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지구의 어느 특정 공간에 홀로 서 있다.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유명 넘버처럼 바로 ‘지금 이 순간’의 문제다. 머리 위에 내리쬐는 햇빛의 강도와 뺨을 간질이는 바람의 세기, 귓가에 맴도는 크고 작은 소리, 땅바닥의 감촉, 주변의 풀과 나무, 가슴 한 구석에서 울어대는 감정과 기억 등이 내면과 외면을 넘나들며 ‘개인’을 존재하게 한다. 그러나 아무리 특별한 개인이라 하더라도 시대와 사회를 벗어날 수는 없다. 개인은 시대와 사회라는 큰 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기에 불가피하게 그 시대의 전형이 된다. 주인공의 모습 속에는 그들의 개인생활 뿐만 아니라 온갖 시대의 문제들이 투영돼 있다. 작가들은 전지전능한 신의 입장으로 한 개인(주인공)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큰 거울로 비추어 당대의 사회와 현실을 보여주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았다.
19세기 중반의 리얼리즘(사실주의) 문학은 그렇게 탄생했다. 프랑스의 발자크, 스탕달, 빅토르 위고, 영국의 찰스 디킨스, 러시아의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등은 고전주의의 영웅이나 낭만주의의 귀족에 관심을 두지 않고 소시민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들의 삶을 조명했다. 1789년 발생한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로 급격하게 조명된 시민 사회와 시민이 문학작품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리얼리즘은 작가의 관점이 강하게 반영된 현실의 재현이었다. 프랑스 리얼리즘 이론가 샹플뢰리는 ‘인간에 의한 자연의 재현은 단순히 기계적인 재현이나 모방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의 해석인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미지(좌) : 니세포르 니에프스가 찍은 세계 최초의 사진 작품인 연구실 창문에서 보이는 풍경(1826년경) 이미지(우) : 러시아 사실주의 화가 일리야 레핀이 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린 숲에서 쉬고 있는 톨스토이(1981년작)
에드거 앨런 포가 “근대 과학의 가장 중요한 승리”라고 칭송한 사진의 탄생도 리얼리즘의 발달에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나폴레옹 군대의 참모 장교로 전투에 참가했던 프랑스 발명가 니세포르 니에프스가 1826년 무렵 카메라 옵스큐라의 광학원리에 화학 원리를 합쳐 세계 최초의 사진을 찍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니에프스와 함께 사진을 연구하던 다게르가 1839년 최초의 실용적 사진인 다게레오타이프(은판 사진)를 발표했다. 색채 면에선 흑백을 벗어나지 못한 ‘장애’가 있었지만 순간을 포착해 풍경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일은 가능해졌다.
6.25전쟁의 후유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1960년대 대한민국 사회엔 사실주의자들이 선호할 만한 소재들이 산적했고, 1950년대조차 약간의 시차를 두고 객관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 1960년대 리얼리즘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차범석 극본의 연극 <산불>은 세월을 이기고 살아남아 지금도 꾸준히 공연되는 작품으로 남아있다. 1962년 12월 명동 국립극장에서 초연됐다가 1967년 김수용 감독에 의해 영화로 제작된 <산불>은 6.25 동란 중 남자의 씨가 마른 산촌에 규복이라는 전직교사 출신의 빨치산이 산 속에 숨어 살다가 젊은 과부 점례네를 납치하면서 벌어지는 비극이다. 산촌 여인 점례네는 빨치산이지만 지식인인 규복에게 마음을 빼앗겨 그를 돕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웃과부 사월은 남자를 공유하자며 점례를 협박한다. 결국 규복이 산불을 놓아 빨치산을 진압하려는 국군의 작전에 의해 사살되자, 남자를 잃은 두 여인은 망연자실한다. 특히 빨치산의 아이를 임신한 사월은 동네 사람들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다. 이미지 : 2007년 국립극장에서 공연된 차범석 극본의 사실주의 연극 산불의 한 장면.
<산불>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산촌의 여인들에게 초점을 맞추며 의문과 놀라움을 번갈아 일으킨다. 우선 점례네와 사월이는 전쟁의 화마에서 멀찌감치 비껴선 운 좋은 여인들일까? 한편 조용한 산촌 마을에서 장희빈과 인현왕후가 울고 갈, 은밀하면서도 가공할만한 암컷들의 수컷 쟁탈전을 이토록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이 있었던가. 생존을 위해 사월이의 동침 요구를 들어주어야 하는 빨치산의 난감한 표정이야말로 시대가 빚어낸 아이러니다. 관객은 외로움에 지친 산촌 여인들을 통해 전쟁이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마저 엄청난 피해자로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민망한 장면에서도 눈을 감지 않는 차범석의 우직한 심리묘사는 결국 개인이 아니라 시대라는 지도를 펼쳐 보인다.
1960년대 서울은 도심과 일부 부유층이 형성되었지만 나머지 시골은 그야말로 헐벗은 적막강산이었다. 김기덕 감독의 <신입사원 미스터 李>(1962년), 엄심호 감독의 <노란샤쓰 입은 사나이>, 박상호 감독의 <또순이>와 <왈순 아지매>, 김수용 감독의 <굴비>(이상 1963년), 장일호 감독의 <나는 여자운전수>, 김수용 감독의 <날개부인>(이상 1965년) 등은 시민생활과 서민생활을 다루었다.
이런 지형도 속에서 서울은 꿈과 기회의 땅이었다. 당시의 서울은 일종의 ‘아메리칸 드림’과 비슷했다. 그러나 아무리 서울과 부산이라도 서민들에게 삶은 고단하고 팍팍했다. 만화가 박재동이 1960년대부터 부산에서 만화방을 운영한 아버지의 일기를 모아 펴낸 책 <아버지의 일기장>에선 이런 고백이 나온다.
1973년 6월 12일 화요일 맑음
요즘의 생활은 너무도 벅차다. 아내는 아내대로 가로세로로 뛰고, 나는 나대로 과한 하루 일과를 보낸다. 가계부의 적자를 감당할 길이 없어 따로 점포를 얻어(월세 6000원) 통근식 장사를 시작한 지 벌써 한 달 여가 된다. 요행히 기대한 만큼 계획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어서 무엇보다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하루 종일 지친데다가 수면 부족으로 아내의 몰골은 말이 아니다. 얼음, 빵 등속을 챙기느라 분주히 설쳐야 하니 몸은 점차 피로에 지치고, 거기다 제때 식사를 못하는 탓으로 위장도 정상이 아닌 듯. 하기야 처음 우리가 부산에 왔을 때도 자기 혼자서 1인 3역, 4역을 하며 움직였지. 하지만 그 때는 30대의 청춘이었고 지금은 40 고개를 넘긴 고된 중년이라 마음과는 다른 모양.... 오늘 밤도 아내와 같이 조용히 잠든 골목길을 통금시간에 쫓겨 돌아왔다. 그래도 얼마간의 수익이 하루의 피로를 씻어주는 듯. 자정이 지나서야 잠자리에 드니 겨우 네 시간 정도의 수면 시간이다. 삶이란 정말 고된 것이다.
그럼에도 시골 사람들은 무작정 상경을 서슴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똘똘한 아이를 서울에서 공부시켜 정착하게 하는 것이 집안을 일으키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어른들은 아이가 똑똑하기만 하면 ‘소를 팔아서라도 저 아이를 서울에 보내야지’라며 이를 악물었다. 마을의 누군가가 서울로 아이를 유학 보냈다고 하면 그 고리를 놓치지 않고 ‘우리 아이도 거기서 같이 지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서울의 중고등학교 반 정원은 70~80명. 그 중 70퍼센트 가량이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 온 일명 ‘고학생’들이었다. 그들을 추적하면 1960년대 서울과 시골을 잇는 서민들의 삶의 궤적을 재현할 수 있었다.
1960년대 초반의 만화가 대부분이 이국적이거나 상상력에 의존하는 소재, 사극, 위인 등에 열광하고 있을 때, 통찰력을 갖고 현실을 재현하고자 한 만화가가 나타났다. 1962년 11월 23살의 나이에 시골 학생들의 서울 유학을 유쾌하게 그린 생활만화 <약동이와 영팔이>를 발표해 한국 리얼리즘 만화의 축을 세운 방영진(1939~1999)이었다.
우선 왜 당대의 난다, 긴다 하는 만화가들이 리얼리즘 만화를 그리지 않았을까? 현실을 재현하는 리얼리즘 작품은 드라마를 극적으로 꾸미는데 한계가 있다. 현실을 과장하거나 비약하지 않으면서 만화적 재미를 이끌어낸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상대는 어린이 독자들이다. 삶을 이해하는 수준이 제한적인 그들에게 주변의 농촌이나 도시의 이야기를 만화로 보여주면 솔깃해할까? 철저하게 상업주의적으로 경쟁한 만화 시장에서 돌아오는 답은 거의 부정적이었다.
이미지 : 약동이와 영팔이 복간도서 표지, 2012년
리얼리즘은 우직하고 상상력이 부족해보이기도 하지만 공감을 통해 감동을 일으키는데 탁월한 수법이다. 서민이 이 거친 세상에서 삶을 살아가며 생존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극적이면서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리얼리즘 작품을 위대하게 만드는 작가의 가장 중요한 능력은 통찰력이다. <약동이와 영팔이>는 스물을 갓 넘긴 작가 방영진의 놀라운 통찰력이 빚어낸 리얼리즘 만화다. 방영진은 이 작품을 연극계의 <산불>처럼 1960년대를 대표하는 리얼리즘의 명작으로 남김으로써 문학성을 뛰어넘는 품격을 만화계에 선사했다.
방영진은 고학생들의 이야기를 만화로 옮길 수 있는 자신감을 어디서 얻은 걸까? 그는 서울 서대문구 영천동에서 제화점을 하던 중산층 가정의 9남매 중 여섯째로 자랐다. 사대문 안에서 자란 서울 출신에 명문 양정고등학교를 다닌 그는 대다수의 또래가 부러워할 만한 배경을 가졌다. 서울 사람의 시각에서 고생하는 시골 학생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위치가 그에게 주어진 셈이다. <약동이와 영팔이>에서는 약동이, 홀쭉이, 뚱뚱이와 함께 자취방을 얻은 영팔이가 돈을 아끼기 위해 국에 멸치 네 마리만 넣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영팔이는 멸치를 더 넣자는 다른 친구들의 제의를 거절한다. 네 명의 고등학생이 멸치를 한 마리씩 나누어 먹고 그 멀건 국물을 나누어마셨으니 얼마나 배고팠을까. 서울에 집을 두고 명문 학교를 다닌 방영진의 주위엔 고학생들이 우글거렸다. 시골의 부모님과 가족을 생각하며 힘겨운 삶을 견디는, 그럼에도 청춘이어서 그런 생활이 부끄러울 것 없는 친구들. 방영진은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재미와 감동을 줄 수 있는지 잘 알았다. 서울에서 유학하는 시골 학생들에게도, 방학 때 가끔씩 시골에 놀러가는 서울 학생들에게도 <약동이와 영팔이>는 옆의 친구를 떠올리면서 볼 수 있는 자기네들의 이야기였다.
<약동이와 영팔이>에는 1960년대 서울 풍경과 시골 풍경이 대단히 사실적으로 들어있다. 약동이와 영팔이 일행의 고향으로 등장하는 곳은 지금의 충청도 온양에 해당하는 ‘오장’이란 마을이다. 방영진은 6.25 때 피난 가 익숙했던 이 마을을 세심하게 스케치해 만화 속에서 생생하게 재현했다. 담벼락, 장독대, 초가집, 가로수가 난 마을길, 누군가 내뱉어놓은 한숨 같은 구름, 논밭, 나지막한 산자락, 단층짜리 시골 중학교 건물, 학교에서 종 대신 쓰는 산소탱크, 나무 세 개로 엮어 만든 다리, 툇마루와 소박한 밥상, 나무지게, 돌역기, 시골장터, 담벼락에 세워진 절구 등이 사진보다 더 리얼하다.
이미지 : 약동이와 영팔이 복간도서 표지, 2012년
방영진이 창조한 걸물은 역시 영팔이다. 이 마을로 이사 온 영팔이는 약동이, 홀쪽이, 뚱뚱이 일행과 주먹질을 하며 안면을 튼다. 조금이라도 무시당하는 건 참을 수 없는, 남에게 이유없이 도움 받는 것도 싫어하는 대단히 자존심 강한 중학생이다. 그런 영팔이가 약동이의 여동생 약분이에게 호감을 가지면서 그들과 친구가 된다.
영팔이는 임기응변이 뛰어나고 모든 일에 수단이 좋다. 시골장터에서 약동이 여동생에게 토끼를 싸게 판 일을 아버지가 추궁하자, 그는 병든 토끼를 손님에게 속여서 떠넘겼다는 식으로 둘러댄다. 아버지는 “너도 나를 닮아서 수단은 좋구나”라고 기뻐한다. 불같은 다혈질이지만 중요한 일이 닥칠 땐 로댕의 명작 <생각하는 사람>의 포즈를 한 채로 잠시 생각한 후 침착하게(약간 의뭉스럽게) 대처하는 모습이 영팔이의 진짜 매력이다. 똑똑하다고 으쓱대는 서울 학생들을 능가하는 ‘사막에 떨어뜨려도 살아날’ 영팔이의 생존력은 네 친구가 서울 생활을 하는데 있어 가장 큰 동력이 된다.
네 친구가 서울로 수학여행을 갈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미꾸리를 기르는 에피소드도 상당히 사실적이다. 서울로 수학여행을 간다는 것은 시골 학생들에게 꿈과 같은 일이었다. 1960년대 중반 학교에 ‘월사금(교육비)’을 못내 쫓겨나는 아이들이 상당수였다. 해법수학의 최용준 천재교육 회장도 월사금을 내지 못해 초등학교 5학년 때 퇴학당했다. 정치인 문재인의 자서전 <운명>을 보면 월사금과 만화방에 얽힌 이야기가 아주 구체적이다.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 매달 내는 돈이 있었다. 처음에는 ‘월사금’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사친회비’로 이름이 바뀌었다. 6학년 무렵엔 다시 ‘기성회비’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기억된다. 가난 때문에 그 돈을 제때 못내는 아이들이 많았다. 담임선생님이 돈을 내지 않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독촉을 했다. 불러 일으켜 세워서 야단을 치기도 했다. 그래도 계속 못 내면 집에 가서 돈을 받아오라며 수업 중에 학교에서 내쫓았다.
한 반이 80명 정도였는데 쫓겨나는 아이가 20여 명이나 됐다... 가난하면 일찍 철이 들기 마련이다. 선생님이 쫓아 보낸다고 집으로 가는 아이는 거의 없었다. 집으로 간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었고, 어른들 마음만 아프게 할 뿐이었다. 그냥 우리끼리 이송도 바닷가에 가서 놀다가 학교 마칠 때 쯤 교실로 돌아갔다. 선생님에게는 “집에 아무도 안 계시데요” 라거나 “엄마가 언제 준다 하데요”라고 집에 다녀온 양, 다들 거짓말을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그렇게 쫓겨나서는 우르르 만화방에 가서 만화를 보고 나오다 바로 만화방 문 앞에서 담임선생님과 딱 맞닥뜨렸다. 모두 학교로 끌려가서 실컷 두들겨 맞았다.
약동이 일행은 뚱뚱이 할아버지 소유의 뱀논 옆 넓은 둠벙에서 미꾸리를 키우려 하나 완고하기로 소문난 뚱뚱이 할아버지의 허락을 얻지 못한다. 약동이의 아이디어로 영팔이가 천재 수의사를 연기한다. 북 치고 장구 치는 콤비인 이들은 무지한 시골 어른들을 속여 미꾸리를 키워 판 돈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온다. 정의감 넘치고 의젓한 ‘브레인’ 약동이는 곧 작가 방영진의 분신이기도 했다.
네 친구가 서울의 명문 북성고등학교(방영진의 모교 양정고등학교가 실제 모델)를 목표로 함께 입시를 치르는 장면은 1960년대의 살아있는 풍경이다. 당시 명문 고등학교 입시 경쟁률은 10대 1이었다. 나라 전체가 어려운 시기여서 일류가 더 우대를 받던 세상이었다. 입시는 학생들에게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 라디오와 신문 같은 유력 매체에서 합격자 발표를 해줄 정도였다. 명문고 입시는 국민적 관심사였다.
북성고등학교 합격자 발표날 아침, 네 친구는 여관에서 말아준 미역국을 무심히 먹고 나왔다가 ‘불길하다’며 길에서 토한다. 입시관의 실수로 합격자 명단에서 빠진 영팔이와 홀쭉이는 고향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인근 호수가로 가서 우두커니 시간을 보낸다. 물을 만져본 홀쭉이는 “물이 차가와서 빠져죽어 버릴 수도 없고”라고 울먹인다. 어두운 밤 집에 숨어들었다가 입시관의 실수로 이름이 누락됐다는 이야기를 엿들은 영팔이는 너무 기뻐서 그 자리에서 기절한다. 지금이야 고등학교 진학이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하지만 당시 명문고 합격은 죽었다 살아나고, 까무러칠 만큼 대단한 사건이었다. 영팔이는 실패를 위로한 약동이의 엉덩이를 걷어찬 게 미안해 자기 엉덩이를 갖다 대고 차도록 한다. 입시를 둘러싼 <약동이와 영팔이>의 스토리는 1960년대 사람들의 심성과 시대상을 그대로 읽도록 해준다.
이미지 : 약동이와 영팔이 중 방영진의 시골 풍경 묘사 실력을 느끼게 하는 장면.
이들에게 입시는 시작일 뿐이다. 서울에선 수돗물이 콸콸 나오는 줄 알았는데 약동이 일행이 머무는 하숙집은 싼 하숙비 탓에 물지게로 물을 조달해야 한다. 물가의 오름세를 측정하기 위해 콩나물 무게를 벽에 설치한 고무줄 저울에 달아보며 생활을 하는 이들은 지금의 웬만한 대학생들보다 훨씬 야무진 모습이다.
고학생 아르바이트와 운동부 가입. 서울로 올라온 네 친구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재미있어지는 것은 이 대목부터다. 약동이는 과외, 영팔이는 땅콩장사, 홀쭉이는 신문 돌리기, 뚱뚱이는 식빵장사를 시작한다. 넷 중 가장 일이 안 풀리는 친구는 홀쭉이다. 그가 돌리는 이류 신문을 구독해 줄 사람도, 신문값을 줄 사람도 없다. 약동이의 아이디어로 운동부 선배들이 도와 파산 직전의 홀쭉이는 순식간에 엄청난 배달처를 확보한다. 홀쭉이가 ‘능력자’로 소문나 일류 신문사 보급소에 스카우트된다. 홀쭉이의 기막힌 캐릭터가 슬슬 나타난다. 친구들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모든 공을 자기에게 슬쩍 돌리는 ‘능구렁이’ 같은 면모다. 캐릭터를 꿰뚫어보는 방영진의 작가적 능력은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홀쭉이는 일류 신문 보급소에 출근하자마자 고학생 조수를 데리고 나타나 친구들에게 소개한다. 방영진은 특별히 웃기려고 의도하지 않는다. 독자는 능구렁이 어른을 흉내내는 홀쭉이를 엿보면서 웃음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4000원이라는 적은 돈 중에서 1000원이라는 거액을 이 아이에게 주고 겨우 3000원을 내가 갖게 되는 거야. 사실 노골적으로 말해서 나는 이 아이에게 대우를 잘 해주는 셈이다... 나의 보조를 희망하는 아이들이 모두 일곱 명이나 되었어. 뭘... 보통이지... 우리같은 일류 배달원들에겐 항상 그 정도의 보조 희망자들이 따르게 마련이라까... 그런데 그 일곱 명의 희망자 중에서 내가 특별히 이 아이를 뽑은 거야. (보조를 보며) 너 참 오늘 재수가 좋았구나. 내 보조로 채용되었으니. 너 어젯밤에 달꿈 꿨니? 그럼 돼지 꿈?”
그래봐야 신문 배달원인 홀쭉이는 마음에 둔 식품 가게의 여학생 앞에서 두부를 달라하면서 조수에게 사장과 같은 말투로 명령을 한다. “내일 아침에 일찍 나와서 말야... 사무실도 좀 소제해 놓고... 장부도 좀... 정리해 놔라. 에이 참... 비서 하나 둔 것이 똑똑치가 못해서... 속상해 죽겠는 걸... 여기 있어 20원!”
그렇다고 홀쭉이가 입만 살아있는 학생은 아니다. 그는 마라톤부에 가입해 첫 출전한 대회에서 감동의 레이스를 펼친다. 레이스를 앞두고 사회생활 하는 학교 선배가 모교 선수들에게 계란 두 개씩을 돌리자 모두들 감동한다. 이 장면은 1960년대에 계란이 얼마나 귀했는지 보여준다. 북성고 응원단이 트럭을 타고 응원을 보내자 홀쭉이는 “우리학교 교가를 부르란 말야! 감격적으로”라고 외친다. 레이스 포기를 놓고 고민하는 홀쭉이는 중요한 것을 깨닫는다. ‘너무 자신만 믿고 어렸을 적부터 소질을 타고 났다고만 생각하고... 겨우 신문배달을 한 달 한 것이 큰 자랑이나 되는 듯이... 정말 세상에게 면목이 없구나...’ 앞의 주자를 하나씩 따라잡은 홀쭉이는 첫 출전에 6위로 골인하고는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미안하다”면서 눈물을 터트린다. 어른으로 성장하는 건 이만큼 큰 고통이 따른다. 방영진은 가슴이 파열될 듯한 홀쭉이의 레이스 속으로 독자를 완벽하게 끌어들인다.
이미지 : 약동이와 영팔이 복간도서 표지, 2012년
영팔이와 홀쭉이라는 최강 캐릭터 외에 원숭이를 닮은 생김새를 가졌지만 2인자로 처신하며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역도부 부주장 고리라, 괴력의 유도를 구사하지만 칭찬에 약한 여학생 마돈순은 <약동이와 영팔이>의 감초다. 이 네 명은 단순히 웃긴 만화 캐릭터가 아니라 대단히 현실성 있는 인물들이다.
<약동이와 영팔이>에서 또 하나 두드러지는 갈등은 왕따 문제다. 시골 출신 고학생들은 서울 학생들에게 ‘시골뜨기’라며 따돌림을 받기도 했다. <약동이와 영팔이>에선 영팔이와 같은 마을 출신의 남규가 약동이 일행을 집중적으로 괴롭히는 역할을 한다. 일제에 협력한 형사가 같은 민족을 더욱 들들 볶듯, 약동이 일행과 같은 시골 출신인 남규 패거리가 서울에서 ‘시골뜨기들’을 괴롭힌다. 북성고에서도 약동이가 부반장이 된 걸 못마땅해 시비 거는 서울 토박이들도 등장한다. 이 문제는 <약동이와 영팔이> 1부 20권에서도 다루어지긴 하지만 2부 20권에선 주요 테마가 된다. 2부는 약동이 일행이 서울서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시골 부모님들에게 라디오를 사드리고, 부모님 서울 구경을 시켜주는 등의 에피소드로 전개된다. 시골에 내려온 남규 패거리가 밭을 망치고 홀쭉이와 뚱뚱이를 두들겨 패자, 약동이 일행은 강가에서 남규 패거리와 패싸움을 벌인다. 이 역시 1960년대의 리얼리즘이다. 실제로 각 지역에서도 이질감 때문에 일어나는 싸움이 빈번했다. 서울역 주변에는 돈을 뺏는 깡패들이 많았다.
당시 학교 운동부의 선후배간 위계질서는 지금의 군대생활에 맞먹는다. <약동이와 영팔이>에서 각 운동부 주장들이 1학년 반들을 돌며 부원을 모입하는 장면은 전통 있는 남학교를 다녀 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대목이다. 1964년 10월 열린 도쿄올림픽에 대한 정보도 자세히 나온다. 유도부 부장은 “내년도 동경 올림픽을 계기로 이 유도가 올림픽 종목에 새로 끼게 되었다”고 유도부 가입을 유도한다. 이를 통해 이 작품이 1963년 출간됐음을 알 수 있다. 농구부 주장이 신입생들 앞에서 아무 말 없이 좌우로 공을 드리블하는 시늉을 하는 장면은 익살스러우면서도 사실적인 연출의 극치다. 방영진은 이미 리얼리즘의 미학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생생함은 그가 양정고등학교 밴드부에서 활동했던 경험으로부터 비롯된다. 방영진이 속한 밴드부는 <약동이와 영팔이>의 운동부들처럼 규율이 혹독했다. 방영진은 선배들을 피해 대구까지 달아난 적도 있다고 한다.
<약동이와 영팔이>는 1962년 말부터 1964년 초까지 1, 2부 각각 20권씩 총 40부로 마무리됐다. 원래 신동헌의 집에서 약 1년 동안 데생공부를 하며 만화가의 길을 준비한 <탐정 약동이>로 두각을 나타내면서 야심작 <약동이와 영팔이>를 발표했지만 이 때 류마티스가 너무 심해 더 이상 만화를 그릴 수가 없는 지경이 됐다. 병을 고치고 휴식을 취해야하는 시간에 그는 등을 벽에 댄 채 합판 위에다 <약동이와 영팔이> 원고를 그렸다.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으며 원고를 제작한 것이다. 약을 먹는 양이 늘고 손까지 떨리면서 <약동이와 영팔이>의 다음 이야기를 쓸 수 없었다. 혼자서는 문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누님의 보살핌을 받긴 했지만 평생 고통 속에서 독신으로 생을 마감했다. 방영진은 완벽주의자의 면모도 보였다. 그는 책이 출간된 후에는 원고를 회수해 불태워버렸다. 1999년 방영진이 작고했을 때 그의 가족들 역시 작가가 남긴 만화책을 모조리 불살랐다. 1960년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리얼리즘 만화의 원고와 책은 그렇게 사라져갔다.
1960년대 리얼리즘 만화를 다룰 때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들이 또 있다. 만화가 최상권이 1960년대를 관통하며 발표한 <말숙이> <파란버스> <오빠> <서울은 크다> <꿈꾸는 소녀들> 등이다. 그의 만화는 항상 소녀가 주인공으로 주변 상황과 시대를 리얼리즘적인 시각에서 보여준다. 1966년 12월 출간된 <말숙이>는 시골에서 갓 상경한 식모 말숙이가 주인공이다. 서울에는 시골 출신 고학생만큼이나 식모들이 많았다. 서울의 각 가정은 잘 살든, 못 살든 식모를 두었다. 시골에선 여자의 경우 초등학교 교육만 받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면 식모가 됐다. 딸을 식모로 만들어 돈을 버는 개념이 아니라 군식구 입을 하나 더는 개념이었다. 서울의 가정에 들어간 식모는 제대로 월급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어린 아이들도 식모에겐 “야, 야”라고 반말로 부르며 무시했다. <말숙이>에서 말숙이의 서울 집 초등학교 꼬마가 식모에게 ‘누나’라고 부르지 말라며 동생을 혼내는 장면이 등장한다. 꼬마는 “식모는 어디까지나 식모야”라면서 철저하게 상전 행세를 한다.
같은 또래의 서울 여자아이들은 ‘여학생’이라고 불렸다. 식모들의 가슴 속에선 ‘똑같은 사람인데 난 왜 쟤한테 조롱을 받아나 하나’라는 억울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말숙이>는 결국 세상의 부당함에 서럽게 울던 식모가 꿋꿋하게 자수성가하는 이야기다. 식모들은 서울서 온갖 학대를 받으면서도 안 먹고, 안 입고 틈틈이 모아 명절에 시골 부모에게 가지고 내려갔다. 1970년대 들어 식모들은 버스차장, 공장 여직공으로 변모해 대한민국의 산업화에 기여했다.
<파란버스>에서는 직장에서 실직했는데 차마 가족들에게 사실을 털어놓지 못하고 고민하는 가장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IMF 시대의 실직한 가장들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가족들과 식모는 가장에게 용돈과 월급을 달라고 보챈다. 돈을 마련하고자 가보인 시계를 시계점에 파는 가장은 “다시 찾으러 올테니 딴 사람에게 팔지 말고 뒀다 주시오”라고 말한다. 최상록의 만화에는 아빠, 엄마가 찾으러 오지 않는 아이, 동네마다 있었던 미친 여자 등의 사연이 가득하다. 만화는 문학 이상 가는 시대의 기록자였다. 최상권에 대해선 ‘순정만화’를 주제로 한 원고에서 다시 한 번 다루어야 한다. 리얼리즘은 현실의 재현일 뿐만 아니라 소멸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영원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내재하고 있다. 리얼리즘 속에서 주인공은 시대의 전형이 되고, 순간은 영원이 된다. <약동이와 영팔이>를 보면서 “작가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 어떻게 이런 유모를 구사했을까?”라는 생각이 들 지 모른다. 만화가들은 어두운 현실에 희망의 빛을 비추어 1960년대를 재현해냈다. 방영진은 아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고통은 순간이지만 작품은 영원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