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개화기
(07) 무협만화가 이재학과 그 인물과 작품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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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학 작가 |
만화란 장르 중에서도 특히 무협만화 부문의 개척자 역할을 하면서 국내외에 많은 팬을 확보하고, 또한 최고의 인기를 누려 왔던 작가 이재학. 섬세한 터치와 웅장한 배경, 그리고 치밀한 전개로 일관하는 그의 작품을 보면, 같은 만화가의 길을 걷는 사람으로서도 그의 성공이며 인기는 과연 지당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인정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또 이재학이라는 인물이 걸어온 과정을 알게 되면 남달리 걸출한 그의 예술적 재능은 오랜 각고의 세월을 통해 걸러지고 또 보석처럼 닦여져 온 진귀한 것임을 깨닫고 존경의 념(念)을 품게 된다.
그렇다, 그는 정통 미술학도였다. 그 어려움이 많던 61년도 홍익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였으니 그는 분명 장래가 촉망되는 재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전공을 살리기 보다는 만화 쪽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이단자가 되길 주저치 않았다.
그 당시우리 사회는 예술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도 하였거니와 하물며 만화라면 얼마나 천시하고 있었던 것일까? 더군다나 순수미술을 지향해야 할 미술학도로서 만화의 길을 선택하였던 것이니 주위 사라들에게는 결코 환영받지 못할 외도로 여겨졌을 것이리라.
그러나 그의 만화 사랑과 집념은 주변의 따가운 눈총 같은 것으로 수그러들만큼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감당치 못할 일이었다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으리라.
선배 만화가의 어시스턴트로 일하며 만화에 대한 모든 것을 익히게 된 그가 만화계에 정식으로 데뷔하게 되는 것은 대학 졸업 후 5년 뒤의 일이었다. 1965년에 소년 조선일보에 ‘휴전선의 왕꼬마’란 작품을 연재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데뷔는 했어도 그의 작품 활동은 스스로 흡족해 할만한 것은 못되었다. 만화란 엄격하게 창작물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개성과 창의력이란 조금도 존중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출판사 측의 요구에만 맞추어야 했기 때문에 그때까지의 그는 무협물이란 제 퀘도를 찾지 못하고 닥치는 대로 펜을 굴려야 했다. 명랑 만화에서 스포츠물, 청소년용 액션만화, 심지어는 순정만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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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히라소니(시라소니)의 북행열차 표지 |
그러나 어쩌면 이와 같은 다방면으로의 창작활동을 통해 그는 미래 무협만화의 대가로서의 기량이 닦이게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즉 시련의 연속인 기간이었지만, 그는 그 세월을 결코 무위로 보내지 않고 자기 성장의 발판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가 무협이라는 영역에 도전하게 된 것은 시라소니의 생애를 다룬 ‘소년 시라소니’를 극화하면서부터였다. 단신으로 중국 대륙을 누비던 시라소니의 이야기에 깊이 매료되어서 극화하였는데 이것이 독자들에게 좋은 반향을 일으켰다. 이를 시작으로 그는 ‘동서권법’이란 무술만화를 발표, 이것이 크게 인기를 얻으면서 본격적으로 무협만화를 개쳑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가 70년대 중반. 홍콩무협영화가 한창 활기를 띠고 있을 때였으므로 그의 만화는 시기적절하게 국내에도 맹렬한 무협만화의 붐을 일으켜 놓았고, 이로써 그는 완전히 무협영역속에서의 그의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무협은 동양의 SF무협은 사마천의 사기(史記)중 ‘자객열전’‘협객열전’에서 시작된 중국 고유의 문학장르이다.
사마천이 활동했던 한무제(漢武帝)시절은 협객의 의미가 크게 강조되었던 시기. 오랜 기간 중국을 위협해 왔던 흉노족에 대해 통일 왕조인 한이 비로소 공세를 취한 시점으로서, 따라서 무인의 위상과 역할의 중요성이 그 어느때보다도 높은 때였다.
처음에는 협객들의 이야기를 다루던 무협은, 이후 방사(方事)와 도가의 술법 등을 흡수해 신기하고 괴이한 세계를 그리게 되면서, 인간세상과 동떨어진 모습으로 변질해 갔다. 하지만 작가 이재학은 이와 같은 무협의 무대를 다시 인간 세상에 펼쳐 놓은 숨은 공로자였다.
대중소설 가운데서도 무협지는 오랫동안 특수한 인기를 계속 누려왔듯이 만화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강호의 의리와 비정한 승부의 세계, 내공의 저 밑에서부터 발산되는 신비한 능력, 끝내는 비극으로 끝나는 로맨스 등이 주된 그 요소라 하겠다.
물론 개중에는 현실감이 크게 결여되어 있다는 무협의 허무성 내지는 맹점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무협은 동양의 SF입니다. 서양의 그것이 과학적 상상력에 기초한다면 무협은 인간적 상상력을 극대화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라고 하는 그의 분명한 견해를 듣게 된다면 더 이상은 아무도 현실감 운운할 수 없어진다. 그가 무협을 사랑하는 이유야말로 현실을 벗어나서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작품이 너무 단조로워지는 것을 피해서 그는 여기에 역사적인 요소까지 가미하여 사실성을 불어 넣는 한편, 인물들의 성격도 흑백묘사가 아닌 좀더 복잡한 심리 묘사를 도입하므로서 작품으로서의 무게를 더해 왔다. 게다가 그는 비극의 작가다. 희극에 비해 비극은 독자에게 보다 풍부한 정서를 제공한다는 이유에서 남달리 비극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무협의 무대에서 이재학을 인기 작가로 부상사킨 작품은 ‘검신검귀’, ‘촉산객’이었다. 뒤이어서 나온 ‘사풍 시리즈’로 그의 자리를 더욱 확고부동한 것이 되었으며, 만화계에서는 무시못할 중견작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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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를 넘어 미국까지 진출하는 등 수출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
그러나 이재학이라는 인물의 그릇은, 만화업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해외 진출까지도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데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 해외 진출이라는 것이 바로 만화 대국이라 할 수 있는 일본·미국이었다는 점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일본으로 진출하면서, 일본팬들의 욕구에 맞추기 위해서라면 작품 속의 주인공들의 모습까지도 과감하게 변모시키길 망설이지 않았다. 한국 만화시장의 침략자인 일본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 대가는 치러도 좋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결과 그는 국내 작가 중 일본에서는 가장 알아 주는 인물이 되었다. 87년 주간 만화 잡지 ‘모닝’에 ‘대혈하’가 연재되어 호평을 받게 되었고, 95년 6월부터는 일본 굴지의 출판사인 고단샤에서 발행되는 잡지 ‘애프터눈’에 ‘용음봉명’을 연재하게 되었다. 이것은 인기 순위가 일본 내에서 3위로까지 올라가면서 파격적인 높은 원고료를 받게 된 것으로도 업계에서 떠들썩했을 정도였다.
‘대혈하’에서는 선과 악의 대립구도로 하였고, ‘검신검귀’는 부자지간의 대립갈등으로 구성하여 무협만화의 흥미를 보여 주었다면, ‘용음봉명’은 한층 더 중국무협물의 차원을 높여서 우리 것으로 소화해내므로써 국제무대까지 진출시킨 그것도 높은 평가를 받아 왔던 수준작이었다. 역사물을 다루는 방법에는 세가지가 있다. 첫 번째 형은 시대와 사건과 인물을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는 정사극류이고, 두 번째 형은 시대와 사건을 정사에서 취재하되 인물만을 허구로 하든가, 아니면 실제 인물과 함께 그려가는 야사극류이다. 마지막 세 번째 형은 시대물을 정사에서 취재하고 사건과 인물을 모두 픽션으로 하여 눈요기, 볼거리 위주로 하는 무협창작극인데 이재학이 즐겨쓰는 작품 스타일이다.
그의 무협물은 세계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이재학만의 독특한 것이다. 정통 무술을 다룬 것들이야 흔하디 흔하지만, SF 형식의 무협만화는 일본에는 물론 무협물의 무대가 되는 본고장 중국에도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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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앞두고 반드시 연하장을 보내곤 했다. |
뒷페이지의 전개가 궁금해져서 가슴을 두근거리며 책장을 넘겨 왔던 수많은 독자들. 그 어떤 흥행물 못지 않게 다음 호의 발매를 재촉하는 독자들의 성원 속에서 불철주야 불을 밝혀야 했던 그의 작업실. 하지만 그 작업실의 불이 꺼지던 날, 애석하고도 ‘용음봉명’은 미완성 유작으로 끝나게 되고 말았다. 신병으로 인해 작가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57세의 이른 나이로, 우리 만화계를 위해서도 그의 죽음은 너무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무협만화를 많이 발표한 국내작가중에는 ‘돌아온 외팔검’의 김기태, ‘불나비’의 김민, ‘흑나비’의 황재, ‘목림방’의 하승남, ‘월하비검’의 천제황, ‘대자객’의 황성 등이 있다.
선배들을 깍듯이 존경할 줄 알았고 후배의 잘못까지도 따스하게 감싸줄 줄 알았던 호인으로서 통했던 이재학. 성공한 작가가 되었으면서도 결코 오만해질 줄을 몰랐던 그는,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인간미 넘치는 작가였다.
마침내 만화의 정상 고지에서 빛나던 별이 졌다. 하지만 비록 고인이 되었어도 그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은 잊혀지지 않고 있으며,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전혀 엷어질 줄을 모르고 있다. 이제라도 ‘용음봉명’이 발행되어, 국내 팬에게도 두루 읽혀지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작품속에서도 영원히 살아 있을 지기(知己) 이재학 님의 명복을 빈다.
(1998년 월간 ‘영점프’ 12월호 게재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