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준의 한국만화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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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8)정상 고지가 멀기만 한 서민작가의 애환

출판사는 추천 받은 작가의 작품 표지 등을 인기작가의 뒷표지에 광고로 내보내거나 포스터 등도 찍어 선전해서 독자들에게 먼저 낯을 익히게 해 준다. 또 인기작가의 이름도 빌려 준다. 신인작가의 이름과 그림을 싣고 인기작가가 거기 추천의 글을 붙여 주는 방법으로...

2008-06-03 박기준


                                        제5장 해빙기

      (8) 정상 고지가 멀기만 한 서민작가의 애환


또 하나 웃지 못할 에피소드 하나.
지금도 명동 중앙우체국 뒷골목에는 일본 서적을 취급하는 서점들이 몇 곳 남아 있지만, 그때도 이곳과 상업은행 뒷골목은 뭔가 꺼리를 찾는 만화가들이 자주 들리던 코스였다. 창작소재를 찾던 신인작가 A도 어느 날 이곳을 찾았다가 이거다 싶은 책을 발견하고 비싼 값을 주곤 그 책을 구입, 자기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그는 원고를 완성한 후 A 출판사에 넘기고는 원고료도 받은 다음 책을 구입한 값이 아까워 다시 그 서점에 가서 중고 값을 받고 되팔았다.
그런데 B라는 신인작가가 다시 이 책을 구입한 후 작품을 만들어서 B출판사에 판 것이다. 문제는 A출판사가 회사 사정상 작품을 발간하지 않고 미뤄 놔 둔 동안에 B출판사에서는 원고가 들어온 즉시 발간하여 짭짤한 판매수입을 올리게 된 것이었다. 이 일로 B작가는 전속작가로 채용되어 계약금도 받는 등 후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A의 작품은 발간 즉시 모작이라며 반품으로 되돌아 왔으므로 출판사에서는 작가에게 손해배상까지 청구하는 사태가 초래되었다. 결국 A는 출판사 사장을 피해 오랫동안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좋은 작품을 먼저 찾아내고서도 발행이 늦어지는 바람에 팔자가 뒤바뀌어 버렸으니 정말 불운한 사람이었다.


우리 크로바문고에서는 그림에 소질이 있는 신인들을 모집해서 첫편을 시작할 때 한두 편의 극본을 써 주거나 극작법을 지도해서 실력을 키워 주는 등 타 출판사와 차별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문을 들은 신인들이 많이 찾아왔다. 그러나 선발조건은 까다로웠다. 몇몇 신인작가 중에는 크로바문고에서 써 준 스토리로 원고를 만들어서는 타 출판사에 팔아 넘긴 예도 있었기 때문이다. 재능도 중요하지만 우선 타 출판사와 마찰이 생기지 않을 자, 그리고 생활태도가 성실한 사람을 철저히 가려 채용했다.
가령 술이나 투전놀이 등에 물들어 있어서는 일을 등한시하여 좋은 작가가 될 수 없다. 나이가 너무 많아서는 가족부양의 부담 때문에 좋은 창작물을 내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가능하면 속해 있는 기존 신인작가들이 추천하는 참신한 자들을 신중하게 가려 뽑게 된다.
이때 웃지 못할 일들이 작가들과 출판사 사이에서 벌어졌다. 그것은 출판사들에 의해 작가별 계급이 형성됐는데 책이 잘 팔리는 작가는 귀족작가다. 그들은 수입이 좋으니 모이는 장소도 고급집에서 양주를 마신다. 중간에 해당되는 작가는 평민작가로 맥주홀이나 큰 식당에서 모인다. 책이 잘 팔리지 않는 작가는 서민작가로 주로 막걸리 집을 찾거나 다방을 연락처로 삼고 있는 게 보통이었다.

우락부락한 인상 탓에 동생을 시켜 문하생에 입문한 고행석,
그는 훗날 ‘불청객시리즈’, ‘마법사 아들 코리’등으로 성공한
작가 된다.

서민작가는 귀족작가의 스케치료가 자기 원고료보다도 배 이상 많은데다 선금도 받기 때문에 유혹의 대상이긴 했으나 자신의 작풍을 고수하고 싶어서 외곬으로 고생하고 있는 그룹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애환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독자들은 만화를 살 때 작가 이름과 캐릭터를 보고 산다. 따라서 이름 없는 작가가 빛을 보기 위해서는 유명한 작가의 문하생이 되어 배워 나오거나, 그의 도움을 받아 데뷔하는 것이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유명한 작가의 어시스던트 생활을 하게 되면 그작가에게도 도움을 주면서 그의 많은 것을 배우게 되는 한편 생활도 보장된다. 그리고 때가 되면 자기가 거래하는 출판사에 적극 추천해서 독립의 길을 모색해 주기도 한다.

출판사는 추천 받은 작가의 작품 표지 등을 인기작가의 뒷표지에 광고로 내보내거나 포스터 등도 찍어 선전해서 독자들에게 먼저 낯을 익히게 해 준다. 또 인기작가의 이름도 빌려 준다. 신인작가의 이름과 그림을 싣고 인기작가가 거기 추천의 글을 붙여 주는 방법으로 제자를 보증해 주는 것이다. 이렇게 날개까지 달아주니 문하생이 되면 데뷔의 길도 쉬워졌다.
그러나 독자생존을 고집하는 신인들의 독학의 길은 멀고도 고달픈 것이었다. 자기만의 독특한 캐릭터를 개발해야 하고, 독자들을 첫눈에 홀릴 수 있는 아이디어나 줄거리도 짜내어야 했다. 이렇게 비지땀을 흘리며 오래 노력한 끝에 원고를 만들어 출판사에 가져가도 반갑게 대해주는 사람은 없다. 사정사정해서 출판하더라도 판매가 시원치 않으면 한숨과 함께 빈손으로 돌아오게 된다.

문하생 시절의 이상무, 서병간, 김학무와 함께 한 필자
문하생 시절의 이상무, 서병간, 김학무와 함께 한 필자(아래)

그는 술에 화풀이를 했다. 또다시 만화를 그리면 사람이 아니라고 수없이 다짐하며 술집을 나왔다. 하지만 시일이 지나면 어느 정도 스트레스도 잊게 되는 것. 여기까지 오는 데만 해도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는가, 이제 팔부 능선을 넘었으니 조금만 더 기운을 내자고 다짐하며 그는 새 원고에 매달린다. 말이 새 원고지, 독자들에게 전의 실패작의 인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는 이름도, 캐릭터도, 그리고 그림체까지 모두 바꾸어야 한다.
내가 아는 한 작가는 이렇게 하여 후일 기어코 성공하긴 했지만, 막상 데뷔하기 위한 그들의 고충은 이루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었다 한다. 필명은 서너 개에서, 심하면 십여 개로 바꾼 경우도 허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