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준의 한국만화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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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3)무대는 열렸어도 암울하기만 했던 시대

1966년 대본만화계에 회의를 느낀 신동우는, 그 동안 애니메이션 제작기술을 쌓아 온 형 신동헌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을 발표하여 한국 애니메이션사에 하나의 큰 획을 긋기에 이른다. 그러나...

2008-02-14 박기준



                                   제1장 우리 만화의 오늘, 그리고 내일

            (3) 무대는 열렸어도 암울하기만 했던 시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사람들 중에는 훗날 동양화의 대가로 꼽히는 분도 꽤 있다. 운보 김기창 화백도 ‘허생전’이라는 만화를 그린 적이 있다.
그러나 그분들이 본업으로 만화를 선택하였던 것은 아니니까, 역시 만화계의 대부라고 한다면 많은 후진들을 지도하는 한편으로 만화 화법의 초창기 흐름을 형성하는데 기여한 김용환 과 김성환 두 분을 꼽아야 할 것 같다. 이 중 김용환 씨는 주로 사실적인 그림을 그려서 역사 만화나 리얼리즘 만화의 원조가 되었던 반면, 김성환 씨는 단순한 선 처리로써 개그만화의 흐름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만화계에 있어서도 그간 어렵게 힘들여 쌓아왔던 공든 탑을 무참히 무너트렸다. 만화 선진국으로 도약할 기회에 한 걸음 가까워졌을까 한 이 때에 전쟁은 허무하게도 그 맥을 끊어놓고 만 것이었다. 출판사들은 대부분 문을 닫아 버렸고, 만화가들은 살길을 찾아 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진데다가 사상과 이념이 다르다는 죄목으로 많은 인재들이 희생되었다.
그 한국 동란도 한 고비를 넘긴 1951년, 궁핍한 피난생활 중에서도 대구에서 반공 전쟁만화 ‘붉은 땅’, ‘도토리용사’가 만들어졌고, 부산에서는 박광현의 ‘숙향전’, 고상영의 ‘사선을 넘어서’가 발행되었는데, 이것은 읽을 거리에 목말라 하던 청소년들에게 좌절 대신 꿈과 희망을 주었던 인기 단행본들이었다.

이어서 피난지에서 청소년잡지 ‘학원’지가 등장하면서 다시 만화가 선보이기 시작했는데, 김용환과 김성환, 신동헌의 작품이 최고의 화제작이었다. 1954년에 환도하면서 최초의 청소년만화 전문지 월간 ‘만화세계’가 발간되었다. 이 잡지를 통해 최상권의 ‘만리장성’, 박기당의 ‘어사 성성이’, 김종래의 ‘마음의 왕관’ 같은 인기 극화가 연재되었으며 신동우, 박현석, 정파, 임수, 김근배의 개그만화도 등장해 인기를 드높였다. 뿐만 아니라 많은 신인작가들을 데뷔시키는 등용문으로서도 널리 활용되었다.

그 후 ‘만화학생’ ‘만화 소년소녀’ 같은 만화 전문 월간지의 전성시대가 도래하는 한편 200쪽짜리 고급 단행본도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월간지들이 생겨 과다경쟁으로 인해 문을 닫는 곳이 하나둘 늘어가면서 상대적으로 단행본 위주의 경쟁이 치열해지게 되었다. 즉 단행본의 가짓수가 늘게 되자 이번에는 그 쪽수가 줄게 되면서 1960년 이후에는 대본용 책자가 나오게 된다. 하지만 시장은 협소하고 판매하려는 경쟁만 치열해지다 보니 만화의 질은 오히려 저하되어 가는 암담한 시기였다.
1961년 5.16사태 이후로 상황은 더욱 악화하였다. 정부에서는 전례에 볼 수 없는 사전검열이라는 제도를 들고 나와 창작의 자유를 억제하기 시작하였으니 재미라고는 전혀 없는 마치 틀에 짜여진 것 같은 만화만 만들어지고 있었다. 당시의 군사정부는 청소년 문제만 생겼다 하면 모든 것을 불량만화 탓으로 돌렸으며 언론기관에서도 이에 가담하여 마녀사냥 아닌 만화사냥에 나섰던 것이다. 우리 만화가들에게 있어서는 전혀 내일을 기대하기 어려운 암담하고 냉혹한 시기였다.
당시 이웃 일본에서는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출판사는 물론 신문사까지 가세하여 능력 있는 작가들을 발굴해 가며 만화를 이용한 애니메이션, 캐릭터 산업의 수출로까지 비약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현실과는 대조적이 아닐 수 없었다.

신동우·신동헌, <홍길동>, <호피와 차돌바위>
신동우·신동헌, <홍길동>, <호피와 차돌바위>

1966년 대본만화계에 회의를 느낀 신동우는, 그 동안 애니메이션 제작기술을 쌓아 온 형 신동헌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을 발표하여 한국 애니메이션사에 하나의 큰 획을 긋기에 이른다. 그러나 많은 동료 후배들까지 적극 가세하여 제작한 후속작 ‘호피와 차돌바위’는 안타깝게도 기획력 부족으로 인한 흥행실패라는 결과를 가져 왔다. 조금만 더 영화매니어들의 취향을 연구해서 기획했더라면 성공은 물론, 기획과 시나리오, 캐릭터 개발과 영상기술의 연구 개발, 모든 면에 걸쳐서 많은 스폰서들의 협조를 받아서 국제무대로의 진출이 대폭 앞당겨졌을 것이었으나, 누구보다도 앞선 일이었던 만큼 한번의 실수가 준 타격은 무서운 것이었다.

데스카 오사무, 아톰
데스카 오사무, <아톰>

홍길동’에 참여해 모처럼 애니메이션 기술을 습득한 후배들까지가 만화산업이 정부나 대기업으로부터 협조를 얻기는커녕 외면만 당하는 것을 보아온 데다, 대선배의 좌절하는 모습을 대하고는 외국 애니메이션의 하청업으로, 혹은 저임금 노동자 쪽으로 돌아서 버렸다. 이후 새로운 개발은커녕 재도전의 꿈도 꿀 수 없을 정도로 기술력은 뒤 처지고 말았다.

신동헌과는 대조적으로, 일본에서는 1947년 세계명작 ‘보물섬’이라는 단행본을 새로운 기법으로 만들어내면서 데뷔한 의사출신의 데스카 오사무가 일본의 디즈니로 불리울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는 작품들을 애니메이션화하는 한편 프로덕션 소속 애니메이터들을 대거 미국으로 진출시켜 기술을 축적하는데 돈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일본 애니메이션 세계의 선진화는 이렇게 일찍부터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한국과 일본의 수준 격차는 점점 더 크게 벌어져만 가는 안타까운 실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