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장 개화기
(26) 카툰 전성시대
작금은 급격한 변환의 시대다.
어지러운 눈길로 이 시대를 직시하려 애쓰며, 낙오하지 않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단번에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기분전환이 될 수 있는 청량제의 역할을 할 무엇인가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이 요구에 부응하듯 카툰(CARTOON)이라는 매체가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 스며들게 되었다. 다소 풍자되고 과장되긴 했어도 우리의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대변하는데다 유머라는 윤활유가 녹아 있기 때문에 그것이 형성하는 공감대 또한 가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에는 신문잡지나 책을 통한 코믹(COMICS)은 접할 기회가 많았지만, 전시용으로 많이 쓰이는 카툰은 우리들에게 생소한 분야였다.
이따금씩 만화가 단체에서 그 해 주제를 설정하여 전시회를 열기도 했지만 늘 소규모 지역 행사로 끝나곤 했다. 그러나 선진국에서는 대규모 카툰전이 미술전과 더불어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으며 인기도 대단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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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카툰전시회들 |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 9월 12일 국내 최초로 국제카툰전이 롯데백화점 본점 8층 특별전시장에서 열렸다. 일본 요미우리(??) 신문과 일간스포츠가 공동주최한 요미우리 국제만화 대상작품전이 그것이다.
만화올림픽으로 불리기도 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만화 콘테스트로 만화문화의 새바람을 일으켜서 재능 있는 신인 만화가를 발굴하자는 것이 목적이었고, 상금도 세계 최고액수였다. 오픈 세레모니에는 주최측인 한국일보 회장과 국회문공위원장, 주한일본대사, 그리고 우리 만화계의 원로인 신동우, 그리고 필자, 또 이 만화대회에서 몇 차례 입상한 적이 있는 사이로, 일본 만화가협회 이사이자 원로만화가 바바노보루, 요미우리신문 연재 카투니스트 유덴지 사브로 등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다.
1979년에 창설된 이 카툰전은 주제가 정해진 과제부분과 자유부분으로 나뉘어서 매년 개최되며, 10여명의 전문 심사위원들이 철저히 심사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90년도 제 11회 전시회에서는 1만5천여점이 응모, 입상작 110점과 역대 수상작 20점이 선보였고, 국가별로는 60개국에서 응모했으며 한국인으로는 김영무 박구원 등이 참가 입상했다. 이웃나라의 잔치였지만 그 여파로 전시회는 만화 애호가들에게 세계의 수준 높은 해학과 풍자를 선사해 준 뜻깊은 국제전이었다.
특히 이 전시회는 말이 별로 필요치 않은 1컷 유머만화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국경, 나이, 성별을 초월하여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그 뒤 1998년 8년만에 요미우리 국제카툰 작품전에서 드디어 우리 한국의 유재영이 금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보였다.

 | 스포츠조선 주최 91국제만화대상 에서 김이수의 ‘공룡가족’ 대상으로 뽑혀/ 대상수상작가 김이수가 프랑스 작가 모즈, 영국작가 레이몬드와 함께 환담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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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2월 17일, 스포츠조선은 현대백화점의 후원으로 건전만화 보급을 통한 만화문화의 질적 향상과 카툰을 통한 국제만화의 교류증진을 위해 한국 최초로 세계 만화가들이 참가하는 만화올림픽 91, 국제 카툰 대상전을 개최, 재능 있는 기성 및 신인 카투니스트들을 발굴 지원한다고 공고했다.
모집 부문은 과제부분(주제:가족)과 자유부분이었다. 국내외 만화가, 만화지망생, 애호가들의 호응이 대단했다. 20여개국에서 1천2백여점, 국내에서 5백여점으로, 출품작들은 위트와 재치, 풍자를 엿볼 수 있는 카툰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미술작품의 범주에 들만한 수작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밖에 세계적인 만화가인 프랑스의 모즈, 영국의 레이몬드, 일본의 요시도미(만화가, 교수)씨 등을 초청, 간담회와 아울러 세미나도 열어 대성황을 이루었다. 대상에는 한국의 김이수 씨가 수상, 금상은 소련의 유리코소부킨, 은상에 유고슬라비아의 보리슬라프와 중국의 팽귀보가 수상했다. 이 국제전이 열리기까지 조선일보의 사업부장으로 있던 이재영 씨의 노고가 많았으며, 훗날 만화가협회 사무국장이란 중책을 맡기도 했다. 1991년 5월에는 서울 국제카툰공모전이 스포츠서울 주최, 사랑의 세계 후원으로 열렸다. 국제전 바로 직후에 열린 국내전으로, 이로써 카툰 붐 현상이 일었는데 매년 5월이면 개최되어 카툰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사랑의 세계사 대표 이건상 이사장이 지병으로 사망하자 서울국제카툰전은 97년이 6회로 막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다행히 카툰붐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1992년 대전국제만화전이 임청산 학장의 청산만화연구소에 의해 개최되어, 한동안 축소되는 듯 싶었던 카툰 국내전이 다시 국제전으로 빛을 발하게 되었다. 근래에 와서는 영상분야까지 포함, 대전 국제만화 영상전으로 확대되어, 해마다 지망자와 관람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다. 1991년, 역량 있는 신인작가들을 발굴하고 미래산업으로 각광받고 있는 만화산업의 발전을 도모한다는 취지하에 헤비급 LG동아국제만화 애니메이션 공모전이 등장, 2001년에는 총상금 1억원의 국내 최대규모로 성장하게 되었다. 카툰, 극화, 캐릭터, 애니메이션 포함 4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매년 시행되고 있다. 1998년 탄생한 전국 창작만화 페스티벌 ‘만화로 하나되는 세상’ 공모전 경진대회가 매년 카툰, 극화, 애니메이션 작품을 모집하여 시상 및 전시회를 갖고 있는데, ‘기쁜우리복지관’ 주관으로 9회째 계속하고 있다.
처음 국내카툰전의 시작은 두 단체에 의해 첫발을 내딛었다. 1960년 10월 10일부터 1주일간 서울중앙공보관에서 열렸던 제2회 현대만협전으로 회원들이 두서너 점씩 출품했다. 신문 시사만화 작가 위주의 간략한 선을 사용하는 그림체 등을 선보였다. 1960년 12월 2일부터는 한국만협 정기전이 역시 중앙공보관에서 다양한 작가들의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카툰형식의 작품들을 선보여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1963년 10월에는 젊은 작가 윤영옥의 개인만화전이 건국대학교 대학축제행사에 겸해 열렸다. 신문들이 첫개인전이라고 보도해 준 덕분에 호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 이후 카툰전은 신문 잡지 외에는 한동안 뜸했었다. 그러다가 몇해 전부터 개인전, 동인전 등이 사방에서 연거푸 열리고 있어 전시관을 예약하기도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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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야시에서 주최한 아시아 카툰전에 참가한 조관제 작가. 각국만화가들과 기념촬영 |
1996년 조관제의 일본 교류기금 초청 제2회 아시아 카툰 국제전이 일본 오미야시에서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작품출품과 동시에 현지 전시관에서 팬들에게 사인도 해 주어 축제분위기였다고 했다.
1998년 2월 한일월드컵 공동개최를 기념하며 시작된 한일만화가 엽서교류전이 매년 양국간 문화교류의 한면을 장식하는 연례행사로 자리잡았으며 올해로 열한돌을 맞이한다.
1998년 4월 남정훈의 카툰개인전이 부산 서면에 있는 롯데백화점에서 열렸다. 2002년 11월3일, 고경일 ‘방자한 명상전’이 인사동 갤러리에서 열렸는데, 일본 유학을 마친 만화가 중 최초의 개인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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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뉴욕에 전시되어 화제에 오른 지현곤 카툰전 |
2004년 박기소의 카툰전이 안국동 한서갤러리에서 열렸다. 2004년 11월 신명환의 설치카툰전 ‘깔깔깔 구르기’전이 서울 애니메이션센터에서 열렸다.
2006년 11월 재일유학생(세이카대학교 카툰과, 대학, 대학원생 김건 외) 7인의 ‘돌창고’ 풍자만화전이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와 부천만화정보센터에서 전시되었으며, 주제는 ‘야스쿠니신사’로 국제적인 소재를 다루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7년 7월 지현곤 카툰전이 서울 애니메이션센터 미국 뉴욕 전시관에서 열렸는데 대성황이어서 연장전시까지 하는 등 대환영을 받았다. 이어서 미국 뉴욕 맨해튼 갤러리에서도 장애 카투니스트 지현곤 카툰전시회가 열렸는데 대 성황을 이루었으며 관람객들의 찬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림 50점중 30점이 미술애호가들에게 팔리는 대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2007년 10월 조관제 카툰전 ‘취생몽사(醉生夢死)’가 인사동 관훈갤러리에서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