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준의 한국만화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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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21)부부만화가 엄희자, 조원기

미술가를 꿈꾸던 엄희자는 만화연구소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고, 만화계에 진출했다. 또다시 일자리를 옮긴곳은 ‘백조의 호수’의 인기 순정만화가 조원기씨 화실이었다.두사람은 1968년 결혼, 부부만화가로 탄생하게 된다. 엄희자는 첫작품‘공주와 기사’를 시작으로 조원기의 인기를 추월하고...

2008-08-28 박기준



                                              제5장 해빙기

                       (21) 부부만화가 엄희자, 조원기

엄희자, 조원기 부부와 어시스턴트들
엄희자, 조원기 부부와 어시스턴트들

엄희자는 1942년 신의주 출생으로 7남매중 다섯째 딸로 태어났다. 광화문에서 양복점을 하던 부친 덕분에 고생을 모르고 자랐지만, 중학 졸업을 앞두고, 아버지가 사기꾼에게 속아 빚쟁이가 되었다. 그 충격으로 병석에 눕게 되었다. 어릴때부터 그림을 좋아해서 미술가가 되는게 꿈이었던 엄희자는 여고시절엔 동양화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었는데 그 꿈도 허물어지고 말았다. 어느날 우연치 않게 만화가를 만나게 되고부터 진로를 바꾸게 된다.
학교 미술 행사로, 세계미술전람회를 주최했는데 ‘갈비씨’만화로 유명한 이상호씨가 방문했던 것이다. 그에게 싸인을 받으면서 만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집안을 책임져야 한다는 고민속에서 만화가의 길을 선택하기로 결심한 엄희자는 1959년 을지로 4가에 있던 우리나라 최초의 만화연구소를 무작정 찾아갔다. 만화를 배우고 싶은데 돈이 없고, 청소나 잔심부름 이라도 할테니 배우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곳은 김길영이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운영하는 음악학원이었는데, 낮에는 음악을 가르쳤고 밤에는 만화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 연구소는 6개월 과정으로 신동헌씨등 4,5명의 실력있는 만화가들이 강의 및 실기지도를 맡고 있었다.

조원기의 섬아이
조원기의 “섬아이”

미술가를 꿈꾸던 엄희자는 만화연구소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고, 만화계에 진출했다. 신동우씨와 임수씨의 뒤처리 일을 하기도 했으나 일감이 많지 않아 ‘장희빈’시리즈로 인기 절정인 이범기씨 문하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실력을 인정 받았고, 일정한 고정 수입도 해결되었다. 또다시 일자리를 옮긴곳은 ‘백조의 호수’의 인기 순정만화가 조원기씨 화실이었다. 불광동에 소재한 이층집이었는데, 그곳에서 문하생들과 함께 기거하며 작업 하고 있었다. 여기서 능력을 인정받아 스케치 맨으로 활약했다. 엄희자의 스승뻘인 조원기는 동갑내기였다. 조원기의 문화에 들어간 후 생활도 안정이 되고 식구들과 함께 화실 근처로 집을 얻어 이사했다. 그때의 엄희자는 여러 남자들의 주목을 받을 정도의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어느날 청혼자가 찾아왔다는 정보를 접한 조원기씨는 고민하게 된다. 조원기씨도 어느새 애틋한 연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고, 두사람은 1968년 결혼, 부부만화가로 탄생하게 된다. 1964년 엄희자는 첫작품 ‘공주와 기사’를 시작으로 조원기의 인기를 추월하고 있었다. 초기의 캐릭터들은 조원기의 뾰족한 코와는 전혀 달랐고, 또 다른 여성 순정만화가들의 크고 예쁜 눈의 인형 같은 분위기가 아닌 간결하고, 고운선과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배경등 하루가 다르게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엄희자 만화가 각광을 받자 조원기 팀과 분리해 두 개의 팀이 구성되었다. 그의 문하에는 허영만, 차성진, 이충호, 방재호, 최경탄이 협력하고 있었는데 순풍에 날개를 단듯 인기는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1966년 ‘소년조선일보’에 ‘하얀등대’도 연재했다. 1970년 소년한국일보와 전속계약을 맺고, 옮길때는 순정만화뿐만 아니라 모든 만화 중에서 인기 정상을 다투고 있었다.

왼쪽 작은아씨들 / 오른쪽 대위의 딸
왼쪽, 미국소설 ‘작은 아씨들’을 각색한 ‘네자매’(엄희자)
오른쪽, ‘대위의 딸’을 만화로 각색한 ‘카치아’(엄희자)

작은 아씨들’을 각색한 ‘네자매’, ‘대위의 딸’을 각색한 ‘카치아’와 ‘해바라기 가족’, ‘사랑의 집’등이 독자들의 환영을 듬뿍 받게 되었다.
1972년에 이르러 청소년 주니어 잡지붐이 일면서 한국의 순정만화 인기가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일본의 ‘캔디 캔디’, ‘유리가면’등 그대로 베껴낸 여러 해적판 작품들이 잡지와 단행본으로 활개를 치고 있었다. 주니어 잡지 ‘여학생’에 ‘푸른자매’ 연재를 끝낼 무렵, 1980년 당시 한창 종교에 심취해 있던 이들 부부는 미국 애니메이션사의 하청 일을 하다가 미국으로 이민길을 떠났다.
캘리포니아에 보금자리를 정하고 막내딸과 함께 애니메이션사 원화 작가로 활동했다. 이들 부부의 근면성은 교포사회에 성공한 모델로 기사화 되기도 했다. 국내 대전엑스포 꿈돌이를 캐릭터 디자인 하기도 했었다.

지금은 캘리코사 디자인 레이아웃 아티스트로서 함께 일하고 있다. 부부만화가인 경우 이들 외에도 ‘대성공’시리즈의 김기백 ‘인어언니’의 민애니 부부도 같은 시기에 맹활약을 했고, 1980년대에는 ‘요정핑크’의 김동화 ‘우정이상 사랑이하’의 한승원 커플이 있다. 그리고 ‘달려라 하니’의 이진주 ‘내 사랑 깨몽’의 이보배 부부가 활동하고 있다. 오늘도 조·엄 커플은 애니메이션 왕국 미국에서, 그 옛날 명성을 잇고 있다. 무궁한 발전을 빈다. ‘원시소년 토시’의 중견 만화가 최신호씨는 1998년 ‘만화동네’지에 지난날의 감동을 이렇게 적고 있다.

“만화계의 대 선배 박기당선생의 ‘감초선생’은 한의사 할아버지가 주인공이다. 또한 김종래 선생의 그 유명한 ‘앵무새 왕자’는 왕자를 중심으로 해서 벌어지는 시대 만화였고, 박기정 선생의 ‘도전자’는 훈이라는 주인공이 일본땅에서 한국인의 의지를 보여주는 감동의 권투만화였다. 또한, 방영진 선생의 ‘명탐정 약동이’는 과히 한국 탐정만화의 시조라 할수 있고, 오명천 선생의 ‘싼디만’은 이색적인 서부활극 만화였다. 그런가 하면 그 유명한 산호 선생의 ‘라이파이’는 한국의 배트맨이라 할 수 있는 통쾌한 활극만화였고, 박기준 선생의 ‘올림픽 소년’은 주인공들이 각자 오림픽 메달을 향해 땀흘리는 스포츠 우정물이었다. 그리고 임창 선생의 ‘땡이와 영화감독’은 영화계 이야기를 그린 명랑 만화였고, 김원빈 선생의 ‘아기포졸’은 포졸의 아들이 명석한 두뇌로 아버지를 도와 사건을 해결해 가는 요즘으로 말하면 소년 명예 경찰만화다. 그때의 그 작품들은 아동에서 성인들까지 전 게층이 울고 웃으며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