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침묵기
(09) 성인도 만화에 빠지게 한 고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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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영을 성인 극화가로 대성하게 한 ‘새소년’ 연재 만화 ‘대야망’(1970-1972) |
고우영은 만주 선양시의 번시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이곳에 이주해 있던 그의 가정은 남부럽지 않은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한다.
그러나 그가 8살 되던 해에 해방이 되자 그곳에 살던 일본인들과 함께 그들 가족도 함께 피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로 근무했던 아버지와 그의 가족은 밤을 틈타 남쪽으로 내려와 서울 천호동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하지만 이후의 생활은 전과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아버지는 경찰에 근무했었다는 죄책감을 잊기 위해 술에 빠져 살며 방황했기 때문에 집안 살림은 어머니가 도맡아야 했다. 따라서 넉넉지 못한 살림이었지만 그림에 소질이 있던 두 형들은 서울 미대에 다녔다.
큰형 고상영은 명작 ‘백조의 노래’를, 그리고 작은형 고일영은 ‘짱구박사’ 등을 만화로 그려 학비로 충당하였고, 어머니는 가장으로서 출판업에 손을 대는 등 다소 생활에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는데, 때마침 6.25 사변이 터지는 바람에 다시 봇짐을 지고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다. 그 피난지 부산에서 고우영도 중학교 2학년이라는 어린 나이에 16쪽짜리 딱지만화 ‘쥐돌이’라는 첫 작품을 냈다. 물론 형들의 도움이 크긴 했지만, 어쨌든 만화계에서는 이들 형제를 수재 삼형제라 불렀다.
고상영 씨는 대구 육군본부 심리전과에서 근무하던 김성환 씨의 도움을 얻어 그곳에서 일한 적이 있다. 그 당시는 군대 징집 명령이 떨어지면 연기 받기가 힘들 때였다. 마침내 휴전이 성립되자 부산에서의 고된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환도했지만, 가족들에게 더 큰 불행이 찾아왔다. 어머니가 위암에 걸린 것이다. 그 막대한 치료비를 감당하기 위해 두 형들은 만화가로 또 삽화가로 앞뒤 돌아보지 않고 일했지만, 과로한 탓인지 어느 날 큰형이 심장마비로 숨졌고, 1년도 지나지 않아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듬해 작은형마저 심장마비로 요절을 했다.
이렇게 해서 졸지에 가장이 된 고우영은 생존을 위해 본격적인 만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둘째 형 고일영이 그려온 연재만화 ‘짱구박사’를 이어 그리면서 그는 고달픈 무명만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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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영의 캐릭터들 |
당시 만화계는 독점을 노린 합동이 등장하여 활개를 치고 있었던 때로, 고우영은 몇 권 출간한 것이 인기를 끌지 못하자 냉대를 견디기 힘들었다. 내용도 신통치 않고 만화 그림이 교과서 같다는 등 비아냥대던 편집자들은 결국 거래를 중지한다고 통보해 왔다. 모든 기대와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마치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은 절망감이 엄습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알코올 중독상태로 폐인이나 다름없었고, 집안을 책임질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 버린 데다 이제 자기마저 일자리를 잃고 마니 가족의 생계는 막막해지고 말았다.
한편 우리 크로바문고에서 ‘약동이 시리즈’로 한창 인기를 끌고 있던 방영진 씨는 창작을 중단해야 할 만큼 건강상태가 악화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림만 잘 그려 줄 사람이 있으면 스토리는 계속 써 나갈 수 있다며 그림작가를 별도로 구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의해 왔다. 나는 그의 제안을 쾌히 받아들였고, 출판계의 소문을 통해 고우영 씨의 어려운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나는 서슴지 않고 그를 추천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방영진 씨도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크로바출판사의 장부장이 교섭에 나서서, 셋방에서 내쫓길 처지에 놓여 있던 고우영의 전세방을 얻어 줌으로써 이 계약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이 계약은 얼마 가지 않아 허공에 뜨고 말았다. 병의 악화로 방영진 씨가 더 이상 스토리를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거처는 해결됐지만 먹고 살 방법이 궁했던 고우영 씨는 김기율 씨의 화실로 들어가 ‘도토리 시리즈’ 등의 작업을 돕기 시작했다. 그 후 ‘어깨동무’사에 취업, 컷과 동화와 삽화를 그리거나 ‘새소년’에 연재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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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안타깝게 떠난 고인의 모습 |
그러던 그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 왔으니, 1971년에 창간된 ‘일간스포츠’에서 그에게 성인극화 청탁이 온 것이다. 그리하여 1972년부터 ‘임꺽정’이 연재되기 시작하면서 고우영 씨는 일약 성인만화의 우상으로 부상하였다. 70년대를 이끌어 간 영 파워 기수의 한사람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이웃 일본에서도 ‘철인 28호’ ‘바벨2세’로 잘 알려진 요코야마 미쯔데루가 일본과 중국의 고전을 장편 극화로 만들어서 아시아에 붐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도 작년에 숨을 거두었다.
아무튼 작금 TV에서도 현대극보다 사극이 안방극장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는 것도 만화 붐과 무관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성인만화에 주력하며 많은 인기를 끌었으며 만화계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던 고우영 씨지만 아쉽게도 그도 타계, 애석하지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두 형과 함께 만화계의 큰별로 기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