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준의 한국만화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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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21) 북한만화의 존재

몇해 전 일이다. 북한만화가 부천의 한국만화박물관에 들어왔다는 소식에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8.15해방을 전후해 김용환과 쌍벽을 이루던 원로만화가 정현웅을 비롯하여 적지않은 문필가, 미술가, 예술가들이 북한을 선택 월북하지 않았던가, 때문에 남한 못지 않게 선후배 만화가들이 꾸준히 뒤를 이어오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2009-05-21 박기준



                            
                                      제7장 개화기 

          (21) 북한만화의 존재

몇해 전 일이다.
북한만화가 부천의 한국만화박물관에 들어왔다는 소식에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8.15해방을 전후해 김용환과 쌍벽을 이루던 원로만화가 정현웅을 비롯하여 적지않은 문필가, 미술가, 예술가들이 북한을 선택 월북하지 않았던가, 때문에 남한 못지 않게 선후배 만화가들이 꾸준히 뒤를 이어오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전쟁 중에 북한에서 날려 보낸 선전지와 벽보 등에서 만화식 표현으로 북을 찬양, 남을 비하한 걸 본 적이 있었고 전후 안기부 초청으로 북한의 교과서와 출판물, 그리고 상표디자인 등을 본적도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만화를 본 적은 없었다. 그 얼마만이냐? 설레이는 마음으로 눈앞에 펼쳐진 만화책들을 대하게 되었다.

이쁜이와 천계화 이미지
북한 만화, <이쁜이와 천계화> 중에서.
주인공 처녀 이쁜이가 부모님의 병환을 낫게 해드리려고 금강산에서 약초를 캐고 있는 장면이다.

한데, 2,30여권이 넘는 종류임에도 판형이 대부분 4x6판, 80쪽에, 칼라표지가 씌워 있었고 내지는 갱지, 표지는 모조지, 제본은 철심을 아래위로 박은 구식 제본이어서 단조로웠다. 게다가 그림의 특징은 리얼리즘기법의 붓터치로 사실적인 그림체가 대부분이며 생략해 그리거나 개그만화같은 다양한 그림들은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라이벌간 경쟁이 치열한 우리와 달리 당국에서 선택하고, 스토리를 써주는 작가가 따로 있는 것이 차이점이였다.

이들 만화 가운데 인민군의 활약상을 담은 전쟁을 소재로 한 만화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휴전이 성립된지 5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전쟁영웅담이 단골소재로 등장하고 있는 점이 특이한 점이라 하겠다. 그러나 김태권의「력도산」 만화는 조금 다른 기획인 것 같았다. 일본에서 명성을 떨쳤던 북한 재일 조총련계 교포였던 프로레슬러의 일대기 였다. 여느 책과 달리 두권으로 되어 있었고, 북한만화중에서 제일 인기가 있었다고 했다. 쪽당 컷 나누기는 상하 두 컷이 대부분이였으며 이따금 한 컷과 세 컷이 눈에 띄었다.「력도산」의 활약상과 함께 사회주의 체제 우월성을 홍보하는 내용이 곳곳에 삽입되어 있었다. 우리측에선 백산, 방학기등이 주간지와 스포츠신문에 대장편으로 연재했고, 화려한 단행본으로 영화로, 주름잡지 않았던가.

다양한 북한 만화들
순서대로, <세계프로레슬링 왕자 력도산>, <소년 근위대>, <안개령의 비밀>, <중공군앞에는 하루살이 목숨>
북한만화 이미지

만화계는 오늘도 작가들간의 치열한 경쟁. 출판사 간의 경쟁, 다른 오락물과의 경쟁, 국제 간의 경쟁에서 이기려고 한 컷, 한 쪽, 원고지 메우기에 최선을 다 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은 자유경쟁이 허용되는 우리의 체제와 다르다는 것을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우리도 한국전쟁 때 겪은 일이 있다. 먹거리가 없을 땐 보리죽이라도 꿀맛처럼 먹지 않았던가, 이 없고 힘든시기에 꿈을 꾸고 용기를 주던 흥미진진한 만화가 아니였던가, 만화가 희귀한 북한 어린이들은 지금도 밤새는 줄 모르고 읽고 또 읽고 있을 게다. 검토를 끝낸 후 나는 조용히 박물관을 빠져 나왔다. 북한의 만화가 하루빨리 발전하여 북한만화가들도, 국제만화교류의 장에 참가, 선의의경쟁자로 나설 그날을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