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암흑기
(1) 전원의 추억을 남겨 준 내 유년의 만주생활
때는 1939년 9월.
아시아 공영권을 제창하며 위세를 부리던 일본제국은 한반도를 침략의 발판으로 삼아서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였으나, 중국을 비롯한 영미연합군의 반격을 받으면서 전쟁의 포화는 더욱 거세어지고 있었다. 많은 동포들이 강제 징집, 징용되었으며, 일터를 찾아 고국을 등지고 만주로 떠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경상북도 포항에서 당시 세탁하는데 쓰이던 양잿물 공장을 운영하셨던 부친도 이때쯤 사업을 정리하고 중국 동북부의 간도 땅으로 진출한다. 룽징(龍井) 무단장(木丹江)을 거쳐서 당시 막 개발되기 시작하던 북만주 흑룡강 근처의 신도시 베이안(北安)에 정착하였다. 이곳에서 여관에 이어 운수업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 형제들은 사실 큰 어려움 없이 학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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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과 5형제 (앞줄 좌측이 작은 형 박기정, 우측이 박기준, 그리고 뒤에 셋째형 박기세, 그리고 그 뒤 왼 쪽이 둘째 큰형, 우측이 큰형) |
큰형은 일본 중앙대학교에 유학 중이었고, 둘째형도 상업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형을 따라 동경으로 떠났다. 셋째형과 넷째형(박기정)과 나는 집 근처 일본인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울타리 밖으로 바라다 보이는 단풍이 물든 울창한 숲 저편 언덕에서는 백계러시아인들이 목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유나 식빵 등을 구입할 수 있어서 좋았다. 집 주변에는 공생해야 할 만주인들이 가장 많았고, 먼저 입주한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마주 보이는 지역에 살고 있었다. 가끔은 동네간에 패싸움이 벌어지기도 하였는데 대체로 일본과 중국 아이들간의 싸움이었다. 그럴 때 우리는 일본아이들 편을 들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던 것을 기억한다.
추석에는 풍년을 자축하며 마을은 온통 축제분위기가 된다. 만주족들이 내는 요란한 악기소리와 광대들의 춤은 보는 이들을 흥겨웁게 하였다. 그러나 가을이 지나면 곧 겨울 한파가 시작된다. 이곳 만주의 기온은 영하 35도~45도로, 지금 같아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강추위 때문에 겨울내내 집안에 갇혀서 두더지 신세로 지내야 했다. 외출할 일이 있을 때는 짐승털로 만든 모자와 외투와 신발, 그리고 장갑과 귀덮개가 없이는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었다.
넓은 도로는 주로 자동차와 말이 끄는 수레들이 이용하였는데, 첫눈이 내리면 굴리던 양 바퀴를 떼어내고 그 자리에 굵은 통나무를 깎아만든 것을 바꿔 달아서 썰매처럼 미끄러져 달리게 하고 있었다. 그 길에 눈이 내리면 녹는 일 없이 쌓이기만 하기 때문에 차를 다니게 하려면 길 양쪽으로 눈을 밀어붙였던 것으로, 길 가장자리는 중학생 키 높이는 되고도 남는 눈담장이 세워져서 봄이 되어 녹을 때까지 계속 남아 있었다. 우리 집 전용차는 트럭이었다. 가까운 곳에 나들이할 때는 마차를 불러 이용하였지만 때로는 트럭을 불러 먼 곳까지 나갈 때도 있었다. 마을을 조금만 벗어나면 넌장강 줄기가 흐르고 있어 아이들의 즐거운 놀이터가 되었다. 여기서 형과 친구들과 썰매도 타고 팽이도 치고, 쇠붙이가 달린 틀을 신발에 대고 붕대로 얽어서 스케이트처럼 얼음 위를 지치며 놀기도 했다.
어느덧 그 매서운 겨울도 끝을 고하게 되어 이불처럼 무거웠던 옷들을 벗어 던질 때는 온몸이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만주의 봄은 겨우내내 얼어붙어 있던 계곡 물이 녹아 내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희망의 봄이 예고되는 것 같아 매우 기뻤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어머니의 병이 악화하여 십여 리 밖에 있는 큰 병원에 입원하셨으므로 우울한 계절이 되어 버렸다.
우리 삼형제는 틈만 나면 장조림과 밑반찬과 갈아입을 옷가지를 싸들고 병원으로 향했는데, 그 넓디넓은 평야의 끝없던 벌판과 개천, 오랑캐꽃과 벌과 나비들, 그리고 여기저기서 펄쩍거리며 튀어나왔던 개구리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형들은 개울에서 고기잡이를 즐겼다. 그곳은 습지대였으므로 양손을 펼쳐서 V자를 만들어 가지고 풀숲을 밀어붙이듯이 하면 손바닥만한 붕어가 한두 마리씩 튀어 오른다. 나는 형들이 붕어, 메기들을 잡아 던져주면 풀줄기에 그것을 끼워 넣으면서 형들을 따라 개울을 오르내렸다. 그러다 지루해지면 잠자리를 쫓고 메뚜기도 잡고, 개울물에 몸을 담그고 더위를 식히며 물장구를 치기도 하였다. 개울 옆 언덕 위에는 어른 키의 한길이 넘는 옥수수와 사탕수수 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있었던 것으로, 몰래 옥수수를 따다 구워먹는 것도 즐거운 일 중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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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형제의 고기잡이 |
그때 그 자연 속에서 한껏 4계절을 즐기며 보냈던 체험이 훗날 만화 창작에도 좋은 밑거름이 될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지금도 감사한 마음이다.
지금도 가끔 맨손으로 붕어를 잡았던 형들의 놀라운 솜씨가 부러웠었노라고 얘기하면, 만주 사람들은 별로 고기를 잡지 않기 때문에 개천마다 물 반, 고기 반이었으니 워낙 잘 잡히게 되어 있었노라는 것이다. 게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던 옥수수 밭이 어찌나 넓었던지, 쫓기던 독립군이 이 밭으로 숨게 되면 일본 헌병도 더 이상은 쫓기를 포기하고 되돌아 가버렸다는 얘기도 이해가 되었다.
가을도 저물어 갈 무렵 마침내 어머니가 퇴원해 돌아오셨기 때문에 나는 뛸 듯이 기뻤다. 그러나 더 이상 희망이 없으니 퇴원하라는 의사의 조치에 따른 귀가였던 것을 나는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첫눈이 내리던 초겨울에 어머니는 세상을 하직하셨다. 아직 한창 활동할 나이인 50대 후반의 나이였다. 병상에 누우신 채로 내 손을 꼭 잡으면서 한참동안 나를 응시하시던 어머니의 눈빛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때의 나는 뭐가 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개구쟁이였으니 철모르는 어린것을 두고 세상을 하직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심정이야말로 찢어질 듯 아프고 착잡한 것이었으리라.
진눈깨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우리 가족은 친척 친지들과 함께 마차와 트럭에 나누어 타고 영구차를 따라 화장터로 향했다. 지역 유지들은 물론 우리 집과 관련이 있었던 많은 분들이 함께 자리해 슬픔을 같이 했다. 그만큼 어머니는 전문가 이상으로 사업적인 솜씨를 발휘해서 아버지를 도왔고, 종업원에 대해서는 마치 친형제와 자매 돌보듯이 하면서 이웃의 경조사에 빠지지 않았으며, 고아인 금례누나를 딸이 없는 우리 집에 입양시켜서 나중에 성대하게 식을 올려 시집보내기도 한 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