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6세기 아테네의 입법가 솔론은 “살아있는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고 말한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전 인생을 평가한 후에야 행복했는지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솔론의 말은 남들이 객관적으로 인정하는 행복에 도달하기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세월을 한참 건너 뛰어 일본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는 자신의 만화 <더 크레이터(The Crater)>의 ‘산 제물’ 편에서 ‘행복이란 건 시간과는 관계가 없는 거야. 단 한 순간의 행복을 붙잡기 위해 몇 십 년이나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어’라는 대화를 들려준다. 행복이란 오사무의 명작 <불새>에 등장하는 불새처럼 인간이 손에 넣을 듯하면서 결국 손에 넣을 수 없는 성질의 어떤 것일까?
동서고금의 수많은 위인이 나름대로 행복을 정의해왔다. 붓다에게 행복은 생로병사의 번뇌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들 니코마코스에게 남겨준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행복은 탁월성에 따르는 이성의 활동이라고 강조한다. “탁월성을 획득하는 능력이 손상되지 않았다면 누구나 배움과 노력을 통해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 여기서 행복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는 문제다. 능력을 갈고 닦아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 실력을 낼 때 행복은 비로소 자기 것이 된다.
게르만족과 숲 속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로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행복이란 동양의 ‘중용’과 비슷한 개념이었다. 그에 따르면 만물은 변화하는 것이다. 일마다 정색을 하고 거부하거나 집착한다면 결국 그 일에 농락당해 불행해 질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람은 집착을 버리고 부동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아우렐리우스 행복론의 핵심이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인간은 스스로 행복해지기로 결심한 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1권 9장에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로 ‘신적인 우연이나 운명’을 지적하며 ‘행복은 외적인 좋음을 필요로 한다. 일정한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고귀한 일을 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쉽지 않다’고 덧붙인다. 좋은 시대, 좋은 부모를 만나는 등의 외적 환경은 행복에 큰 영향을 준다. 일제 강점기를 관통하며 살아야 했던 조선의 지식인이라면 열에 아홉은 행복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 시기에 태어난 것이 운명이다.
1960년대와 70년대 대한민국 땅에선 대략 절반의 국민이 ‘원천적으로’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여자들이었다. 조선이 건국한 후부터 그 때까지도 그들은 희생의 삶을 떠안아야 했기 때문이다.
전 세계 각국에서 여자 대통령이 배출되고 있는 상황에서 보면 믿기 어려울 만큼 여자는 사회적으로 비독립적 존재였다. 뉴질랜드 여자가 세계 최초로 투표권을 얻은 시점은 1893년이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미국 여자들도 결혼하면 법적으로 모든 재산을 남편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남편이 사망한 후 그 재산을 아내가 돌려받을 수 있는 지 역시 남편의 마음에 달려있었기 때문에 여자의 행운이란 얼마나 ‘마음이 넓은’ 남자를 만나느냐의 문제였다. 1960년대, 70년대 페미니스트들이 전 분야에 걸쳐 남녀평등을 요구하는 로비를 벌였을 때, 우리나라의 여자들은 여전히 엄격한 유교 관념의 지배를 받으며 몰락한 가정에서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해왔다. 남편은 밥상을 엎으며 호통치고, 자식은 5명 이상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매 끼니를 걱정해야 했지만 부엌에는 얼씬거리지 않는 것이 남자의 미덕이기도 했다.
남자들의 자존심을 세워주어야 하는 것도,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 자식들의 양육과 교육에 쏟아 부을 쌈짓돈을 마련해야 하는 것도 여자의 몫일 때가 적지 않았다. 여자의 아름다움은 걷어치우고 억세게 사는 것이 생존의 방법이었다. 1960년대, 70년대까지도 시골 여자의 삶이란 대게 고만고만한 모습으로 고단했다. 1960년대 이전의 풍경일지도 모르지만, 황인성 전 국무총리의 자서전 <돌뫽이에서 돌뫽이로>에서 가족경제와 노동의 중심에 있던 시골 여자의 전형이 묘사된다.
어머니는 밭둑이나 빈터에 호박과 박을 심었다. 박이 익으면 따서 속은 삶아서 먹고 껍질은 말려 바가지를 만든 후 온몸에 주렁주렁 바가지를 이고 지고 먼 고장으로 가서 무명천의 원료인 목화와 바꾸어 왔다. 목화를 바꾸어 와서는 물레를 저어 실을 만들어 그것으로 무명베를 손수 짜 가족들의 옷을 지었다. 어머니가 잠시도 쉴 틈 없이 일을 했기 때문에 나는 할머니의 등에 업히거나 품에 안겨 자랐다.
도시 변두리에 거주하나 남편이 없는 여자들은 머리와 등에 잔뜩 짐을 지고 아이의 손을 잡은 채 떠돌이 행상의 삶을 살았다.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여자들이 가장의 책임을 벗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 70년대엔 소녀 가장이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소년소녀가장’이라는 용어가 더 정확하겠지만 소녀들이 가장 역할을 하기 더 버겁지 않았나 한다.
1965년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가 개봉돼 전국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1963년 대구 계양동 산 밑에서 사는 초등학교 4년 이윤복 어린이가 쓴 일기가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이듬해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영화로 이어졌다. 부모가 없거나 부모가 있어도 생계를 책임지지 못할 때 어린이들이 가장의 책임을 맡았다. 도시빈민인 소년소녀가장 이윤복, 이순나 어린이의 환경을 보자. 윤복과 순나의 엄마는 윤복이 여섯 살 때 집을 나간 이후 소식이 없다. 아빠는 한 때 목수였으나 실직하고 병약해 전혀 돈벌이를 하지 못한다. 초등학교 4학년과 그 아래 여동생인 윤복과 순나가 아빠와 어린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 그들이 학교를 사흘 걸러 결석하는 건 껌팔이, 구두닦이 등의 생활 전선에 내몰려 있기 때문이다. 윤복과 순나는 껌을 팔다가 단속 반원에게 잡혀 희망원에 사흘 동안 갇혀 있다 탈출한다. 그 곳엔 자신들과 같이 잡혀온 아이들이 가득하다.
원래 여자는 남자보다 더 일찍 철든다. 순나는 가족들이 동네에서 거지취급 당하는 모습을 보다가 ‘돈 많이 벌어 집에 오겠다’는 편지를 남기고 가출한다. ‘돈 많이 벌겠다’는 일념 하나로 학교를 그만두고 장사에 나서는 소녀들이 많았다. 사실은 다른 형제들을 공부시키겠다는 희생정신이 발동한 까닭이다. 아마도 윤복이와 순나 엄마도 그런 동기로 집을 나섰다가 돌아오지 못하게 됐으리라.
1960~70년대 여자들에게 주어진 현실은 아름답지 못했다. 시대가 그들에게 요구한 것은 부모와 남편을 대신해 집안을 일으키는 억척스러움이었다. 그들은 한비야류의 여자 모험가들처럼 국경을 넘어 다니며 지도 밖을 행진하는 거창한 꿈을 꿀 수도 없었다. ‘스케일’이란 개념이 그 시대의 여자들에게 원천 차단됐다.
지금은 딸을 아들보다 더 쳐주는 세상이 됐지만 그 땐 부모가 딸을 멸시했다. 오죽하면 그 다음에는 아들을 낳으라는 뜻으로 딸의 이름을 ‘후남(後男)’이라고 지었을까. 딸의 존재를 무시하는 이름이었다. 딸은 부모에게조차 최선의 결실이나 기대가 아니었다.
그러면 소녀들은 어디서 행복을 찾을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1960~70년대 수많은 소녀 독자를 울리고 미소짓게 했던 순정만화에 담겨 있다. 우리나라 1세대 순정만화의 서막은 남자 만화가들이 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순정만화는 1957년 선보인 한성학의 <영원한 종>이라 할 수 있다. <영원한 종>에서 주인공 순희는 헤어졌던 두 언니와 만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 두 언니 중 하나인 정순이 콩쿠르에서 행복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영원한 종은 멀리 멀리 영원히 퍼지리!’라는 정순의 노랫말에서 ‘영원한 종’의 자리에 ‘행복’이란 단어를 넣으면 의미가 더 뚜렷해진다.
이 시기에 세계명작동화 출간이 집중되면서 책을 좋아하는 소녀들의 구미를 당기는 작품에 대한 수요가 잠재적으로 늘어났다. 김정파의 순정그림소설들, 순정과 사극에 걸쳐있던 이범기의 만화들도 순정만화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이범기는 자신이 순정만화의 효시라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 순정만화를 틈새시장으로 보는 출판사들도 생겼다.
권영섭, 김용도, 이창훈 등은 1960년대에 들어서자 순정만화를 본격적으로 발표하며 새 시장을 형성해나갔다. 이때는 ‘순정만화’라는 용어가 없어서 ‘소녀만화’라고 불렸다. 권영섭이 1960년 발표한 <울밑에 선 봉선이>는 초창기 순정만화의 선두주자 중 하나였다. 이 작품에는 당시 시대상을 담은 기막힌 사연이 숨어있다. 교회학교 교사를 겸하고 있던 권영섭은 소녀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펜을 들었다. 6.25 이후 주인공 봉선이가 아빠의 잘못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이 만화는 사실 작가의 친형과 질녀가 모델이었다. 권영섭의 친형은 당시 흔히 볼 수 있는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가장이었다. “홍난파 가곡 <봉선화> 제목을 차용한 이 작품에서 한 가장이 잘못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여주고자 했다. 이 작품을 본 형님이 ‘이게 나란 말이냐’며 무척 화를 냈다. 소녀들에게 환경을 극복하라는 위로의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울밑에 선 봉선이>의 결말 부분에서 폭력적인 아빠는 죽는다. 캐릭터 봉선이는 꽤나 인기를 끌어 1960년대 초반 <봉선이 하고 바둑이>(1960) <봉선이와 아나>(1964) 등의 시리즈로 이어져갔다. 하나의 캐릭터를 사용해 시리즈를 만들고 순정만화의 기반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폭력적인 가장에 대한 반발심이 순정만화를 정착시키는 원동력이 됐다는 부분이 흥미롭다. 봉선이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살을 마음먹은 소녀 팬이 <울밑에 선 봉선이>를 보고 힘을 얻어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도 작가에게 연락을 한다고 한다.
1960년대 초반에는 이범기의 <장희빈>(1961)처럼 비운의 여인을 그리거나 최상록의 <일본에서 온 아이>(1963)처럼 소녀가 가족과 재회하는 이야기를 그린 순정만화들이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순정만화는 가족 만화에 가까웠다.
순정만화의 주도권은 머지않아 여자 만화가들에게 넘어갔다. 여자 만화가로 가장 먼저 순정만화 창작에 뛰어든 작가는 송순히였다. 그는 권영섭, 김용도, 이창훈과 거의 동시에 순정만화 <갈림길>로 소녀 독자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그들의 책은 예비 순정만화 작가들에게 교과서가 됐다.
그 때까지 열혈 순정만화 독자에 불과했던 장은주, 민애니, 엄희자 등 ‘1960년대 여자 만화가 트리오’가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순정만화의 시계바늘을 장은주가 첫 작품을 들고 신촌을 찾은 1961년 봄의 신촌으로 돌려보자. 장은주는 1941년 일본 큐슈에서 태어나 다섯 살에 남동생과 함께 부산 동래 온천장으로 건너왔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큐슈에서 만나 결혼했다. 살림살이는 넉넉지 않았지만 그는 동화책을 읽고 지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굉장히 부잣집에 사는 친구가 있었다. 장은주는 그 친구가 집밖에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동화책을 빌렸다. <소공자>, <소공녀>, <삼총사>, <철가면>, <톰 소여의 모험> 등도 그 때 독파한 책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침울해 보일 때 동화책 이야기를 들려주면 부모님이 너무 좋아했던 모습이 그에겐 생생하다. 동화작가의 꿈은 점점 커졌다. 글과 그림을 그리며 무언가를 표출하고픈 욕구가 샘솟았다.
부산 시절 박광현, 박기당, 김종래의 만화도 탐독 대상이었다. 특히 최상권의 <흘러간 삼남매>는 보고 또 볼 정도로 그를 매료시켰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강의록을 보며 독학한 장은주가 1961년 신촌의 만화출판사 광문당과 인연을 맺게 해준 것은 이창훈의 순정만화 <개구리 왕자>였다. 애독하던 만화책 뒤에 적힌 연락처로 전화해 출판사로 찾아간 ‘준비된 이야기꾼’에게 기회가 열렸다.
데뷔작 <장미의 눈물>은 사각관계의 사랑 이야기였다. 네 명의 주인공은 장미공주, 폴왕자, 마녀의 딸 앙카, 샤킹왕자다. 여기서 ‘폴’과 ‘앙카’라는 이름을 맞춰보면 투 피스 퍼즐이 완성된다. 1960년대 초 한국을 휩쓴 팝송 <다이애나>의 가수 ‘폴 앵커’가 나온다. 장은주는 폴 앵커의 이름을 조각내 두 주인공을 만들었다. 장미공주는 샤킹왕자와 약혼한 사이인데 실은 폴왕자를 좋아한다. 그러나 폴왕자를 사랑하는 마녀의 딸 앙카는 장미공주를 질투해 괴롭힌다. ‘장미의 눈물’이란 제목만으로 장미공주가 당하는 고난을 상상할 수 있다.
신인의 데뷔작 치곤 꽤나 성적이 좋았다. 광문당은 <장미의 눈물> 후속권을 계속 주문했다. 5권째에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광문당 편집진의 실수로 먼저 넘겨준 6권이 5권으로, 5권이 6권으로 뒤 바뀌어 출간됐다. 스토리가 엉망이 된 바람에 <장미의 눈물>은 시장에서 치고 올라가지 못했지만 2부로 이어졌다.
<로즈마리>(1964), <능금나무 아래서>(1966)를 발표하며 실력을 다지던 장은주는 1967년 결혼하고 다음해 첫 아이를 낳으면서 작가로서 더욱 안정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해 크리스토프 폰 슈미트의 동화를 각색한 만화 <천사의 꽃바구니>가 상당히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는 꾸준하고 기복이 없는 만화가였다.
남자 만화가들의 작품들이 1960년대 후반부터 신촌의 독점 체제와 검열 문제 등으로 내리막길을 걸을 때, 장은주는 외풍의 영향 없이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애초부터 신촌의 출판사들에 근거를 두고 작품을 발표한 그는 자연스럽게 합동출판사 소속이었고, 원고료나 마감을 가지고 출판사에 골치 썩이거나 정치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작가도 아니었기에 마찰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자신의 원고료가 어느 수준인지도 비교하는 법이 없었다. “원고료가 너무 싸다고 여기지 않고 ‘원고료가 생겨서 좋지’라고 생각했다. 나는 작품 하는 게 재미있을 뿐이었다. (신촌 합동출판사 사태로) 작가들이 이쪽, 저쪽 옮기고 싸울 때도 난 아무 것도 몰랐다. 작가나 출판사와 접촉한 적도 없고, 어디서 오라고 제안을 받은 적도 없었다.”
이 이야기는 마치 6.25가 터졌는데도 강원도 산골은 평화로웠다는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을 연상시킨다. 남자 만화가들이 술을 마시고 서로 벌이에 도움이 되는 정보교환을 하며 정치적으로 움직였다면 여자 만화가는 집에서 나올 일이 별로 없었다. 장은주는 당시 여자의 낮은 사회적 지위 때문에 신촌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빗겨 서 있던 셈이다.
1972년도 전후가 그의 최전성기였다. 신일문화사, 상록문화사, 칠성문화사, 진민문화사 등 신촌의 출판사들이 그의 작품을 인쇄했다. <생쥐와 고집쟁이 아씨>, <속죄>, <떨어진 꽃잎>, <별과 달아기>(이상 1971), <오해>, <눈 속에 핀 꽃>, <봄처녀>, <이국 하늘 아래서>, <귀여운 낭자>, <눈은 내리는데>, <천국으로 보내는 편지>(이상 1972), <생명의 반지>, <은빛 날개>(이상 1973) 등 사극과 현대물을 넘나드는 작품들이 쏟아졌다.
그의 만화는 단정하고 깔끔하면서 동화적 분위기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창조자가 실제로 아담하고 얌전한 공주 같기 때문이리라. 반면 엄희자의 만화는 그림이 예쁘고 섬세했다. 세밀한 면에서 최고였다. 민애니의 만화는 활달하고 시원시원해 근사한 분위기를 이끌어냈다. 세 작가는 이렇게 달랐다. 그림체에선 엄희자나 민애니를 압도하진 못했지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면에서 장은주는 확실한 재주꾼이었다. 그것을 보여주는 작품이 <속죄>다. 유대인 가족에 양녀로 들어간 어떤 불행한 소녀의 실화를 만화적 상상력으로 구현한 <속죄>는 유대인이면서도 독일군 여장교가 되어 못된 짓을 하던 주인공 써니의 기막힌 운명에 관한 이야기다. 써니는 자신을 키워준 집안의 아들 아돌프를 사랑한다. 은인의 집안이 유대인 가문이란 것이 밝혀지면서 유인대인 탄압에 앞장선 써니는 본의 아니게 은혜를 원수로 갚게 된다.
아돌프는 신부가 돼 살아남는다. 써니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대가로 사형 선고를 받고, 신부 아돌프가 써니의 마지막을 지켜본다. 무거운 주제이지만 장은주는 비교적 가벼운 터치로 풀어낸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주인공이 죽기 전 제목대로 속죄를 한다는 점이다. 독자는 써니를 미워할 수 없으며 도리어 동정하게 된다. 써니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만 새 사람이 되어 인생의 승리를 얻는다. 죽음은 주인공에게 패배가 아니라 행복으로 역전된다.
이것이 한국 순정만화의 어법이다. 주인공은 고난을 겪을 지라도 순정만화의 끝은 아름답다. 독자는 새벽녘 풀빛에 맺힌 한 알의 영롱한 이슬로 입술을 적시는 기쁨을 느끼고 행복감을 맛본다.
‘옛날에, 한 옛날에...’ 류의 사극 <눈 속에 핀 꽃>도 본질적으로 <속죄>와 다르지 않다. 고아 같이 불행한 소녀가 여왕의 사랑을 받게 되며 행복을 찾는 이야기다. 여왕이 소녀를 딸처럼 아끼게 된 건 소녀의 행실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소녀의 행위는 보답받는다.
1973년 발표한 <로보트 동생>은 장은주의 스타일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과학자인 할아버지가 어느날 손녀에게 사람이 아닌 남동생을 선물한다. 깡통으로 만들어진 이 로봇은 한 눈에 보기에 멋있지 않다. 게다가 움직일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를 낸다. 로봇이 “누나”라고 부르며 손녀를 따라다니지만 손녀는 근사하지 않은 로봇을 살갑게 대할 수 없다. 할아버지 연구소에 괴한이 쳐들어왔을 때 밉상 로봇이 한 건 해낸다. 이 사건으로 로봇은 손녀에게 사랑받으며 진정한 가족의 일원이 된다. 이 작품은 따듯한 가족을 만들어가는 이야기다. 장은주의 만화는 대단한 갈등이나 복수가 없어 미지근할 수는 있어도 아기자기하고 읽고 나면 가슴 따뜻하게 적신다.
여기서 번쩍 떠오르는 궁금증 하나. 순정만화는 검열에서 자유로웠을까? 포식자는 비루하고 비천한 근성으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법. 단적인 예로 순정만화에서 아기의 배꼽이 노출돼도 검열관의 지적이 날아왔다. 장은주가 1976년 성인만화 <청춘교실>을 그렸을 때의 일이다. 여자가 아파서 침대에 누워있고 연인이 옆에서 간호하는 장면이었다. 누운 여자와 앉아있는 남자의 시선이 마주친 것이 화근이었다. 출간된 책을 봤더니 그 장면이 빠져 있었다. 심의관이 그 원고에 사선을 그어버린 것이다. 장은주가 대사를 고치러 출판사에 갔을 때 더 심한 경우도 있었다. 어떤 남자 작가의 원고 한 장 전체에 시뻘겋게 ‘X자가 그어져 있었다. 그 표시는 원고를 완전히 망가뜨려 버렸다. ’원고의 주인이 얼마나 화날까‘라는 생각에 장은주는 아픔을 느꼈다.
다른 순정만화가들과도 거의 교류가 없던 장은주이지만 송순히 만큼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신인 작가 때 송순히를 만났다. 나이가 나보다 두 살 많았는데 언니처럼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따뜻한 분이었지만 결혼 후 어느 순간부터 활동이 없어져버렸다.”
1세대 여자 순정만화가의 선구자였던 송순히가 갑자기 사라진 것은 만화계로선 미스터리다. 장은주와 민애니는 신인 때 신촌의 출판사 화실에서 조우했다. 출판사 측에서 장은주를 신촌의 화실로 데려가 같은 여자 작가라고 소개했을 때 훗날 부부가 된 민애니와 김기백이 있었다.
문하생 생활로 만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여자 순정만화가는 남자 스승과 결혼했다. 민애니와 김기백를 비롯해 엄희자와 조원기, 윤애경과 박수산 부부 등이다. 여자 문하생이 스승의 빨래까지 하던 시절이었다. 특히 엄희자와 조원기, 윤애경과 박수산은 양쪽이 나란히 순정만화가여서 동고동락하는 운명이었다. 조원기가 엄희자에게 열렬하게 구애한 사건은 만화계에서 아주 유명하다.
눈도 크고 얼굴도 둥그런 소녀 캐릭터를 그린 윤애경은 1965년부터 박수산의 문하로 있다가 결혼을 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치열하게 작품 활동을 했지만 1984년 스승이자 남편인 박수산이 작고한 사건이 작가 인생에 결정타가 됐다. 생활고 문제로 동생과 함께 혼수도매상 등을 하면서 아이들을 길러내느라 거의 펜을 놓는 지경이 됐다. 이들보다 다음 세대 순정만화가 커플로는 한승원과 김동화를 들 수 있다. 이들 역시 사제지간으로 만나 부부의 연으로 발전했다.
장은주, 민애니, 엄희자 세 명이 한 자리에 처음 모인 자리는 1980년에야 만들어졌다. 변웅전이 진행하던 한 TV프로그램이 세 만화가를 초청했다. 그러나 엄희자가 1984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는 바람에 재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민애니와 엄희자가 각각 1962년, 64년 <꽃 파는 소년>과 <행복의 별>로 데뷔했으니 장은주가 이들보다 약간 빨랐다고 할 수 있다. 순정만화는 남자 만화가들의 작품 중 특별히 섬세한 감정을 표현된 작품으로부터 독립된 장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일본 순정만화의 효시로 불리는 데즈카 오사무의 <리본의 기사>가 1953년부터 56년까지 소녀를 대상으로 한 만화잡지 소녀클럽에서 연재되며 독자들에게 순정만화적 감성의 묘미를 알게 했다. 고단샤의 소녀잡지인 나가요시, 슈에이샤의 소녀잡지 리본도 1955년 창간됐다.
순정만화 캐릭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호수처럼 푹 빠질 것만 같은 커다란 검은 눈이다. <리본의 기사>의 사파이어는 그 전형을 제시했다. 긴 머리와 긴 눈썹, 오뚝한 코, 작은 입이 세트다. 눈이 하도 커서 큰 눈망울 밑에 작은 눈망울까지 그려넣을 수 있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 주인공의 큰 눈은 착한 마음씨를 보여주는 동시에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눈이 커질수록 주인공은 공주풍이 된다.
1960년 전후의 한국 순정만화들도 알게 모르게 <리본의 기사>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한국에서 참고할 일본 만화책을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였다. 장은주의 경우 미즈노 에이코의 만화에서 긴 드레스를 입은 공주 그림을 본 적이 있었다. 1세대 한국 순정만화가들은 비교적 독자적으로 만화를 창작할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 70년대 한국 순정만화들은 대체로 선이 굵었다. 작가들은 펜을 꾹 눌러 선을 굵게 뽑았다가 살짝 들어 가느다랗게 선을 변화시키는 것을 선호했다. 그것은 순정만화가들에게 기교의 차원이었다. 펜선의 강약이 들어간 그림이 멋있고, 가느다란 선을 쓰는 그림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1960년대, 70년대 한국 순정만화의 형성에서 남자 만화가들이 큰 몫을 차지한 것은 사실이다. 이범기, 김용도, 최상록, 조원기, 박수산, 권영섭, 차성진 등이 꾸준하게 작품을 발표했다. 순정만화에서 남자 만화가의 존재는 요리계의 남자 주방장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남자 만화가들 역시 소녀들을 충족시킬 만큼 섬세함을 가지고 있었다. 장은주은 이렇게 말한다. “순정만화 작가는 남녀 불문이다. 여자나 남자나 개인적으로 감성이 풍성한 사람들이 따로 있다. 남자가 어떨 땐 더 섬세한 구석이 있다. 여자 중에 더 남성적인 사람도 있는 것처럼.”
순정만화는 소녀들의 판타지와 감성, 이 두 가지를 충족시킨다. 소녀 독자가 순정만화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행복감이다. 1960년대, 70년대 순정만화는 동화나 세계 명작 소설을 각색한 것도 많았다. 엄희자가 1960년대 중후반 선보인 만화 <네 자매> <긴다리 아저씨> <잠자는 공주> <카치아> <사랑의 집>은 각각 <작은 아씨들> <키다리 아저씨>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대위의 딸> <빨강머리 앤>의 각색작이었다.
순정만화는 소녀들이 꿈꾸는 상류층의 생활을 비춰주기도 했다. 두 소녀의 편지교환으로 생겨난 인연을 다룬 엄희자의 만화 <편지손님>(1974)은 주인공 미나가 피아노 레슨 선생님 집에서 피아노를 멋지게 연주하며 체르니를 떼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미나네 집은 당시 잡지들이 앞 다퉈 소개하던 너른 풀밭이 딸린 큰 이층 단독주택이다. 미나네 집 마당의 풀밭엔 물고기가 가득한 연못이 있고, 그 옆에 비치파라솔과 정원용 테이블이 놓여있다. 연못에서 분수가 솟구치자 귀여운 개가 풀밭을 뛰어다닌다. 앵글은 단독주택의 실내로 이동한다. 응접실엔 푹신한 소파와 카펫, 꽃병, 상류층이 갖추어야 할 벽걸이 그림과 전화가 갖춰져 있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이층에 미나의 방이 나온다. 미나의 방엔 피아노와 책상, 전집, 침대가 구비돼 있다. 미나의 집은 1960년대 대한민국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벌던 영화배우 신성일, 엄앵란 부부의 단독주택인 이태원 181번지와 아주 비슷하다. 신성일은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에서 상류층의 집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태원 181번지는 영화 관계자들이 좋아하는 장소가 됐다. 1960년대 중반 아이스크림·코카콜라·오렌지주스·커피·우유를 맛볼 수 있는 곳이 흔했겠는가. 우리 집은 시나리오를 들고 찾아오는 사람들로 항상 분주했다. 우리와 스킨십을 하면서 아이스크림까지 맛볼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냉장고와 같은 크기의 냉동고도 있었다. 에어컨 역시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물건이었다. ‘Needs’라는 브랜드의 에어콘을 3층에 달아놓았는데, 동네 사람들이 구경을 왔다. 한국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빨리 단 것이다.
응접실에 모인 미나네 집 식구들은 활력이 넘친다. 미나네 집을 방문한 한 아줌마는 “이 집은 언제나 웃음꽃이야”라며 부러워한다. 엄희자는 이 작품에서 상류층 저택의 디테일을 보여주기 위해 세심한 노력을 하고 있다. 꿈꾸는 안락한 삶의 단면을 통해 소녀들의 행복감을 충족시켜줘야 하기 때문이다. 엄희자의 데뷔작 ‘행복의 별’(1964)에서도 주인공 유미의 아빠는 무역회사 사장, 엄마는 명동 고급양장점 ‘미라노’의 사장이다. 유미가 입은 드레스는 소녀 독자들에겐 환상이었다. 남편 조원기를 통해 일본 순정만화의 영향을 받은 엄희자의 만화는 스타 탄생을 그린 드라마의 성격이 강했다. 엄희자 만화의 주인공들은 최고 피아니스트, 배우, 피겨스케이트 선수 등의 꿈을 이루며 내면에 잠재된 소녀들의 열망에 불을 지폈다.
이 시기 순정만화에서 희극은 거의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순정만화는 비극에 가까웠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비극에 가깝더라도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은 고난을 이기고 인생의 행복을 스스로 찾아냈다. 그것은 아름다움의 문제이고, 아름다움은 행복의 완성과 깊이 연결된다. 이 시기의 순정만화들은 지금의 ‘막장 드라마’를 뒷받침하는 단순한 신데렐라 스토리와는 달랐다. 아무도 소녀들에게 어떻게 살라고, 어떻게 꿈을 이루라고 조언하지 않는 시대, 여자로 태어난 이상 희생의 삶이 당연한 것이라 여겨지던 시대에 순정만화는 인생의 지침서와 같은 역할을 했으며, 그 자체로 진실한 삶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1960년대, 70년대 순정만화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그것은 소녀들에게 ‘행복의 별’이 아니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