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준의 한국만화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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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01)스포츠만화로 돌풍을 일으킨 이현세

5년간의 무명시절은 정말 눈물날 만큼 고생이 심했다. 제때 밥을 못 먹기가 일쑤였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야 할 때도 적지 않았다. 그러다 화성출판사와 연결이 되어서 1980년에는 첫 단행본 6권짜리 ‘5계절’이란 작품을 발표하게..

2008-12-18 박기준



                                          제7장 개화기

         (01) 스포츠만화로 돌풍을 일으킨 이현세

이현세 작가
이현세 작가

이현세, 그는 불과 이십여년 전까지만 해도 만화계에서 거의 지명도가 없었던 무명작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갑작스레 거대한 돌풍처럼 일어서기 시작한 것은 1983년에 발표한 전 30권의 ‘공포의 외인구단’이 당시 불기 시작한 프로야구 열풍의 힘을 받아서 공전의 대히트를 치게 되면서였다. 여기서 등장시킨 캐릭터 ‘까치’가 대중들에게 얼마나 호응도가 컸는가 하면, 까치를 모르면 친구와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현세 만화는 청소년에서 대학생, 샐러리맨들까지 애독자로 흡수해 만화계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1954년 경주에서 태어났다. 철도청에 다니던 부친의 감전 사망으로 인해 어린 나이에 두 동생을 돌봐야 하는 가장이 된 그는, 형편상 간신히 고등학교 교육만 마치고 서울로 상경하였다. 그가 찾아간 곳은 친구의 집이었는데 그 친구가 바로 이미 화실까지 꾸미고서 만화가로서의 길을 걷고 있던 한대희 씨로서, 이때 그는 처음으로 만화란 것을 가까이 대하면서 그것의 매력에 깊숙이 빠지게 되었다 한다. 그로부터 그는 모래내에 거처하면서 만화가 이정민, 하영조 씨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공포의 외인구단 주요 캐릭터들
공포의 외인구단 주요 캐릭터들

그로부터 5년간의 무명시절은 정말 눈물날 만큼 고생이 심했다. 제때 밥을 못 먹기가 일쑤였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야 할 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고생할 것은 처음부터 각오가 되어 있었던 만큼 그는 심혈을 기울여 만화공부에 몰두했다. 시간만 나면 데생을 하였고, 미국과 일본만화를 구해서 인물 캐릭터와 그 구성에 대한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77년 화성출판사와 연결이 되어서 그의 생활은 차차로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1980년에는 첫 단행본으로 6권짜리 ‘5계절’이란 작품을 발표하게 되었다. 한 권씩 새로 출간할 때마다 파격적으로 30만원씩 원고료가 인상되어 기뻤었다는 기억을 그는 갖고 있는데, 이는 인기에 민감한 만화계의 풍토를 잘 드러내는 예로서, 그만큼 이현세 씨의 작품에 대한 인기는 승승장구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공포의 외인구단/ 남벌
공포의 외인구단/ 남벌

그러다가 그의 결정타가 된 작품이 다름 아닌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이 작품은 소설화, 나아가서는 영화화되었을 정도로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그의 작품 ‘활’은 일본의 모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일본에도 진출하였다.
이렇게 일단 정상 궤도에 오르게 되자 각 잡지, 주간지, 신문사에서 의뢰해 온 연재물만 처리하기에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래서 화실을 넓혀 이전하고 문하생들과 작업해 오게 되었다.
이현세 씨는 최근 작품의 제작 외에 한국만화가 협회 회장직을 역임했고 지금은 대학교수로서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 이외에도 박기정 씨의 복싱을 소재로 한 ‘도전자’도 스포츠 장르에서 성공을 거둔 예다. 일본에서도 치바 데쓰야의 ‘내일의 죠’ 이후 1990년에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농구를 다룬 ‘슬램덩크’를 그려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노우에는 젊은 작가로 만화 작업에 열중하는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농구경기장을 찾아 풀곤 하였다는 것인데, 그러다 보니 농구선수, 감독, 관중 등 경기장 안의 모든 것을 철저히 분석하고 뚫어보는 안목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거래하던 ‘주간소년 챔프’ 편집장을 만난 그는 대장편 농구만화를 연재할 수 있게 지면을 할애해 달라고 요구한다. 장편 연재라는 것은 작품선정으로 인해 판매까지 좌우되기 때문에 신중을 기하느라 최고 인기작가에게만 맡겨지는 것이 전례였던 터라 그는 당연히 거절당했다.

슬램덩크 이미지
이노우에의 ‘슬램덩크’는 농구산업발전에 크게 기여한 작품이다.

일본의 스포츠만화나 애니메이션, 영화 등은 일본 대표가 세계무대에서 최고의 성적을 올린 분야에 한해 선택해서 국가적 관심을 끌도록 유도해 왔던 것인데, 농구는 세계 상위권은커녕 아시아에서도 중국, 필리핀, 한국, 이란 등에게 번번이 참패하는 2류국에 속했다. 따라서 농구만화는 사업성에서도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편집장은 농구만화가 아닌 유도, 프로레슬링, 가라데, 격투기 등의 소재로 바꿔 볼 것을 유도해 봤으나 이노우에가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았으므로 난처해졌다. 그러나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작가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두 사람은 한 걸음씩 양보를 하기로 하였고, 결국 장편이 아닌 중편으로 연재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농구만화 ‘슬램덩크’의 연재는 시작되었고, 시작되자마자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회를 거듭해 갈수록 잡지 판매 부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상승하였고 편집실과 작가에게 빗발치는 전화문의가 쇄도했다. 중편이 아니라 장편 연재를 해 달라고 성화였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걸작이 탄생되었고,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자 인기는 더 거세어졌다.
이 농구만화는 아시아 여러 나라에까지 선풍적인 농구붐을 일으켰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만화를 본 독자들 중에는 직접 농구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껴 농구대까지 설치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한다.
이 ‘슬램덩크’ 만화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우리나라 농구 팬과 배구 팬 관중 수는 엇비슷했었다는데 만화 발표 후 그 차이가 크게 벌어졌다고 한다. 관중도 엄청나게 늘어났고 아마추어들의 참여로 관중은 물론, 농구용품과 기구 등이 불티나게 팔렸으며 초등학교 저학년생들까지 농구공을 끼고 다니게 되었다. 농구용품 관련 제작회사와 농구협회도 재정이 넉넉해졌으므로 큰기침을 하게 되었다.
스포츠 산업은 각 국가의 주요산업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추세인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선진국에도 이미 5대 주요산업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어 우리 정부에서도 스포츠 마케팅 연구를 위해 대학이나 연구기관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등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이때에, 일개 스포츠만화가 산업화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