 우리는 서로의 전문분야가 다르기 때문에 독자에게 사랑 받는 작품으로까지는 양립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극본을 쓰던 아동문학가들도 수긍하며 각자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런 일로 인해 아동문학가 들과도 사이가 좋아졌다. 이후 그들과 함께 문광부에서 지원해 주는 2박3일의 전국 산업관광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당시 회장이었던 이원수 씨는 경남 마산 출신으로 ‘나의 살던 고향’ 등 많은 서정시와 명작동화를 남긴 분이었는데, 칠순 나이에 아깝게도 유명을 달리 하셨다.

비전이 보이지 않는 단행본 만화의 창작에 회의를 느끼고 다른 쪽으로 돌아서 버린 작가들도 있었다. ‘소년 이소룡’의 박부길 씨와 ‘짱구박사’의 고우영 씨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나 또한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는데, 이윽고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볼 때가 왔다고 결론을 내리고, 친척의 도움을 얻어서 ‘여학생’ 잡지와 청자각 출판사를 경영하게 되었다. 1964년 가을의 일이었다. ‘여학생’은 십대 소녀를 대상으로 한 교양지로써 나는 이 잡지를 정상에 올려놓기 위해 십여 년 동안 정열을 바쳐 일하였다. 그리고 국내외 소설, 수필, 교양서적을 총망라하는 70권의 주니어 레먼문고를 시리즈로 펴냄으로써 내 나름대로는 독서계에 일익을 담당했노라 자부한다.
다양한 만화작품들도 잡지를 통해 보급할 겸 중고생들의 교양지로 살리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지만 후반기에 이르러서는 과다경쟁과 경영상의 미숙, 시대적 환경과 경제여건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치 못해 결국 폐간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