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준의 한국만화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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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10)신문극화 시대

강철수 씨는 청춘극화 ‘사랑의 낙서’ 시리즈를, 그리고 1974년 박수동 씨는 ‘선데이서울’에 성담론 ‘고인돌’을 두쪽씩 연재했다. 이들이 성인만화 시대를 연 삼두마차였다...

2008-11-04 박기준



                                             제6장 침묵기

                           (10) 신문극화 시대

사랑의 낙서
영화화까지 되어 사랑을 받았던 강철수 작가의 ‘사랑의 낙서’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어느 유명인의 명언이 생각난다. 1968년 그 어려운 시기에도 바위틈을 비집고 나온 탐스러운 한 떨기 꽃처럼 성인만화 붐이 일고 있었으니, ‘선데이 서울’을 비롯해 ‘월간중앙’ ‘주간 조선’이 연이어 창간되었고, 1970년에는 ‘일간스포츠’가 창간되었다.

고우영 씨는 ‘일간스포츠’에 신문지면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와이드 장편 극화 ‘임꺽정’을 연재한 후, ‘삼국지’ ‘수호지’ 등을 연재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이로써 판매부수도 크게 신장시켜 성인 극화 붐을 일으키는 동기가 되었다. 여기서도 하나의 일화가 전해지는데, 한국일보 사주 장기영 씨는 업무차 해외에 자주 드나들면서 구미, 일본 신문에 연재되는 극화가 매우 인기를 끈다는 뉴스를 전해 듣고 있었다 한다. 그래서 ‘일간스포츠’에도 극화 게재를 검토해 볼 것을 편집부에 지시했지만 실무자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신문에는 시사만화나 4컷 만화가 제격이며 줄거리 만화를 싣는다는 것은 신문의 격만 떨어뜨린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에 장기영 씨는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자는 사표 쓸 것을 각오하라며 노여움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 일은 소년한국의 김수남 주간이 중간에 서서 편집진을 다독여 결국 극화를 싣는 것으로 수습이 되었다. 그리고 장기영 사주는 자신의 결정이 옳았음을 증명시켜 주었던 것이다. 만약 장기영 사주가 그때 편집진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자기 고집을 꺾었더라면 우리나라 신문의 성인만화 시대는 한참 더 늦게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더불어 고우영 극화시대도 열리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일간스포츠는 1972년의 발행부수가 2만부에 불과했지만 고우영의 극화가 실리면서 1975년에는 30만부를 발행함으로써 놀라운 극화의 힘을 증명했다. 이로써 스포츠신문의 극화시대가 활짝 열리게 되었으며 일간신문에 연재 극화가 빠지면 알맹이 없는 찐빵과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당시 극화의 인기 비결은 세련되면서도 사실적인 그림에다 감각적이고 튀는 용어 구사로 신세대층의 입맛을 충족시켜 준 데 있었다.
이어 강철수 씨는 청춘극화 ‘사랑의 낙서’ 시리즈를, 그리고 1974년 박수동 씨는 ‘선데이서울’에 성담론 ‘고인돌’을 두쪽씩 연재했다. 이들이 성인만화 시대를 연 삼두마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