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와 시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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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70년대 : (15) 낭만과 모순의 시학

2013년 4월 3일 그윽한 밤이었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객석에 앉아 <불후의 명곡>이란 콘서트 무대에서 노래와 익살을 섞은 조영남의 원맨쇼를 보고 있었다. 그 때 검고 둥근 신사모자에 빨간 재킷을 입은 중년 남자가 콘서트 게스트로 걸어 나왔다. 조영남과 함께 1960년대~70년대 쎄시봉 열풍을 일으킨 주인공인 이장희. 그가 두 팔을 벌린 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2013-04-23 장상용
2013년 4월 3일 그윽한 밤이었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객석에 앉아 <불후의 명곡>이란 콘서트 무대에서 노래와 익살을 섞은 조영남의 원맨쇼를 보고 있었다. 그 때 검고 둥근 신사모자에 빨간 재킷을 입은 중년 남자가 콘서트 게스트로 걸어 나왔다. 조영남과 함께 1960년대~70년대 쎄시봉 열풍을 일으킨 주인공인 이장희. 그가 두 팔을 벌린 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 그대에게 드릴 말 있네
오늘밤 문득 드릴 말 있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터질 것 같은 이 내 사랑을
 
그댈 위해서라면 나는 못할 게 없네
별을 따다가 그대 두 손에 가득 드리리
 
나 그대에게 드릴 말 있네
오늘밤 문득 드릴 말 있네
 
그댈 위해서라면 나는 못할 게 없네
별을 따다가 그대 두 손에 가득 드리리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터질 것 같은 이 내 사랑을
 
너무 유명해져서 1974년 대히트한 영화 <별들의 고향>에 주제곡으로 사용된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였다. 이장희의 나긋한 목소리를 입은 밤하늘은 검고 부드러운 벨벳처럼 관객의 마음에 내려앉았다. 낭만. 이 두 글자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21세기의 광화문에서 1960년대~70년대의 공기를 마시고 있는 것 같았다.
정치적으로 암울한 시대를 살던 사람들에게 ‘낭만’은 은밀한 탈출구이자 청량제였다. 음악카페에서 통기타를 치며 포크송과 팝송을 부르는 명문대 출신 쎄시봉 멤버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대학생이 또래 젊은이의 10퍼센트에도 못 미치던 시절이었기에, 대학생 신분이라는 것 자체가 엘리트임을 시사했다. 주철환 JTBC PD는 “쎄시봉 멤버는 열정과 재능을 가진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돈에 구애받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미지 : 1980년대 말 이장희와 조영남(오른쪽)이 공연 도중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음악감상실도 젊은이들에게 인기였다. 재미난 에피소드 하나. 소설가 송영에 따르면 1960년대~70년대 충무로 음악감상실은 젊은 연인들이 차 한 잔 시켜놓고 오랜 시간을 버티기에 안성맞춤의 장소였다. 자리가 가득 차 바깥 계단에 대기하는 손님들이 많아지면 주인은 꾀를 냈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을 틀어주는 것이다. 그러면 묵은 손님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고 한다. ‘손님 내보내기’용으로 딱 맞게 지겹고 시끄럽기만 했던 이 곡이 지금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서양 클래식 음악 상위권에 올라있으니 세상은 얼마나 변한 것인가! 
 
1960년대 중반엔 대학생도 교복을 입고 다녔다. 또 대학생이라면 학생증, 책과 손목시계 등을 맡기고 외상술을 마셨다. 특히 손목시계가 귀중했다. 순경들은 데모에 가담한 대학생들을 연행할 때 손가락 하나를 대학생의 손목시계 줄에 밀어 넣었다. 그러면 대학생은 꼼짝도 못하고 딸려왔다. 데모 때도 최루탄이 없었다. 순경은 파출소에 데모에 가담한 대학생들을 꿇어앉혀놓고 “학생들이 공부는 안하고 무슨 데모야. 다음부터 하지 마”하고 훈방을 해주었다. 그러면 대학생은 “차비 좀 꿔주세요”라고 손을 내밀었다. 순경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자기 주머니를 뒤져 돈을 줘서 보냈다. 이런 풍경은 낭만의 시대에 일상이었다.  
 

 
 
 
 
 
 
 
 
 
 
 
 
 
   
 
    
이미지 : 1970년대 서울 시내의 한 음악감상실 풍경.     
 
한편 낭만이 정치와 맞닿아 변질되기도 했다. 6.25 전쟁 전까지의 주먹 세계는 ‘낭만주먹’으로 불린다. 만화가 방학기는 <감격시대>를 통해 일제 강점기에 활약한 김두한, 구마적, 신마적, 시라소니 등을 낭만주먹으로, 1950년 이후 정치에 개입한 이정재, 임화수, 조병렬, 유지광 등을 정치깡패, 1970년대 급성장한 오종철, 박종석, 조양은, 김태촌 등을 조직깡패 등으로 구분했다. ‘의협심’, ‘의리’ 등을 중시하는 낭만주먹의 시대에는 반드시 주먹으로 승부했고, 승자는 패자에게 관용을 베풀었고, 패자는 승자를 인정했다. 낭만주먹 시대 이후에는 테러, 회칼, 파이프 등이 그 세계의 룰이 됐다. 1960년대~70년대에도 뒷골목 주먹세계만큼은 부패한 정치, 경제적 이권과 결탁해 비천한 근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사랑의 순애보를 그린 영화 <러브스토리>가 국내에 개봉된 시점은 1971년 봄이다. 에릭 시걸이 1970년 3월 미국에서 소설로 출간한 지 1년 만에 <러브스토리>는 25개국 언어로 번역돼 전 세계에서 1200만부가 팔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국내에선 문예출판사가 1971년 3월 최초로 소설을 펴냈고, 한 달 만에 10여 군데 출판사들이 다투어 출간했다. 당시 한 신문은 ‘1971년 한 해 출판계는 완전히 러브스토리 시대를 맞은 느낌이었다’고 전했다. 미국 파라마운트 영화사는 1970년 크리스마스를 기해 영화 <러브스토리>를 개봉, 3일 만에 제작비를 청산했다. 한국에도 ‘러브스토리 열풍’이 몰아친 건 두말 할 나위 없다. 타임지는 ‘프리섹스, 마약과 인종폭동, 반전운동 등 현대문명에 오염되고 지쳐있는 미국사회에 이 순진한 작품세계가 신선한 청량제 구실을 하고 있다’면서 <러브스토리>의 인기에 ‘로맨티시즘의 복귀’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러브스토리>는 물질문명이 득세하고 정신적 사랑이 말라가는 서구 사회에 낭만적 사랑을 불어넣은 반면, 정치-사회적으로 암울한 가운데 낭만을 추구한 대한민국 사회엔 시기적절한 소재로 받아들여졌다. 
 
이 시기에 성인들의 사랑에 대한 낭만적 탐구가 만화를 통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1960년대 영화들이 청춘과 성인의 사랑을 스크린에 담아내긴 했지만 러닝타임은 두 시간을 넘지 못했다. 반면 청춘남녀의 세태를 옴니버스 식으로 다룬 ‘어른만화’인 <사랑의 낙서>는 1972년부터 주간여성에 매주 연재되면서 큰 반향을 얻었고, 급기야 가판대에서 고우영의 <수호지>와 함께 성인용 단행본으로 선풍적으로 팔려나갔다. 강철수라는 천재 만화가가 대중적으로 유명해지게 된 계기였다. 
 
1974년 8월 발행된 <사랑의 낙서> 4권(권당 서너 개의 에피소드를 모음. 한 에피소드 당 12~17페이지 내외)의 ‘제30화 시한폭탄 아가씨’편을 보자. 서울 시내 모출판사 도안실에 근무하는 Y라는 청년이 주인공이다. 그는 생전 처음으로 술집 여자 미스리에게 사랑을 느낀다. 가진 돈을 다 쓰지만 결국 미스리에게 사랑을 희롱 당한다. 미스리의 동료들은 “걘 돈 있는 손님은 다 사랑합니다”라며 Y에게 사랑을 단념할 것을 권한다. 
 
이미지 : 강철수의 1970년대 대표작 사랑의 낙서는 낭만에 기초한 어른만화였다.  
 
생활이 엉망이 돼 해고를 당한 날, Y는 그 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쓸쓸히 길을 걷는다. 남자는 울면서 “미스리 잘 있어. 우린 처음부터 돌아가지 않는 풍차였어”라고 중얼거린다. 마침 비가 쏟아진다. 몰래 뒤를 밟은 미스리가 우산을 씌워주며 Y가 낸 팁을 모두 돌려준다. Y는 그녀에게 새 출발하자고 설득한다. 다음은 두 남녀의 비 속 대화다.
 
미스리 : “새출발이 고장 난 자동차 고쳐 타고 가듯이 그리 쉬운 건 줄 압니꺼. 우리같은 술집 여자한테는 참말로 어렵심더. 어렵고 말고예.”
Y : “그건 자신에게 달린 거야!”
미스리 : “그러니까 더 어렵다 아닙니꺼. 결함도 어디 한 두개라야지 노력하고 어쩌고 하지예. 이것저것 너무 많이 걸리는 데가 있으면 불안해서 못사는 겁니더. 술집 여자지예, 몸을 막 내굴렸지예, 술담배 없으면 한시도 못살지예, 공부를 제대로 했읍니꺼. 서로 이해하고 잘 견디면 한동안이야 무사하겠지예. 그러나 마치 그것은 시한폭탄을 여러 개씩 여러 개씩 안고 사는 거나 같습니더. 언제고 한 두 개는 터지고 맙니더. 사랑이 카는 건 시작할 때와 같이 언제나 달콤한 건 아니지 않습니꺼. 언제고 선생님도 제가 싫어지고 말겁니더. 저는 그게 무섭습니더. 저는 지금의 이 행복 이대로를 영원히 깨지 않기를 원합니더. 선생님의 그 귀한 사랑을 평생 제 가슴 속에 살게 하고 싶습니더. 제 가슴 속의 것은 절대 안 별할 겁니더. 어서 가이소! 어서예!”
 
이 에피소드의 마지막 2번째 컷. 여자는 “선생님 우리는 돌 수 없는 풍차였심더”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린다. 마지막 컷. 비를 맞으며 걷는 남자의 뒷모습 롱샷으로 잡힌다. <사랑의 낙서>는 한 편의 문학작품과 같은 작품성과 감동을 전한다. 이 작품에선 세태의 리얼리티 속에 작가의 낭만성이 엿보인다. 돈에 춘정을 파는 줄 알았던 술집여자가 가슴 속에 누구보다도 뜨거운 순정을 간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랑의 낙서>는 낭만적 감상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같은 책의 또 다른 에피소드에선 1970년대 초로선 다소 파격적인 성풍속도를 전한다. 시간강사 P는 학창시절부터 ‘고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 그는 만난 여자들의 모발을 수집한 노트를 가지고 있다. 여자의 모발 밑에는 주인의 이름이 적혀있다. 이 수집벽은 대학생이 돼서도 그치지 않았는데 그 노트의 정체가 알려지면서 여학생들에게 기피대상이 된다. 그런데 갑자기 P를 상대해주는 멋진 여대생이 나타난다. P는 이 여대생과 결혼까지 하려는 마음을 품고 그녀의 집에 초청돼 간다. 그녀가 잠시 방을 비운 사이 발견한 노트 한 권. 거기엔 그녀가 만난 남자의 음모가 수집돼 있다. 수십 종의 음모를 보면서 P는 자신이 음모 수집 대상이 됐음을 안다. 이 세상에 자기보다 더 대단한 여자 고수에게 낚일 줄이야! 충격에 사로잡힌 P와 정체가 드러난 여자는 적나라하게 싸운다.
 
P : “이 계집애야, 남자하고 여자하고 똑같니?”
여자 : “왜 틀리니? 왜 틀리니? 남자만 사람이니? 즐길 권리는 똑같이 있는 거야.”
P : “알았어, 알았어! 실컷 즐기라구! 학교 때려치고 아주 밤거리로 나가지 그래.”
여자 : “뭐 어째! 이 새끼가 뱉으면 다 말인 줄 아나”
 
‘시한폭탄 아가씨’편이 낭만주의적이라면, 후자는 리얼리즘적이다. 이러한 성향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강철수 특유의 낭만주의로 확장된다. 독가오리처럼 톡톡 쏘아대지만 한편으론 그로 인한 상처를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손길을 숨겨두는 묘한 구성이 강철수 만화의 매력이다. 그래서 그의 만화에선 뭐라고 정의할 수 없는 낙관론이 깔려있다. 
 
러시아 문학이론가 게오르기 프리들렌제르가 지은 <러시아 리얼리즘론>에 따르면 19세기 초 등장한 낭만주의자들은 현실의 다양하고 복잡한 사건들을 시적 모티프(선악의 투쟁, 이상과 현실의 투쟁, 탁월한 재능의 인간과 군중들 사이의 갈등 등)로 수렴했다. 낭만주의 작품의 주인공들은 감정과 서정적인 정열의 힘이 넘친다. 만화 <사랑의 낙서>가 이러한 낭만주의의 영역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건, 물론 강철수라는 인간의 DNA와 그를 작가로 키워낸 1960년대~70년대가 추구한 낭만성과 모순 때문이다. 그 시대가 간직한 낭만의 숭고함과 현실의 민낯이 모두 이 만화 안에 숨 쉬고 있다. <사랑의 낙서> 이후 등장한 강철수의 만화 <시인수첩>, <팔불출>, <발바리의 추억>, <반디> 등과 같은 작품은 제목부터 낭만성이 강하지 않은가! 
 
경상남도 산청 출신인 강철수(본명 배윤식)는 담배를 물고 허공을 보며 느린 듯 빠르고, 빠른 듯 느린 목소리로 설명한다. “낭만은 내 성향이다. 사람을 좀 즐겁게 해야 하는 거다. 작가는 약간의 광대 기질이 있어야 한다. 난 남들 웃겨서 밥 얻어먹고. 베토벤이 귀족들 앞에서 피아노 치며 하숙비 벌듯. 세계적 악성이니 해도 미물에 불과하다. 눈물과 웃음, 거기에 따라가는 아련한 낭만이 있어야 한다. 그게 없으면 내 작품은 하찮은 코미디에 불과한 거다. 밥만 먹고 살 수 있나? 아련한 그 무엇을 찾아서 계단을 올라가고 싶은 본능이 있는 거다. 지적인 존재만 낭만을 찾을 수 있다.”  
 
‘낭만’에 덧붙여 반드시 기억해야 할 단어는 ‘모순’이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고뇌하는 낭만주의자들은 태생적으로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낭만주의자란 뱃속에선 ‘꼬르륵’ 소리가 나도 멋진 바바리코트 깃을 세우고 다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사실 단벌신사이면서 말이다.  
  
이미지 : 강철수와 이야기를 나눠보면 개똥철학자 달호는 그의 분신임을 알 수 있다.   
 
강철수는 그 모순의 총합 개념으로 ‘달호’란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만화 <미아리 보고서>에서 ‘순진한 청년(?)’ 달호는 다중인격자의 면모를 보인다. 친구들에게 이끌려 사창가에 갔다가 창녀가 묘한 부위로 붓글씨 쓰는 장면을 목격한 그는 ‘충격’을 받지만 혼자서 다시 그녀를 찾아가 그 행위를 보여줄 걸 요구한다. 달호는 창녀를 앞에 두고 거의 매 대사마다 새로운 인격으로 변신한다.  
 
- “너 땜에 망했단 말이야! 그놈의 묘기대행진 구경한 번 했다가 신세를 확 조졌단 말이야!”(뻔뻔함)
- “볼 놈은 봐야하고 보일 놈은 보여야 하고! 그래! 그게 사람 사는 세상 아니냐?”(자기합리화)
- “인생이란 무엇이냐? 왜 살며, 어디로 가는 것이란 말인가?”(철학자적 태도)
- “(붓글씨로) 어머니라고 써봐”(잔인함)
- 울고 있는 여자에게 치마를 집어주고 사창가를 그냥 나옴.(점잖음)
- “(몸 씻는 여자에게) 야! 다른 방에서 욕하겠다. 좀 조용조용히 씻을 수 없냐?”(소심함)
- “그런 식으로 살지 마.”(남을 가르치려함)
- “(못생긴 창녀들에게) 돈 많고 잘난 지지배들보다 난 니들 호박들이 훨씬 더 정이 가고 좋아. 난 정말로 니들 호박이 좋단 말이야!”(감상적)
- 죽은 애인 춘화가 남긴 돈 안 받으며, 춘화의 친구 미나와 애인이 됨.(조건을 따지지 않는 순애보)
- “(지적인 영문과 여대생의 구애를 뿌리치고 떠나며) 난 새 호박 고르러.”(득도의 경지)
 
그 모순이 달호란 캐릭터의 매력으로 작용한다. 강철수는 달호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보편적 인간들의 여러 측면을 몽타주 해놓은 것이 달호다. 후회했다가, 애국심이 들끓다가, 포기하고 좌절하고, 믿을 수 없고, 원초적 불안도 있고. 인간이란 게 원래 시시하면서 복잡한 존재다. 그러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생명체고. 그 많은 학자들이 연구해도 인간을 모른다. 인간은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다. 그런데 돌아서면 또 아무 것도 아닌 게 인간이다.”  
 
사실 강철수는 ‘어른만화’를 그리는 작가가 아니었다. 1960년대에는 ‘어른만화’라 할 만한 작품이 없었다. 강철수가 상경해 신촌의 출판가에서 아동만화로 빛을 본 건 1962~63년 무렵이다. 1959년에는 중학교 1학년생 신분으로 만화가가 되기 위해 전주로 나왔다가 부산으로 터전을 옮겼다. 그 해 건국 이래 최대 태풍인 사라호가 덮친 부산에서 만화 원고를 퇴짜 맞고 서울로 올라간 것이다. 서울 아현동 출판사들은 조그만 책상에 전화기 한 대 있는 게 전부였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낡은 수첩을 꺼내 “가불 500원”하며 적고 있는 출판사 사장의 모습이 어린 강철수의 눈에 인상적이었다. 많은 작품을 만들어 여기저기 들이밀던 그는 결국 1962년 아현동의 한 출판사에서 데뷔작을 내게 됐다. <명탐정>이란 추리만화였다. 1965년 서라벌예대에 들어갔을 땐 제법 인기 작가로 성장했다.  
 
당시 강철수와 거래하던 출판사에 이상석이란 작가가 있었다. 일본 만화가 구와다 지로의 작품을 주로 베끼던 작가였다. 그 작가가 군입대 하자 출판사 사장은 강철수에게 “이제부터 네가 이상석 해”라고 제안했다. 밥벌이만 따지면 괜찮지만 ‘이상석’으로 살아가긴 싫었다. 그 일은 때려치웠다. 
 
강철수는 ‘철수’란 필명으로 활동하며 한희작, 이향원 등과 철친한 친구가 됐다. 그러나 ‘향수’란 필명의 베끼기 만화 공동 제작에 참여했기 때문에 1967년 무렵 만화정화사업 심사에서 만화가 자격을 잃었다. 출판사 측은 ‘철수’라는 이름이 아깝다며 그에게 ‘강철수’라는 이름을 새로 붙여주었다. “먹고 살아야지, 어떻게 하나. 출판사에서 물량전쟁 하다 그렇게 된 것이다. 나는 제명돼도 쌌다.”  
 
그가 운명의 술을 배우기 시작한 건 스무 살을 넘어서였다. 이미 1965년 무렵엔 꽤 인정받는 작가였기 때문에 원고가 곧 돈이 됐다. 강철수는 한희작, 이향원과 함께 돈이 생기면 ‘니나노집’으로 달려갔다. 그래서 그의 만화 스토리는 대부분 술집에서 배운 것이다. “술집 이야기를 나만큼 적나라하게 써 먹은 만화가는 없다.”  
 
오늘날의 룸살롱 개념이 당시엔 ‘삐어홀’이었다. 강철수는 1966년 한희작의 군입대 송별회를 삐어홀에서 해주었다. 삐어홀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가격이 비쌀 뿐 아니라 아가씨들에게 팁도 주어야 했다. 강철수 일행 역시 1차는 막걸리와 소주, 2차는 중국집에서 빼갈을 마신 후 삐어홀에서 딱 맥주 세 병을 마셨다. 워낙 비싸서 조금씩 마셔야 했다. 서로 눈치 보면서 “그만 먹어”라고 눈을 흘겼다.  
 
삐어홀 아가씨들은 미니스커트에 번호표를 달고 있었다. 그 당시엔 미니스커트 자체가 충격적 옷차림이었다. 삐어홀은 무대가 있고 모든 공간이 오픈돼 있었다. 술집에 밀실이 생기기 시작한 건 1970년 들어서다. 술 못 먹는 사람들은 밀실을 처음 보고 “왜 사람을 밀실에 가두냐고”고 두려워하기도 했다. 젊은 강철수 일행은 술집에 다닐지언정 여자랑 잔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 그 땐 나이 많은 누나 같은 마담이나 아가씨들이 “젊은 사람들이 이렇게 비싼 데 다니면 어떻게 하냐”고 강철수 일행을 걱정해주었다.  
 
강철수는 술집에서 손님들이 싸우는 모습, 아가씨들이 울고불고 하는 모습 등 천태만상을 자세히 관찰했다. 대학 교수보다 술집에서 배울 것이 훨씬 많았다. 강철수 일행은 원고를 팔아 돈이 왕창 생기면 며칠씩 퍼먹고 놀았다. “무절제했다. 그 시대엔 막 쓰고, 하숙비 내면 됐다. 없으면 벌면 되니까.”  
 
그는 무교동을 다닐 때 만난 한 ‘빠걸’의 실화를 잊지 못한다. 그 여자는 집에서 나올 때 술집에 가는 교통비만 가지고 나왔다. 돌아갈 차비도 없었다. 그만큼 그녀는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몇 년이 흐른 어느 날 그 여자는 영등포에 여관을 하나 샀다. 당시로선 ‘재벌’이었다. 여자는 그 술집에서 아가씨들에게 신화가 됐다. 심지어 ‘나도 나올 때 편도 차비만 가지고 나올 거야’라며 그녀를 흉내내는 아가씨들까지 나타났다.  
 
1~2년이 흐른 어느 추운 겨울날 강철수는 그 술집에 갔다. 놀랍게도 여관을 산 여자가 다시 그 술집에 나와 있었다. 그녀에겐 남자가 있었다. 여자는 남자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살았는데 남자가 갑자기 여관을 정리해 자취를 감췄다. 여자는 거지가 됐다. 더 비극적인 일은 그녀가 술집에 다시 출근했을 때 나이가 들어보였다는 점이다. 그 때는 25살만 넘으면 ‘올드 미스’라고 불리고 시집가기도 어려웠다. 서른을 향해 다가가는 그녀가 술집에서 잘 팔릴 리가 없었다.  
 
이미지 : 강철수의 만화에선 남자와 여자가 한치도 양보없는 말싸움을 벌인다. 독자에겐 최고로 재미있는 구경거리다.  
 
강철수는 이 사건을 회상하면서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한다. “아마도 그녀는 불행해졌을 거다. 사람을 술집에서 만나면 안 된다. 착각하면 안된다. 아무리 친한 여자라도 손님과 술 따르는 관계일 뿐이다.”   
 
강철수 일행이 니나노집에서 만난 불우한 아가씨의 빚을 몽땅 정리해주고 고향에 보낸 적도 있었다. 서울역까지 전송하던 그 여자가 일주일 후 다시 젓가락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정말 친했던 술집 누님 아가씨가 있었다. 그녀가 밥해줄 테니 자기 집에 놀러오라고 했다. 그 때는 자러가는 개념이 아니었다. 20대 초반의 순진한 강철수는 아침 일찍 금호동 비탈길을 한참 올라가 그녀의 집에 도착했다. 대문에 들어가자마자 오른쪽 옆에 딸린 자그마한 공간이 그녀의 방이었다. 틈으로 보니 여자 신발과 군인 워커가 나란히 신발장에 놓여있었다. 강철수는 ‘군인 동생이 왔나보지?’라고 생각하고 창문에 작은 돌을 던져 자신이 왔다는 신호를 보냈다.  
 
10여 분이 지나서 여자가 아주 당황한 모습으로 나왔다. 그녀는 말을 더듬더니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싸구려 쓰레빠를 신고 멀리까지 강철수를 배웅했다. 강철수의 목구멍엔 “애인이야?”라는 물음이 딱 걸려있었으나 차마 입으로 나오진 않았다. 150m 쯤이나 둘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전혀 딴 이야기만 하면서 걸었다. 그것이 그가 본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게 바로 낭만이었다. 그 사건이 나를 성숙하게 해주었다.” 인간 군상의 맨얼굴을 대하며 터득한 강철수의 체험과 깨달음은 이후의 만화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어른만화’의 절정은 1980년대 말 일간스포츠에서 연재한 <발바리의 추억>이었다. 여자란 무엇인가를 깊이 아는데 있어 어느 심리학, 인류학, 여성학 책보다 훌륭한 참고자료로 활용할 만하다.  
 
강철수의 예리한 시선이 세대 간의 갈등을 바라보면 그것은 대단한 에너지가 된다. 그가 대본을 써 2013년 4월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한 연극 <칼잡이>가 대표적 예다. 눈높이 낮춘 청년백수가 횟집에서 회칼을 잡게 된다는 세태풍자적 대본이다. 
  
오익달: 무슨 지랄 같은 운명인지 하필이면 칼잡이 집이었다. 그 날로 제자 칼잡이가 됐다. 오야지가 절대로 안 된다고 유언까지 한 회칼을... 사람 목을 따려던 칼로 광어대가리를 따고 회를 뜨게 됐다.
병 욱: 왜 저한테 그 얘기를 하시죠?
오익달: 하게끔 유도를 했잖아!
병 욱: 나는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 일을 배웠는데 너희 젊은 놈들은 밥 세끼 꼬박꼬박! 소주에 호프까지 마시면서 뭔 불평이 그리 많냐? 그겁니까? 반이나마 주는 월급 감지덕지로 알아라?
오익달: 감지덕지가 아니라...
병 욱: 사장님은 그래서 아날로그 꼰대 소리를 듣는 겁니다. 무슨 힘들고 어려운 시대요! 사장님 젊은 날이 얼마나 행복한 시절인지 정말로 진짜로 모르세요? 그 때 자동차 기름값 걱정을 했습니까, 대출이자 카드 연체가 있었어요... 그 때 등록금 만 오천원이었대요!
오익달: 알아 알아 알아!
병 욱: 그 때가 천국이면 지금이 더 천국! 그 때가 지옥이면 지금이 더 지옥인 거 모르세요? 적어도 우리한테는요!
오익달: 우리네 당신네 그만 좀 편 갈라! 이 자식아!
병 욱: 손바닥만한 나라 갈갈이 찢어 발개놓은 게 누군데요!
  
 
횟집 주인 오익달과 대졸, 군필 스펙까지 쌓았으나 취업을 못해 비리비리하다 횟집에 취업한 병욱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설전을 벌이는 대목이다. 어느 뒷골목 주점 혹은 가정에서 ‘꼰대’와 ‘청년백수’ 사이에 벌어질 법한 풍경을 그린 강철수는 ‘꼰대들은 이제 기득권을 놓고 떠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이 작품을 썼다 한다. 자신도 역시 꼰대이면서 말이다.  
 
강철수란 인간은 낭만주의자이며, 개똥철학자이며, 모순적이다. 인간적으로 그를 못됐다거나 제멋대로 행동했다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는 화석화된 인간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적’이다. 강철수는 못 살았지만 인간미 넘쳤던 1960년대~70년대가 키워낸 예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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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용

작가, 만화평론가
초이락컨텐츠컴퍼니 웹툰사업팀장, 前 부천국제만화축제 사무국장, 前 일간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