쥘 베른이 1865년 발표한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에서 주인공 바비케인 회장은 미국 남북 전쟁이 끝나는 바람에 무기 개발과 애호의 명분을 잃고 무기력한 생활에 빠진 ‘대포 클럽’ 회원들을 모아놓고 중대 발표를 한다.
“나는 정확하게 겨냥된 포탄이 초속 12킬로미터의 초속도로 날아가면 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존경하는 동지 여러분, 나는 그 작은 실험을 해보자고 정중하게 제안하는 바입니다!”
<지구에서 달까지>는 인류가 달에 가고자 하는 꿈을 믿거나 말거나 식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과연 ‘1865년 작이 맞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과학적 디테일을 뒷받침하고 있다. 쥘 베른 이전에 인간을 우주에 보내는 문제에 탄도학이란 과학을 체계적으로 응용한 작가는 없었다. 주인공들이 이 문제에 관해 주고받는 대화다. “달에 도착한다 해도 실제로는 추락하는 건데, 그 점은 어떻소?”
“달의 인력은 지구의 6분의 1밖에 안 되니까, 지구에 추락할 때보다 속도가 6분의 1로 줄어들겠지요.”
“하지만 그래도 몸이 유리처럼 부서질 텐데?”
“제때에 로켓을 역분사해서 추락 속도를 늦추면 되지 않겠습니까?” <지구 속 여행>, <해저 2만리>, <달나라 모험> 등을 쓴 쥘 베른은 시대를 앞서간 상상력과 과학적 예언만으로 위대함을 평가받은 것이 아니다. <지구에서 달까지>는 인류의 폭력적 성향에 대한 풍자이기도 했다. ‘용기의 증거’로 목발, 의족, 의수, 손목을 대신한 쇠갈고리, 고무턱, 은제 두개골, 백금 코 등을 달고 있는 대포 클럽 회원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우주적 규모의 사격 훈련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천박함을 보여준다. 쥘 베른은 심지어 로켓 발사로 인해 빚어질 수 있는 지구 환경의 파괴까지도 걱정했다.
이 선구자적 상상력은 1977년 발사된 보이저 1호가 태양계 끝의 새로운 영역에 진입하는 등의 우주 탐사로 현실화됐다. 1969년 미국 아폴로 8호의 선장인 우주비행사 프랭크 보먼은 쥘 베른의 손자에게 ‘우리의 우주선은 바비케인(<지구에서 달까지>의 주인공)의 우주선과 마찬가지로 플로리다에서 발사되어... 태평양의 착수 지점은 소설에 나온 지점에서 겨우 4킬로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쥘 베른의 작품은 이후로 모든 우주 과학자나 여행자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됐다. 인류가 우주를 꿈꾼 것은 훨씬 더 오래전의 일이다. 1630년경 헤어포드의 주교 프란시스 고드윈은 <달세계의 인간>이란 소설에서 주인공 곤잘레스가 오리가 끄는 마차를 타고 우주로 여행을 가서 지구인과 비슷한 달세계의 지식을 만나는 모습을 그렸다.
이미지 : 3차 발사 당시 성공적으로 올라가고 있는 나로호.
우주에 가고자 하는 인류의 꿈이 본격화된 시기가 1960년대~70년대였다. 인류가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올리고 소련의 개 라이카가 스푸트니크 2호를 타고 지구를 돈 시점이 1957년이지만 인류가 최초의 우주비행을 한 것은 1961년이기 때문이다. 소련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이 ‘최초의 우주인’에 이름을 올리자, 1962년 미국 우주비행사 존 글렌이 그 뒤를 따랐다. 1963년 소련의 발렌티나 테레스코바가 최초의 여자 우주인이 됐고, 1969년 닐 암스트롱이 최초로 달을 밟았다. 이 시기는 인류가 과학 기술을 바탕으로 과거에는 상상하지 못한 꿈을 현실화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웃 일본은 1950년대 등장해 60년대 TV애니메이션으로 폭발적 인기를 모은 데즈카 오사무의 <철완 아톰>에서 과학적 영감을 받았다. 일본 과학자들은 어린 시절 보고 자란 <철완 아톰>을 현실화시킬 로봇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일본 오사카의 데즈카 오사무 박물관은 지금도 아톰이 깨어나는 퍼포먼스를 매일 일정 시간에 선보인다. 아톰의 존재는 일본 어린이들에겐 세대를 뛰어넘는 꿈이 되고 있다. 6.25의 상흔이 가신 지 채 10년도 안된 대한민국으로선 미국이나 소련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꿈같은 이야기처럼 들렸지만 그 사건들은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기에 충분했다. 문단이 1960년대 중반 박종화의 <월탄 삼국지>에 휩쓸리며 복고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만화는 어린이들에게 미래와 과학의 꿈을 심었다.
2013년 1월 30일 나로호가 3차 발사에 성공한 감격적 순간, 많은 만화 팬이 머리에 떠올린 작품은 김산호의 SF만화 <라이파이>였을 것이다. 1960년 5월 첫 권이 발행된 것으로 추정(현재까지 1권이 발견되지 않았음)되는 <라이파이>는 삐삐, 수륙양용 제비호, 홀로그램 등 당시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첨단 과학을 보여주며 어린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일본 것을 베낀 것이긴 했지만 이종진의 <철인 28호>도 같은 시기에 큰 인기를 얻었다. 우리 사회를 이끄는 1950년~55년생 과학자, 전자공학자, 의사들 중 상당수가 어린 시절 <라이파이>의 팬이었다고 ‘커밍 아웃’을 했다. 황창규, 진대제를 비롯해 나로호 프로젝트를 이끈 백홍렬(1953년생) 국방과학연구소 소장도 <라이파이>를 보고 과학의 꿈을 키웠다고 밝힌 바 있다.
인간의 수명이 100세를 바라보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인간이 100세까지 산다는 건 꿈이었다. 그걸 현실화시켜준 것은 진보를 거듭하고 있는 과학, 의학기술이다. 줄기세포, 복제, 성형 등의 대중화, 대량화를 예고한 만화 역시 이 시기에 등장했다. 바로 명랑만화의 대가 김경언의 <의사 까불이>였다.
<의사 까불이>가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었는지는 그 당시의 어린이가 아니면 체감하기 어렵다. 일본에선 요코야마 미츠테루가 만화로 돈을 긁어모아 ‘달러 박스’라는 별명을 얻었다면 그에 필적할 한국 만화가는 명랑만화의 대부 김경언이었다. <의사 까불이>는 1963년 9월 첫 권을 발표한 후 3년에 걸쳐 7부까지 이어진 당대의 밀리언셀러였다. 1부당 22권씩이었고, 확인된 분량만 130여 권에 이른다. 만화수집가 오경수는 아마 전체 출판권수가 150여권일 거라고 예상한다.
천재적 의학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동물병원 의사 까불이를 주인공으로 한 <의사 까불이>는 이틀에 한 권 꼴로 나왔다. 의사 까불이는 아이템을 내는 족족 돈을 벌어 부모님께 드리고 이웃을 돕는 일에 쓰는 명랑하고 훈훈한 소년이었다. 이 같은 가공할 속도는 신동우, 고우영과 함께 한국 역대 만화가 3대 속필에 속하는 김경언이 아니면 감히 상상하지 못할 공정이었다. 문제는 다음 권이 더 재미있다는 점이었다. 한 번 터지면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의미로 그는 ‘명랑만화의 화약고’로 불렸다. 김경언은 언제, 어디서나 스케치북을 가지고 다니며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사정없이 그렸다. 이재학, 이우언, 김삼 등이 그의 제자였고, 길창덕, 신문수, 윤승운 등은 신의 경지에 이른 것 같은 김경언의 손놀림을 멀찍이서 부러워하며 지켜보는 후배들이었다. 재미있는데다 이틀에 한 권씩 뽑아내는 <의사 까불이>와 경쟁할 수 있는 작품은 별로 없었다. 이화춘이 타계 전 증언한 바에 따르면 김경언의 작품이 당시 만화 전체 판매량의 1/3을 차지했다고 한다. 김경언은 1963년부터 ‘경인’이란 필명도 사용했다. <의사 까불이>의 상당 분량이 표지에 ‘경인’이란 필명으로 발표됐다.
김경언은 전작인 <칠성이>에서 이미 두각을 나타냈다. 1956년 만화세계에서 연재한 <칠성이> 시리즈는 1958년도부터 300권 이상의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머리가 잘 돌아간 그는 ‘칠성이 유격대’ ‘칠성이 검사’ ‘칠성이 일등병’ ‘칠성이 대통령’까지 모든 직업을 망라하며 칠성이를 등장시키는 스핀 오프를 감행했다.
<칠성이> <의사 까불이>가 오학운이 운영하는 부엉이문고에서 나오게 된 사연은 드라마틱하다. 오학운은 눈이 수북이 쌓인 1950년대 말 어느 겨울 새벽 김경언의 집을 찾아갔다. 그는 돈다발을 내놓고 “선생님의 책을 제게 주십시오. 이게 저의 총 재산입니다”라며 김경언에게 엎드려 절했다고 한다. 부엉이문고는 <칠성이>의 김경언과 <라이파이>의 김산호, 투톱을 내세워 만화계의 메이저출판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와 연결되는 일화도 있다. 1960년대 후반 오학운이 엄청난 재력가 되어 만화가들을 박정하게 대했다. 김경언이 오학운을 불러 “당신이 누구 때문이 이렇게 됐는데...”라며 꾸짖었고, 오학운이 만화가들에게 사죄했다. 오학운도 부를 안겨준 김경언에겐 꼼짝도 못했다.
김경언은 화장실에 갈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빴다. 아내가 2층 작업실에 요강을 가져다줄 정도였다.
이미지 : <의사 까불이> 표지 이미지
그는 대단한 이야기꾼이었다. 하나의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슬며시 다른 이야기로 이어졌다. <의사 까불이>는 온갖 기발한 의학 아이디어로 아이들을 공상의 세계로 몰고 갔다. 까불이의 발명품들은 그 당시로는 최첨단이며, 오늘에서야 이루어지고 있는 것들이다. <의사 까불이> 1부 11권의 ‘뜻뜻피부약’. 까불이는 개 발바닥은 얼음판도 잘 견딘다는 점에 착안해 이 약을 개발한다. 이 약의 소재는 개 발바닥에서 추출한 성분이다. 이 주사를 맞은 사람들은 추운 겨울에도 끄떡없게 되지만 피부에 개처럼 두꺼운 무늬가 생기는 부작용을 겪는다. 항의를 받은 까불이는 다음 권에서 ‘깜쪽주사약’을 개발해 피해자들의 피부를 정상으로 돌려놓는다.
까불이의 아이디어는 예측불허다. 1부 13권에서 동물원의 코뿔소 한 마리가 죽는다. 이 사실을 안 까불이는 시골에서 황소를 산 후 코뿔소의 뿔을 잘라서 황소에 붙인다. 까불이는 이 수술을 받는 황소를 희귀동물로 동물원에 다시 판다. ‘퉁퉁약’도 신기하다. 이 약을 주사한 도마뱀은 악어가 된다. 까불이는 이 악어의 가죽을 팔아 돈을 번다. 고양이 역시 호랑이로 만들 수 있는 주사약이다.
까불이는 성형 수술도 깜짝 같이 한다. 까불이가 승진을 위해 해외 도피한 범인을 잡고자 하는 경찰의 얼굴을 감쪽같이 성형 수술한 덕에 범인은 체포된다. 김경언은 여기서 새로운 에피소드를 만들어낸다. 범인이 국내로 가져온 공작 한 마리를 발견한 까불이는 공작의 성장 호르몬을 추출해 약을 만든 후 일반 닭에게 주사한다. 닭은 멋진 깃털을 뽐내는 ‘공작닭’이 된다. 까불이는 이 공작닭을 대량생산해 큰돈을 번다. 까불이는 점점 원대한 포부를 펼쳐나간다. 미국 장성을 치료해주고 등에 진료소를 얹은 개인 비행기를 선물로 받는다. 그 비행기를 타고 온갖 섬을 다니며 치료하고 아프리카까지 진출해 식인종도 고쳐준다. <의사 까불이>는 황당한 모험만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호르몬’ ‘플랑크톤’같은 과학, 의학 지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플랑크톤’을 설명하면서 ‘야광충’ ‘볼복스’ ‘방사충’ 등 세부적인 부분까지 그림과 곁들여 보여준다. 김경언은 쥘 베른처럼 과학, 의학 지식을 섭렵한 작가였다. 6.25 때 이북에서 내려와 서울대 생물학과를 졸업한 그는 고등학교에서 잠시 생물 선생으로 일했다. 형은 서울대 의대 학장을 지냈다. 그런 그가 군대에서 신동헌을 만나 만화계에 투신하고 딱지만화를 그리면서 주목할 만한 작가로 성장한 것이다. 그는 1955년 경향신문의 4칸 시사만화 〈두꺼비〉연재를 시작으로 조선일보, 연합신문, 서울신문 등에〈꾀동이>〈고구마〉〈깔끔이>〈어수선〉〈사공선생〉등을 연재했고, 야담, 아리랑 같은 잡지 연재도 싹쓸이했다. 가는 곳마다 연재를 낚아챈다고 ‘문어다리’로 불렸다.
그는 명랑만화의 자유분방한 형식을 잘 이해했다. 그래서 만화 속에 ‘언 아저씨’란 캐릭터로 자신을 자주 등장시켰다. 언 아저씨는 만화 속 주인공과 잘 어울렸다. 고우영이나 길창덕이 김경언에게 많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타고난 이야기꾼에 과학, 의학 지식까지 겸비한 1960년대의 보기 드문 작가가 김경언이었다. 의학만화라 할 수 있는 <의사 까불이>는 지금의 과학자, 의사들에게 많은 아이디어를 던져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의사 까불이>가 중요한 것은 당시 어린이들에겐 ‘제2의 교과서’였다는 점이다. 교과서에는 넣을 수 없는 황당무계한 상상력이 이 만화 속에 가득 들어있었다. 게다가 김경언의 만화는 이미 글로벌했다. 까불이의 무대는 한국이 아니라 지구 전체였다.
김경언은 1970년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한국 만화가 중 가장 돈을 많이 번 작가였지만 미국에서의 삶은 어려움이 많았던 것 같다. 친척에게 사기당해 재산을 잃기도 하고, 말년엔 지병인 중풍으로 고생했다.
서울대 인류학과 전경수 교수는 “김경언의 만화는 어린 시절 내 마음을 빼앗았던 책이다. 이불 뒤집어쓰고 보던 책이다. 우리 시대를 포함하는 유물”이라고 고백했다.
<의사 까불이>는 수명 연장과 의학 기술의 발전이라는 인류의 꿈을 담아낸 만화다. 전 교수의 말대로 ‘유물’이면서 아직도 실현되지 않은 우리의 꿈이다. 만약 삼성이나 현대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미래 신동력 사업을 찾고 있다면 꼭 이 만화를 보라고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