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준의 한국만화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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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20)새로운 명랑만화로 대박 터뜨린 길창덕

길창덕씨는 청소년 시절엔 공부보다 그림 그리기에 열중 하느라고 배고픔도 잊을 수 있었다고 했다. 어느날 코주부로 유명한 김용환씨의 만화를 접하게 되고부터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1955년 여름 서울 신문 독자란에 한컷 만화를 투고 했는데, 운이 좋았던지 그 작품이 실린것이다..

2008-08-21 박기준



                                                     제5장 해빙기

        (20) 새로운 명랑만화로 대박 터뜨린 길창덕

길창덕씨는 1929년 평북 선천출생으로 6남 2녀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양말공장을 경영하던 부친덕분에 고생을 모르고 자랐으나, 부친이 병석에 눕게 되고, 사망하기에 이르자 어려운 생활이 시작된다.
청소년 시절엔 공부보다 그림 그리기에 열중 하느라고 배고픔도 잊을 수 있었다고 했다. 1943년 보통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후 친척의 배려로 정주역에 근무하게 된다. 전쟁은 일본의 패전으로 끝나고 해방이 되었다. 길창덕씨는 그동안 역마다 설치됐던 일본식 한문으로 되었던 간판을 한글로 바꿔쓰는 페인트 작업을 맡아 일했다고 한다. 붓에 페인트를 묻혀 지우고 칠하고 새로 쓰는 일에 많은 경험을 하게 된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잠시 어머니를 두고 다녀온다는 것이 영원한 이산가족이 되었다. 남한으로 피난해 온 후 국군에 자원했다. 육군 작전과에 배치되어 4년동안 교육 담당병으로 교육용 교재와 각종 차트를 만드는 일로 인해 그림 실력과 디자인 솜씨가 빛을 발했다.
1955년 3월 제대한 후 서울로 돌아왔으나 기다리는 일자리는 없었다. 길창덕씨는 철도원으로 일할 때 경험한 페인트와 붓을 다루던 특기를 살려 간판을 그려 볼 생각으로 국도극장이 있던 을지로 4가 간판 점들을 헤메고 다녔지만 헛수고로 끝나고 말았다.
때마침 동대문 신발도매상을 하던 형의 가게 일을 도와주게 되었다. 주로 창고관리를 하는 일이였으므로 시간이 많이 남았다. 평소에 좋아하던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짓기도 하며 소일했다. 어느날 코주부로 유명한 김용환씨의 만화를 접하게 되고부터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1955년 여름 서울 신문 독자란에 한컷 만화를 투고 했는데, 운이 좋았던지 그 작품이 실린것이다. 첫 데뷔하게 된 신문을 손에 쥐고 흥분해서 잠을 못 이룬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이를 기회로 프로만화가들의 작품을 연구 하며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길창덕 작가의 작품들
길창덕 작가의 작품들

1951년부터 연이어 출간된 ‘희망’, ‘신태양’, ‘야담’, ‘만화춘추’등 대중 오락잡지들은 날개가 달린듯 팔려 나갔으며, 특히 ‘아리랑’은 최고의 인기 잡지였다. 1956년 ‘실화’지에 처음 4컷 만화 등을 발표했다. 그 무렵 인기 연재 만화가로 김용환, 김성환, 신동헌, 신동우, 김경언이 맹활약하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잡지에 데뷔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설계’, ‘사랑’, ‘삼천리’, ‘만화천지’등 여러잡지에 작품이 실리면서 편집자들에게 전문 만화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작품이 재미있으면 실릴것이라는 믿음은 전달되어 편집자의 눈과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드디어 최고의 인기잡지 ‘아리랑’지의 연재 청탁까지 받게 되었다. 7쪽의 연재 만화였는데 당시에 인기코미디언에서 힌트를 얻은 ‘뚱뚱이와 홀쭉이’였다. 그시절 실리던 만화들은 1쪽 아니면 2쪽짜리가 대부분이었다. 7쪽은 파격적인 것이였다. 이른바 장편 스토리 만화였다. 이 연재물로 인해 여러잡지에서도 청탁이 쇠도하기 시작, 1960년 ‘실화’에 ‘멀건이 일가’, ‘야담’에 ‘꼴뚜기 염감’을 그리고 그해 창간한 ‘카톨릭 소년’에 ‘따돌이’를 연재, 인기 프로작가 대열에 올라서게 되었다.
그가 만화로만 밥을 먹고 살게 된 것은 이때부터 였고, 차츰 생활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1962년 드디어 ‘이도령전’이라는 단행본을 시작으로 소년 한국일보에 ‘말썽이’ 그리고 ‘재동이’를 선보여 최장수 연재 만화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아동들의 일상적인 사건에서 간단한 웃음을 이끌어내는 새로운 명랑만화로 유행을 이끌었다.
길창덕씨는 감당키 어려운 많은 원고청탁을 받았고 한달에 20여군데에 연재했다고 한다. 어느날 일본의 인기만화가가 과로로 사망했다는 기사를 주간 신문에서 본 후로는 절반으로 줄였으나 밥먹고 자는 시간 외에는 항상 스토리를 구상하는 등 쉬는 날이 없었다고 한다. 특히 그 흔한 문하생도 없었으니 모든 작업을 혼자 해야 했다.

길창덕 작가의 대표 캐릭터인 순악질 여사와 재동이
길창덕 작가의 대표 캐릭터인 순악질 여사와 재동이

1963년 청소년 단행본 ‘멀건이’, ‘온달 일등병’, ‘소식 깡통이’등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힘도 달리고 경쟁에서 밀려 그만두게 되었다. 1970년 ‘만화왕국’, ‘소년중앙’에 ‘꺼벙이’를 ‘학원’에 ‘돌석이’를 연재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출세작 ‘여성 중앙’에 연재한 ‘순악질여사’는 보기드문 성인 캐릭터로 자리 잡았고, 영화화 되기도 했다. 그러나 1997년을 끝으로 건강 문제 때문에 아쉽게도 작품 연재를 중단해야 했다.

순악질 여사 영화 포스터
순악질 여사 영화 포스터

길창덕씨의 작품 스타일은 가벼운 웃음거리를 연속적으로 이끌어 가는 단편이면서 장편으로 이어지는 독특한 기법의 개척자라고 할수 있겠다. 샘솟듯한 그의 폭소탄 아이디어는 따를 자가 없다. 그림 또한 여지껏 선보인 어느 작가보다 과장이 심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는데, 그의 뒤를 이어 등장한 ‘맹꽁이 서당’의 윤승운, ‘고인돌’의 박수동 등은 더욱 과장이 심하고 그림은 더욱 어지럽다. 너무 엉성하여 불성실한 느낌을 주므로 아동성실교육에 장애를 준다는 한 시민단체의 항의서를 받은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든든한 애독자들이 있으니 누가 뭐래도 개의치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공부하고 있다. 이 부류의 작가들 중에는 ‘도깨비 감투’의 신문수, ‘심술통’의 이정문, ‘물대포’의 윤준환, ‘따옥이’의 권혁준, 지성훈 등 수없이 많다. 유머는 인간의 심신과 삶을 건강하게 한다고 했다. 명랑만화의 원조는 유럽과 미국이다. 건달 ‘앤디캡’, 어진임금 ‘리틀 킹’, 공처가 ‘블론디’, 선과악의 ‘뽀빠이’, ‘피너츠와 스누피’. 개구쟁이 ‘데니스’ 등은 오랫동안 우리들의 건강을 책임져 주고 있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