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독일과 인접한 오스트리아 호반 도시 브레겐츠. 2013년 7월 20일 호수 한 가운데 설치된 회전 원형 무대에서 열린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눈길을 끈 것은 용과 큰 뱀이었다. 모차르트가 죽기 두 달 전에 쓴 이 오페라에서 용과 큰 뱀의 존재는 나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왕자 타미노가 큰 뱀에게 쫓겨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밤의 여왕의 세 시녀가 큰 뱀을 퇴치하고 왕자를 구하는 것으로부터 전체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메가박스에서 라이브로 한국에 생중계된 브레겐츠 야외오페라페스티벌 버전은 물살을 가르며 나타난 거대한 황금손의 손바닥 위에 올라탄 타미노가 수면을 뚫고 솟아오른 큰 뱀에게 포위되는 연출을 했다.
브레겐츠 버전의 <마술피리>에 등장한 큰 뱀은 왕자를 당혹스럽게 하고 죽음으로 몰아넣는 괴물로 ‘지버(Guivre)’라고 불린 용과 큰 차이가 없다. 지버는 다리도, 날개도 없는 용으로 뿔과 가시가 돋은 거대한 용머리를 가졌다. 회전 원형 무대를 삼각형처럼 감싸고 선 수십 미터 높이의 세 마리의 용은 머리에 뿔 두 개가 나고 이빨이 날카로운 지버의 얼굴 그대로였다. 유럽인들에게 두려움이자 박멸의 대상이었던 괴물인 용은 영웅적 상상력을 민담에 불어넣었다. 게르만족의 영웅 베오울프도, 기독교의 전도사 성 조지도, 원탁의 기사 렌슬롯도, 바그너의 오페라에 등장하는 지그프리트도 용을 정복하고서야 진정한 영웅이 추앙될 수 있었다. 용과 싸우는 왕자나 기사의 영웅담이 중세 유럽인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괴기담이자 판타지였다. 거대한 용이 21세기의 호수를 뒤엎은 어둠 속에서 눈을 번뜩이며 입에서 연기를 뿜는 모습은 중세 유럽인들이 남긴 정신적 유산이다.
일본에선 전통 요괴들이 한 도시 전체를 장악하기도 한다. 일본 내 대게, 참치 최대산지로 유명한 돗토리현 사카이미나토(境港)시는 과거 수산 도시의 이미지를 벗고 일본의 대표적 문화 도시로 변신했다. 요괴 가로등·요괴 기차·요괴 택시·요괴 빵·요괴 술 등 인근 요나고 공항부터 이곳의 모든 공간이 요괴 관련 이미지와 상품으로 가득 차있다.
미즈키 시게루의 만화 <게게게의 기타로>가 없었다면 이 모든 건 불가능했다. 해산물만 잡아선 고장이 발전할 수 없다는 판단한 사카이미나토는 자기 고장 출신의 요괴 전문 만화가 미즈키 시게루에 주목하고, 1993년 그의 만화 게게게의 기타로를 모티프로 도시를 새롭게 디자인했다. 도시 중심부에 1km에 이르는 미즈키 시게루 로드가 건설되면서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만화 도시 건설 전까지 연 2만 명에 불과했던 관광객 수가 2008년 172만명으로 급증했다. 직접 가서 보지 않으면 믿기 어려운 광경이다.
유령족의 마지막 후예로 죽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탄생한 애꾸눈 요괴 소년 기타로를 그린 만화 <게게게의 기타로>는 1959년 종이 연극으로 선보이고 1965년 주간소년매거진에 연재된 후 약 40년 가까이 연재를 이어갔다. 이 만화에는 일본 민담과 전설에서 탄생한 1000여 종의 요괴들이 생동감 넘치게 등장한다.
만화 도시의 핵심은 미즈키 시게루 로드다. 사카이미나토역부터 길 양쪽을 따라 게게게의 기타로의 요괴 캐릭터로 만든 브론즈상 134개가 서 있다. 이 만화에서 주인공 기타로와 함께 유명한 쥐 요괴 네즈미, 팥 씻는 요괴, 달마 등이 브론즈상으로 구현됐다. 요괴에 대한 거부감을 주지 않기 위해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작게, 어린이 눈높이로 만든 게 특징이다.이 곳에선 모든 게 상상력과 아이디어에 바탕을 두고 있다. 브론즈상을 하나 만드는 데 든 비용은 150만엔(약 1800만원)이다. 재정이 약한 사카이미나토 시청은 이를 충당하기 위해 브론즈상에 이름을 넣어주는 대가로 100만엔(약 1200만원)씩 기부를 받았다. 이름을 넣겠다는 요청이 전국 각지에서 들어왔다.
이 도시의 시청과 시민들은 게게게의 기타로 만화로 수익을 얻기 위해 자발적으로 협력한다. 미즈키 시게루 로드 건설을 발의한 구로메 도모노리는 당시 사카이미나토 시청 직원이었지만 지금은 독립해 이 거리에서 여러 개의 만화 캐릭터 상점을 운영하고 있다. 지금까지 구로메 혼자서 개발한 게게게의 기타로 관련 상품만 1000여 종에 이른다. 구로메처럼 상점을 운영하며 독특한 캐릭터 상품을 개발하는 사람도 여럿이다. 작가인 미즈키 시게루가 고향 사람들을 위해 만화 캐릭터 로열티를 아주 저렴한 수준으로 받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카이미나토 시민들도 처음에는 요괴 캐릭터들이 지면에서 튀어나와 거리를 점렴하는 데 반대했다. 구로메는 "시청이 도시를 요괴 만화로 디자인한다고 했을 때, 시민들 상당수가 반감을 갖고 있었다. 일단 브론즈상 몇 개를 완성해서 시민들에게 보여준 뒤에야 반감이 없어졌다"고 밝혔다. 이 고장의 대표적인 사케 브랜드인 치요무스비도 요괴 모양의 술병을 아주 다양하게 개발하고 있다. 이 캐릭터 술병은 미국에서도 인기다. 한 상점에서 자체적으로 발간하는 요괴 신문도 만화 마니아들의 수집품으로 인기가 높다. 이 고장의 대표적인 사케 브랜드인 치요무스비도 요괴 모양의 술병을 아주 다양하게 개발하고 있다. 이 캐릭터 술병은 미국에서도 인기다. 한 상점에서 자체적으로 발간하는 요괴 신문도 만화 마니아들의 수집품으로 인기가 높다.
미즈키 시게루의 만화에 등장한 전통 요괴들의 더 생생한 모습은 남산 타워 같은 탑 형태의 유메미나토타워에 구현돼 있다. 그 곳에서 나는 이상한 전시물 하나에 마음을 빼앗겼다. 유리 상자 안에 가운데로 슈크림이 터져나온 듯한 빵 같은 것이 놓여있었다. ‘인귀(人鬼) 덴뿌라’라는 설명서를 읽었을 때 몸이 움찔했다. 인귀라는 요괴는 사람의 영혼을 쏙 빼내어 기름에 튀겨 덴뿌라로 만든 후 먹는다는 것이다. 결국 슈크림은 인간의 영혼이었고, 빵은 영혼이 튀겨진 완성품이었다. 인간의 영혼이 살아있는 몸에서 분리돼 떠돈다는 사고는 고대, 중세 일본에서 보편화된 인식 체계였다. 그런 영혼을 잡아서 덴뿌라로 튀겨먹는 전문 요괴가 등장해도 썩 이상할 건 없다. 미즈키 시게루의 요괴들은 만화 캐릭터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일본 전통 문화유산의 부활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게게게의 기타로>에서 기타로의 친구로 활약하는 한필목면은 몸이 긴 천처럼 생겨 펄럭거리며 하늘을 날아다니는데 가고시마의 전통 요괴다. 미즈키 시게루는 <게게게의 기타로>의 요괴들을 그릴 때 에도 시대 화가 도리야마 세키엔의 <화도백귀야행> 시리즈와 민속학자 야나기타 구니오의 <요괴담의>를 참고했다. 한필목면은 <요괴담의>에 나온 요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여기서 또 한 걸음 나갔다. 그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은 일본 민간전승에 근거한 요괴들의 축제다. 일본에서 2400만 관객을 동원하고 2002년 베를린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인 금곰상을 수상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만큼 성공한 애니메이션은 지금까지도 없다. 제목에서 우리말로 ‘행방불명’이라고 번역된 일본어 ‘가미가쿠시(神隱し)’는 신이 감추었다는 뜻이다. 고대 일본인들은 어린 아이가 사라지면 신이 데려갔다고 믿었다. 실종된 어린 아이는 낯선 환경에서 힘든 상황에 처하겠지만 신이 데려갔다면 춥고 배고픈 인간 세상보단 나은 곳에 있을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소녀 치히로가 터널을 통해 요괴들의 공간에 들어갔다가 돼지로 변해버린 부모를 구하기 위해 마녀 유바바가 다스리는 온천에서 성공적으로 일한 후 현실로 돌아온다는 ‘실종’은 가미가쿠시 전승의 변형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속 요괴들은 인간이 숲 속에 개발했다가 폐기한 놀이공원을 점유하고 있다. 치히로는 유바바의 목욕탕에서 온몸이 오물덩어리인 부패신 구사레가미가 목욕하는 걸 돕는다. 강의 신인 구사레가미는 너무나 더러워서 다른 요괴들도 근거에 가길 꺼릴 정도다. 치히로가 깨끗한 목욕물을 받아주고 구사레가미의 몸에 손을 넣어 박힌 것을 꺼내주자 이 요괴의 몸에서 온갖 쓰레기가 쏟아져 나온다. 그건 죄다 인간들이 강에 버린 쓰레기 오물이다. 더러운 진흙과 똥, 쓰레기 범벅인 구사레가미를 만들어낸 장본인은 바로 인간이다. 구사레가미는 이 작품 관객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한다.
구사레가미 역시 일본 전통적 목욕 보시의 전통이다. 불교 중흥에 힘든 고묘 황후가 스스로의 공덕에 만족하자, 하늘에서 “절에 목욕탕을 만든 후 귀천을 불문하고 천 명을 목욕시키라”는 명령이 내려온다. 고묘 황후가 상대한 999번째 사람은 보기만 해도 끔찍한 나병 환자였다. 그녀는 자신의 입으로 직접 나병 환자의 고름을 빨아내며 목욕 보시를 완성한다. 그러자 나병 환자는 부처의 형상으로 변해 그녀의 노고를 치하하고 사라진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일본 민간전승과 요괴의 전통을 모르면 제대로 해석할 수 없는 작품이다.
사실 <게게게의 기타로>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소재적으로 보면 괴기만화라 할 수 있다. 그 나라의 전통 귀신들의 세계, 귀신과 인간의 만남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요괴’라는 용어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학자들이 고안해낸 것으로 ‘신비한, 기묘한, 이상한, 꺼림칙한 등의 형용사가 붙는 모든 현상 및 존재’ 등을 일컫는다. <그로테스크로 읽는 일본 문화>에서 일본문학 연구자인 이용미는 ‘요괴에는 귀신이나 유령은 물론 도깨비, 동물이나 오래된 도구들의 둔갑, 실체를 갖지 않는 원령 등의 영적 존재, 괴이한 현상 등이 모두 포함된다’고 정의한다.
전설과 민담을 토대로 한 괴기, 요괴 등은 오랜 세월 입에서 입으로 전승된 그 나라 구전문화의 원형이며 정신적 유산이다. 우리나라의 전통 소재를 만화로 각색하는 시도는 괴기만화란 형태로 1960년대~70년대 본격화됐다. 우리나라 괴기만화의 계보는 비교적 일목요연하게 정리된다. 괴기만화의 원조는 <해왕성>, <만리장성>, <황금마대> 등을 발표한 최상권이며, 그에게 영감을 받은 후계자가 박기당과 계월희이고, 괴기만화를 서양의 호러나 스포츠 같은 다른 장르와 결합시켜 새롭게 발전시킨 변종이 조치원이었다.
박기당은 1959년 <귀신동자>, 1960년 <뱀사나이> <묘구 공길이>, 1961년 <불가사리> <저승피리>, 1967년 <백발귀> 등을 연달아 발표하며 고전 괴기만화 작가의 대명사로 떠올랐다. 박기당의 만화 소재는 ‘옛날이야기’였다. 옛날이야기라면 어떤 소재라도 그의 손을 거쳐 멋진 그림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 중에서도 그는 극적 긴장감이 넘치는 괴기물을 선호했다.
이미지 : 박기당의 <저승피리> 표지 이미지
만화수집가 오경수는 ‘기당의 괴기만화는 <청룡백호> <만리장성>으로 기당보다 먼저 유명해져 있던 최상권의 괴기만화와는 성격이 다르다. 최상권의 괴기만화는 신비하고 놀라운 옛이야기지만(팔각거울이나 구슬을 통한 새로운 세상의 모험), 기당의 괴기만화는 축축하고 음습한 소름이 돋는 귀신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가령 다 쓰러진 폐가의 지붕, 무너진 기와지붕 곳곳에 산발 같은 잡초가 엉켜있고 음습한 가옥 내부에는 백발의 도사가 염불을 외우며 향을 피우고 있는데, 그 앞의 재단에는 백옥의 동자가 입가에 아직 마르지 않은 선혈을 흘리며 시체처럼 누워 있고, 만리경을 보며 거울을 향해 주문을 외던 도사의 염불이 더해 감에 급기야 동자의 시체가 눈을 번쩍 뜨며 일어나 앉는다. 도사의 주문은 더욱 강렬해지고, 안개같이 퍼져 나온 향불을 따라 이승을 하직하지 못하고 떠돌던 억울한 영혼이 다시 육신으로 들어가 복수의 화신으로 변한다’고 회상한다.
박기당 괴기만화에서 복수 이야기를 선호했다. 괴기 버전의 <몽테크리스토>라고 할까? 1967년작 <백발귀>는 괴기만화가로 박기당의 인상을 강하게 남겼다. ‘괴기시대 그림소설’이라는 장르로 스스로 규정한 <백발귀>의 시대배경은 신라 소성왕 때다. 박기당은 도입부에 ‘백발이 잡초처럼 허리까지 덮고 애꾸눈에 검은 수염은 가슴을 가렸다. 사람들은 이를 백발귀라 부르고 그 때문에 서라벌 장안은 공포에 싸였다’라는 설명을 붙이면서 백발귀가 사람인지, 망령같은 귀신인지를 알 수 없도록 유도한다. 더구나 백발귀는 신출귀몰하게 공중을 붕붕 날아다닌다. 그로 인해 독자는 더욱 긴장을 느낄 수밖에 없다. 백발귀는 백련공주의 남편인 삼보라는 초권력자의 집에 침입해 그 집 아들을 유괴한다. 다음 장면에서 그의 시선은 폐가로 변한 문대감의 집터에 머물러 있다. “어머니! 사랑하는 어머니, 어디 계시나이까?”라는 외침이 폐가에 울려퍼진다. 백발귀는 문대감의 아들인 주랑으로 백련공주의 약혼자였으나 삼보라는 악인의 흉계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애꾸눈 귀신같은 추골로 변한 터였다. 그래도 그는 인간이다. 마지막까지 백발귀의 처절한 복수는 서릿발처럼 차갑다. 나무 위에 앉아 울고 있는 까마귀를 보며 불안해하는 삼보의 부하들에게 날리는 대사를 보라. “안 갈 거다. 저 까마귀들은 너희들의 눈알을 먹고 싶어서 기다리는 거다!” 난 이 대사를 읽으며 이현세의 <국경의 갈가마귀>를 떠올렸다.
엔딩부는 박기당의 철학을 잘 보여준다. 복수를 완성하려던 차, 죽은 줄 알았던 백발귀의 어머니가 나타난다. 그녀가 아들을 달래는 대사는 주옥같다. “주랑아! 가자, 모든 원수와 세상을 버리고 절간으로... 부처님은 얼굴을 보고 사람을 구하시지는 않느니라. 거칠어진 너의 그 마음은... 부처님의 힘으로 달래보자.” 마지막 컷은 전형적이지만 박기당의 필력으로 예술로 승화된다. 거목에서 나뭇잎이 떨고지는 가운데 주랑과 어머니가 멀리서 걸어가는 뒷모습이 잡힌다. ‘태풍이 지나간 것처럼 몸서리 나는 백발귀는 세상을 등지고 떠나간다....’ 이런 결말이 김민이나 이현세의 무의식 속으로 얼마나 파고들었을까! 1939년 평안북도에서 출생한 계월희는 우리나라 전설이나 민담에 더 뿌리를 내린 만화를 추구했다. <백년 묵은 구렁이>, <무덤 속의 거문고>, <저승사자 마왕상> 등으로 괴기 야담 전문 만화가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일본에서 자란 박기당, 김종래가 일본 괴기담을 각색했다는 인식에 대한 상대적 개념이기도 하다. 이 부분에 대해선 좀 더 자세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미지 : 계월희 작가 <종각>(1969)같은 작품에선 괴이한 소리를 내며 굴러다니는 종을 소재로 했지만 <산삼동자>(1971)나 <심야의 목격자>(1972)같은 사극에선 시대를 정확히 알 수 없는(중국인지, 한국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곳에서 벌어진 음모를 주로 다뤘다. 그래도 ‘계월희’하면 모두들 ‘백년 묵은 구렁이’를 떠올렸으니 그는 괴기만화 작가로 성공한 셈이었다.
김형배의 증언은 이를 뒷받침한다. 1960년대 당시 계월희는 꽤 인기 있는 만화가였다. 김형배가 고등학생 신분으로 만화출판사를 기웃거리던 1960년대 후반의 일이다. 김형배는 자신의 그림을 여러 출판사에 보냈는데, 계월희가 한 출판사에서 그의 그림을 보고 집으로 초대했다. 계월희의 집은 지금의 이대입구역 근처였다. 계월희 역시 하숙하는 처지였지만 고등학생인 김형배에게 손님으로 식사대접 했다. 인자하고 부드러운 스타일인 그는 밥 먹으면서 “문하생하지 않을래?”라고 제안했다.
익히 계월희의 구렁이 만화를 보아온 김형배는 화실이 온통 구렁이 그림으로 도배되어 있으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막상 그의 방은 아름다운 수채화 등으로 꾸며져 있었다. 계월희는 여러 가지 그림을 잘 그리는 실력파 만화가였지만 1980년대 초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떠났다. ‘구렁이 만화가’가 검열의 혹한기와 사회적 지탄 속에서 살아가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1960년대에서 70년대로 넘어오면서 혁신적이면서 미스테리한 만화가가 등장했다. 그의 이름은 조치원. 1980년대에 활약한 상당수의 젊은 만화가들에게 본격 공포만화를 표방한 조치원의 존재는 하나의 새로운 물결이었다. 조치원은 한국 괴기만화를 토대로 아가사 크리스티나 H.G.웰즈 같은 서구 미스터리 작가들까지 수용하면서 변신을 거듭해나갔다. 만화책을 펼치면 꿈자리까지 뒤숭숭해지는 진정한 오싹함. 당시의 ‘오덕’들에게 그는 대마왕이었다.
조치원의 ‘망령’ 시리즈는 제대로 공포만화의 분위기를 냈다. <울부짖는 망령>(1976) 머릿말에서 조치원은 ‘본 저자는 우리나라 독자 수준에 맞게끔 각색해 독자 여러분께 내어놓게 됨을 알려드린다... 이 내용이 어디까지나 현차원을 외면한 공상의 세계라고 생각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설명한다. 이 작품의 표지엔 ‘존 맥클린 원작’이라고 달려있다. AFKN에서 방송한 드라마 <제6지대>의 각색작이라는 설명이 내지에 곁들여진다. 한 남매와 친구가 싸리나무골로 여행을 간다. 그 곳에서 남매는 자신들의 어머니가 ‘무서운 일을 당하고 있다’고 쓴 친필편지를 받는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싸리나무 숲은 산발한 귀신의 머리처럼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소품이다. 이미지 : 조치원의 <울부짖는 망령> 표지 이미지
어머니를 찾아 실마리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낯선 사람들과 만나 정보를 얻는다. 그 정보라는 것이, 지금 자신들이 처한 현실보다 더 끔찍하고 무서운 이야기다. 조치훈은 공포를 이끌어내기 위해 액자식 구성을 즐겨 쓴다. 액자 속 이야기는 이렇다. 어떤 소년이 젊은 여인의 초상이 그려진 족자를 줍는다. 자고 일어났더니 어머니와 두 여동생은 깜족같이 사라져있다. 소년이 어둠 속에서 족자에 가까이 갔을 때, 족자 속 그림의 여인이 소년을 끌어당긴다. 그 과정에서 소년이 들어있던 촛불이 족자에 옮겨 붙어 족자의 여인은 소멸한다. 날이 밝았을 때, 소년은 어머니와 두 여동생이 족자와 함께 없어진 걸 알고 망연자실한다. 액자식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자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던 친구에게 “그래서 그 소년(돌구)은 어떻게 됐는데?”라고 묻는다. 친구는 자기가 직접 봤다면서 “돌구는 지금 정신병원에서 요양중”이라고 답한다. 검은 잉크로 짙게 인쇄된 조치훈의 만화는 그런 이야기와 분위기가 딱 떨어진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액자식 이야기. 세 명이 머물던 싸리나무골은 근처 마을 사람들에게 죽음의 땅으로 불린다. 마을 주민은 그들에게 싸리나무골에서 벌어진 사건을 전한다. 마을에 흉년이 들어 굶어죽은 부녀가 있는데 어린 딸이 죽기 전 남은 콩을 인형의 배에 넣는다. 인형의 배에 있던 콩을 나눠먹은 마을 사람들은 차례로 죽었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전달자는 모두 자기가 직접 봤다며 신빙성을 높인다. 조치원의 주인공은 조원기와 마찬가지로 뾰족코였다. 조치원과 조원기는 만화계에서 보기 드물게 조씨여서 이들을 형제로 오해하는 독자들도 간혹 있었다. 조치원은 그림의 완성도면에서 일류 작가였던 조원기에 뒤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조원기에는 없던 강렬한 분위기까지도 갖추었다. 스포츠만화로도 사랑을 받았던 조치원은 자신의 공포만화에 다른 장르를 접목하는 시도도 했다. 조치원은 어떤 장르든 평범하지 않았다. 그는 <축구 돌이>(1975)에선 마구인 케논킥을 선보인다. 주인공 돌이는 그물을 뚫어버리는 파괴적인 케논킥을 구사할 수 있지만 부상으로 경기에 출전할 수 없다. 한국팀은 99연승의 피그미팀과 대결한다. 이들은 그야말로 아프리카의 난쟁이인 피그미족으로 구성된 팀으로 작은 키로 상대의 골문을 헤집는다. 돌이가 빠진 한국팀은 피그미팀에게 유린당하며 100연승의 제물이 될 위기에 놓인다. 돌이는 부상을 무릎 쓰고 출전해 100연승을 저지하는 케논킥으로 골문을 뚫어버린다. <축구 돌이>는 약간 억지설정이 느끼지면서도 이상무의 야구만화를 읽는 것과 같은 재미를 주는 작품이다. 그 다음해 발표한 <하얀도깨비>는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공포 축구만화’다. 모래중학교의 스트라이커 솔이는 어떤 소년과 접촉한 후 망령이 들어 경기를 망친다. 축구 경기 중 상대방의 골대 앞에서 방향을 바꾸어 자기 골대에다 집어넣은 후에도 자신의 행동을 기억하지 못한다. 솔이는 공동묘지로 가 망령을 불러낸다. 망령이 솔이를 괴롭히는 이유가 밝혀진다. 망령은 강둑길을 걷다가 뺑소니차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소년이다. 이 소년은 평소 동경하던 솔이의 몸을 차지하려 한 것이다. 솔이가 소년의 사진을 전해주자, 망령은 사라진다. 솔이가 소년의 무덤에 십자가를 세움으로써 망령과의 다툼은 끝이 난다.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조치원의 <저주받은 신발>은 더 노골적인 공포 축구만화다. 저주받은 신발을 신고 축구를 하면 승리하지만 얼마 후 죽게 된다는 호러다. 이 전까지 어느 누구도 이런 만화를 독자들에게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는 태생적으로 장르적 성격을 가진 만화의 본질에 다가간 작품들을 그려냈다.
조치원은 삶 자체가 미스터리였다. 스포츠만화가 백산과 같은 연배이며 부산 사람이라는 정도 외에 조치원이란 인물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만화계에도 거의 없다. 공산주의 사상, 대인기피증 등으로 인해 사회와의 고립을 철저하게 추구한 일본 ‘시대극의 아버지’라 불리는 시라토 산페이처럼, 조치원은 만화가들과도 담을 쌓고 살았다. 사실 조치원은 터프한 남자였다. 1950년대~60년대 만화계에서 주먹으로도 이름을 날린 박광현보다 무력적인 면에선 한 수 위였다는 평가를 받는 호남아였다. 몸이 대단히 좋았기 때문에 일대일로 붙어선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았다. 조치원을 유명하게 한 일화가 있다. 1970년대 초반 조치원은 수색에서 살았는데 그 지역에 주둔한 공수부대 병사와 싸우게 됐다. 공수부대 병사에게 얻어맞았으면 그걸로 끝났겠지만 ‘불행하게도’ 이겨버렸다. 명예를 회복하려는 공부수대원들이 그를 잡으러 다녔고, 결국 그는 공수부대로 들어가 자수했다.
그러나 그는 비교적 작품활동을 왕성하게 하던 1970년대에도 아주 제한적인 인간관계만을 가졌다. 만화가 초년 시절의 장태산은 그의 음습한 그림을 동경해서 두서너 번 만날 기회를 가졌다. 조치원은 백산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까마득한 후배인 장태산에게 “말씀 낮추세요”라고 말하며 거리를 두었다. 당시 분위기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태도였다. 그는 작품에 대해 물어보면 듣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술을 먹으면서도 다른 작가나 작품에 대한 언급도 일절 하지 않았다. 장태산은 그에게서 ‘나한테 신경쓰지 말아라. 나도 너에게 관심 없다’는 태도를 읽었다. 그 연배에 있던 장태산의 선배들도 조치원에 대해선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조치원은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조치원에게 불행이 닥쳤다. 1970년대 말 검열관이 공포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조치원’이란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물론 ‘조치원’은 필명(본명 강의웅)이었지만 그의 전 인생이었다. 결국 그는 1980년대 초에는 ‘조치운’으로 강제 개명해야만 했다. 만화계에선 창씨개명으로 빗대는 사건이다. 조치원은 점차 세간에서 잊혀져 갔다. IMF 무렵의 일이다. 만화수집가 오경수가 지인의 소개로 조치원의 작품을 구매하고자 집을 방문하게 됐다. 화곡동 집은 30~40평의 단독주택이었는데 마당과 장독대 위까지 죄다 풀로 덮여있었다. 마루는 온통 먼지에 거미줄이어서 하나도 돌보지 않은 것이 틀림없었다. 방 하나만 만화 관련된 물건들이 남아있었다. 마당은 시체가 둘쯤은 파묻혀 있을 것만 같았다. 어스름 한데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지 : 조치운으로 발표된 <마의 13일> 표지 이미지
혼자 살고 있던 조치원은, 오경수의 눈으로 볼 때, 세상물정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 전혀 흥정 같은 것을 하려 하지도 않았고 직선적이었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며칠에 한 번씩 응답이 올 뿐이었다. 사람을 사귀는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조치원은 자신의 공포만화처럼 살았다. 그의 말년을 아는 사람은 없다. 5~6년 전 세상을 떴다는 소문이 돌 뿐이다. 이 역시 조치원적이다. 그는 ‘귀신 만화가’라는 사회적 시선과 검열 속에서 생긴 감정을 밖으로 풀어내지 않고 자신의 마음 안쪽에 봉인하고 살았던 것 같다.
한국의 괴기만화는 1980년대 이두호의 <머털도사> 등으로 간간이 명맥을 유지했지만 1960년대, 70년대 부활하지 못하고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미신타파를 주도한 군사정권과 종교계의 사냥으로 인해 대중문화의 한 축으로 꽃을 피우지 못했다. 한국의 옛날이야기나 괴기 소재들이 그 시기 우리사회에 자연스럽게 수용됐더라면 지금쯤 한류를 타고 멋진 판타지로 다시 태어났을 것이다.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열광하면서도 우리 스스로 전통문화를 ‘전설의 고향’ 수준으로 폄하하는 한, 우리는 반쪽짜리 한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