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이 존재론적 물음은 소포클레스의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서부터 시작해 마블코믹스의 만화 <엑스맨>에서 되살아난다. 고대의 신화적 인물과 미국의 만화 주인공이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건 우연일까?
의아할 건 없다. 슈퍼히어로 만화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미국 대중문화가 인위적으로 창조한 신화이기 때문이다. 슈퍼히어로 만화에 대해 여러 가지 시각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장르를 현대의 신화로 본다. 역사가 긴 나라들은 고유한 영웅 신화를 가지고 있지만 미국은 그런 신화를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1938년 6월 《액션 코믹스》 제1호에서 슈퍼맨을 처음 등장시키며 슈퍼히어로 이야기를 시작했고 큰 호응을 받았다.
신화란 사람들에게 세계와 인간의 기원을 설명하는, 반대로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는 체계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 그것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 후세 사람들의 상상력이 더해서 아주 근사한 이야기나 인물이 된다. 중국 위, 촉, 오 삼국시대에 평범한 무장의 한 사람이었던 관우가 죽은 후 ‘관공(關公)’으로 높여 불리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관왕’, ‘관제’, ‘관성제군(關聖帝君)’으로 점점 격상된 걸 보면 알 수 있다. 중국 역사에서 공자와 함께 신으로 승격된 관우를 모시는 관제묘가 전 세계에 퍼져있을 뿐 아니라 한국에는 관우를 민간신앙으로 종교화한 관성교(關聖敎)까지 있다.
신화라는 건 21세기의 현대인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다. 키네틱 아티스트(움직이는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인 최우람은 지난해 11월 현대갤러리에서 라틴어로 숨구멍의 수호자라는 뜻의 괴생명체 ‘쿠스토스 카붐’을 전시했다. 3.6m의 거대한 이 금속 생명체는 등 쪽에 곰팡이 포자가 촉수처럼 위로 뻗어 있고 몸체는 바다사자 같은 모양이다. 그냥 싸늘한 금속 덩어리가 아니라 컴퓨터로 제어되며 모터를 달고 꿈틀거린다. 기계라는 편견만 걷어낸다면 생명체로 인정 안 할 수가 없다. 작가는 이 기계 생명체에 대해 다음과 같은 탄생 설화를 붙였다.
“아주 오래전 두 개의 세계가 있었다. 두 세계는 작은 구멍들로 서로 연결돼 있었고, 마치 숨쉬듯 서로 통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구멍들은 자꾸 닫히려는 성질이 있어 각각의 구멍 옆에는 늘 구멍을 지키는 수호자가 하나씩 있었다. 쿠스토스 카붐(Custos Cavum)이라 불리던 이 수호자는 바다사자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늘 구멍이 막히지 않도록 커다란 앞니로 구멍을 갉았다.”
왜 이 같은 생명체가 탄생했을까? 작가는 과학의 힘을 빌어 새로운 신화를 만드는 데 도전했다. 쿠스토스 카붐이 지금부터 1000년 후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지옥을 지키는 개인 케르베로스와 같은 존재가 되지 말란 법이 어디 있는가? 인간은 스스로 신화를 만드는 존재란 걸 알 수 있다. ※ 이미지 소개 : 현대 미술가가 제작한 신화적 기계 동물 쿠스토스 카붐. 갤러리현대 제공
1960년대 초는 슈퍼히어로 역사에서 의미 있는 두 영웅이 나타난 시기다. 각각 1962년과 1963년 첫 선을 보인 마블코믹스의 <토르>와 <엑스맨>이다. 물론 슈퍼히어로의 인기는 1930년대 말 등장한 <슈퍼맨>과 <배트맨>이 끌어왔다. 그러나 ‘토르’와 ‘엑스맨’은 좀 더 인간이 신화시대의 전설에 다가간, 혹은 신화에 바탕을 둔 주인공이다.
미국 슈퍼히어로들 상당수는 복면을 쓰고 정체를 감춘 채 이중생활을 한다. 마크 웨이드가 쓴 <슈퍼히어로 미국을 말하다>에선 그런 슈퍼히어로의 목록을 정리하고 있다.
영웅신분 | 일상생활 속 신분 |
아쿠아맨 | 아서 커리 오린 |
배트맨 | 브루스 웨인 |
블랙 카나리 | 다이나 드레이크 |
캡틴 아메리카 | 스티브 로저스 |
캡틴 마블 | 빌리 뱃슨 |
데어데블 | 매트 머독 |
플래시 | 배리 앨런 |
그린 애로우 | 올리버 퀸 |
그린 랜턴 | 할 조던 |
호크맨 | 카터 할 |
헐크 | 브루스 배너 |
인비저블 걸 | 수 스톰 |
아이언 맨 | 토니 스타크 |
미스터 판타스틱 | 리드 리처즈 |
스파이더맨 | 피터 파커 |
슈퍼맨 | 클라크 켄트 |
원더우먼 | 다이애나 프린스 |
‘복면 쓴 이중생활자’들의 키워드는 ‘선택’이다. 그들은 기존 정체성 이외에 또 다른 정체성을 만들어 스스로 ‘투잡’을 뛴다. 애초부터 아무도 그들에게 투잡을 뛰라고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에 급급한 피터 파커에게 왜 슈퍼히어로가 되어 사람을 구하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어찌 보면 상당히 부지런한 족속들이다. 샌드맨, 베놈, 해리 세 명의 적과 싸우는 영화 <스파이더맨3>에서 스파이더맨은 ‘누구나 상황의 핑계를 댈 수 있지만 선택의 문제다. 유혹을 끊어내는 것도 선택이다’라고 생각한다.
토르와 엑스맨은 이들과는 다소 다르다. 복면을 뒤집어쓰거나 이중생활을 위해 좌충우돌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온몸으로 세상과 맞닥뜨린다. 그러기에 세상과 직접 부딪히는 부분은 쓰라리고 아프다.
사실 북유럽 신화의 천둥 신 토르는 마블코믹스의 작가 스탠 리가 헐크보다 더 강한 주인공을 창조하기 위해 찾아낸 캐릭터다. 그는 아스가르드 최고의 신 오딘의 아들로 질서를 수호하며 큰 체구에 붉은 수염, 엄청난 식욕, 불같이 흥분하는 성격을 가졌다. 던지기만 하면 반드시 적을 쓰러뜨리고 돌아온다는 마법의 망치 ‘묠니르’를 들고 거인족과 싸웠다. 마블코믹스의 만화에서 토르는 뿔이 난 투구를 쓰고 묠니르를 휘두르며 헤라클레스와 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영화 <어벤져스>에서도 그는 물, 불을 가리지 않는 ‘과격파’로 웃음을 주었다.
※ 이미지 소개 : 막강하게 무장한 채 서 있는 천둥의 신 토르. 마블코믹스 제공
<엑스맨>은 좀 더 특이하다. 1963년 9월 돌연변이 팀을 다룬 이 만화가 등장했을 때 큰 반향은 없었다. <엑스맨>의 비밀 특수학교 교장은 휠체어를 타고 있지만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텔레파시 능력을 가진 찰스 재비어 교수였다. 일명 ‘프로페서 X였다. 재비어는 자신의 신입생들을 ’엑스맨‘이라고 불렀다. 몸 속의 X 유전자 때문에 돌연변이 능력이 발현되기 때문이다. 초기 엑스맨 팀은 ’아케인절‘, ’아이스맨‘, ’마블 걸‘, ’사이클롭스‘, ’비스트‘로 이루어져 있었다. <엑스맨>은 매달 인간과 돌연변이 인간 사이에 인종 전쟁이 벌어진 듯한 사건으로 40년 이상 연재됐다.
<엑스맨>의 진짜 역사는 1970년대에 쓰였다. 마블코믹스는 1975년 5월 새롭고 전혀 다른 엑스맨들을 주인공으로 한 <자이언트 사이즈 엑스맨> 제1호를 내놓았다. 원래 팀원 중에서는 프로페서 X와 사이클롭스만 들어갔다. 이들은 다섯 명의 새로운 엑스맨들과 함께 일하게 됐다. 날씨를 통제하는 능력을 가진 흑인 여성 ‘스톰’, 몸을 강철로 바꿀 수 있는 러시아인 ‘콜로서스’, 텔레포트 능력을 가진 파란 얼굴의 ‘나이트 크롤러’, 하늘을 나는 능력이 있는 아메리카 원주민 ‘선더버드’, 금속 손톱을 지닌 캐나다 비밀 요원 ‘울버린’이 그 주인공이었다. 특히 울버린의 등장으로 <엑스맨>은 큰 인기를 얻게 됐다. 기억을 모두 지워버리는 수상한 의료 실험의 희생자가 돼 큰 고통을 겪는 울버린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장면은 영화 <엑스맨2>에서 잘 드러난다. ※ 이미지 소개 : 손에서 튀어나온 칼날을 세우고 있는 엑스맨 집단 속 울버린. 마블코믹스 제공
울버린의 등장으로 <엑스맨>은 개인의 내면세계로 보다 깊이 있게 들어간다. 울버린은 처음에는 재비어 교수와 돌연변이 집단을 돕는데 별 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슈퍼히어로 미국을 말하다>는 ‘그(울버린)에겐 개인적인 문제만이 중요했다. 영화 <엑스맨> 초반부에서 울버린은 선한 일을 한다든가 선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 따라 움직이기보다 오히려 마음속 분노에 이끌려 움직인다. 그러나 재비어 교수가 조직한 공동체의 일원이 됨에 따라 울버린은 점차 그들과 그들의 주장에 관심을 둔다’고 지적한다.
돌연변이로 살아가는 고통은 아마도 당사자가 아니라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고통은 진정한 자신을 찾고자 모험을 시작한 젊은 오이디푸스와 맞닿아 있을 뿐만 아니라 김원빈의 만화 <주먹대장>과도 연결돼 있다. 엄청나게 큰 오른쪽 주먹을 갖고 태어난 ‘주먹대장’은 오이디푸스나 울버린처럼 남들과 다른 신체, 정체성 때문에 끊임없이 고민한다. <주먹대장>이 ‘그림과 캐릭터가 뛰어난 만화’가 아니라 ‘김산호의 <라이파이>에 앞선 한국 슈퍼히어로 만화의 효시’로 재조명 받아야 하는 이유다. ※ 이미지 소개 : 주먹대장과 똑같은 포즈를 해보이고 있는 만화가 김원빈. 일간스포츠 장상용 제공
<주먹대장>은 1958년, 1964년, 1975년, 1992년 4차례에 걸쳐 개작된 명작이다. 이 작품은 대단히 신화적이다. ‘한쪽 주먹이 큰 아이’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설화인 아기장수 설화를 연상시킨다. 아기장수는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거나 몸에 비늘이 있거나 알에서 태어나는 등 비범하게 탄생한다. 그러나 아기장수는 조선사회에서 나라를 뒤엎을 ‘위험인물’로 간주돼 부모나 사회에 의해 제거되는 비운의 인물로 그려진다. 김원빈은 <주먹대장>의 탄생 동기에 대해 “어릴 적 할머님한테 들은 옛날이야기와 전설, 전래동화 같은 것들이 잠재적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주먹대장>이야말로 김원빈이 1958년 창조한 한국적 신화다.
<주먹대장> 1964년판(1968년 재판 발행)이 서사 구조면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주먹대장의 원형에 가깝다. 김원빈은 주먹대장이 탄생 때부터 얼마나 대단한 지 만화적으로 표현했다. 주먹대장이 태어나자마자 우는 대목인데 1964년판보다는 1975년판이 더 재미있다. 태산준령 산아래 마을에서 주막을 찾던 나그네가 주먹대장의 울음소리에 놀라는 대목을 두고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마어마한 소리였다. 여섯 자나 솟아올랐던 나그네가 졸도했다’고. ‘때마침 지붕 위를 지나던 까마귀 삼형제가 가엾게도... 까무러쳐 떨어졌다’고 덧붙인다.
※ 이미지 소개 : 주먹대장 이미지
오른쪽 주먹이 비정상적으로 큰 주먹대장은 어린 시절부터 마을 사람들에게 ‘병신’으로 기피대상이 된다. 주먹대장은 자신이 동네 꼬마들과 어울릴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화자는 ‘주먹이 크다고 병신으로 몰린 것이다. 병신이 태어나면 재앙이 내린다는 미신이 주먹을 외롭게 만든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동네 꼬마들이 놀리느라 산돼지를 잡아오면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하자 주먹대장은 진짜로 산돼지를 끌고 내려온다. 황소도 한 주먹에 제압해 버린다.
오른쪽 주먹이 비정상적으로 큰 주먹대장은 어린 시절부터 마을 사람들에게 ‘병신’으로 기피대상이 된다. 주먹대장은 자신이 동네 꼬마들과 어울릴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화자는 ‘주먹이 크다고 병신으로 몰린 것이다. 병신이 태어나면 재앙이 내린다는 미신이 주먹을 외롭게 만든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동네 꼬마들이 놀리느라 산돼지를 잡아오면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하자 주먹대장은 진짜로 산돼지를 끌고 내려온다. 황소도 한 주먹에 제압해 버린다. 1964년판에서 아버지인 박 첨지는 고민 끝에 주먹대장을 산에 갖다버렸다가 학선선인을 만난다. 학선선인은 “지금 있는 동네에서는 절대로 잘 될 수가 없는 분이요. 또 하나는 황금과는 상극이 되어 있으니 금을 조심해야겠소. 황금으로 인해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당하겠소. 세 번째는 장차 나와 만나게 될 것이오”라고 예언한다. 그는 주먹대장이 비정상적 괴물이 아니며 남과의 다름에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일깨워준다. 학선선인의 말은 크립튼 운석이 슈퍼맨의 약점이듯 황금이 주먹대장에게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는 작품적 설정이기도 하다. 김원빈은 어린이들에게 황금만능주의에 대한 경고를 자연스럽게 던진다.
주먹대장은 발이 유달리 큰 ‘맨발장군’과의 만남에서 “이 주먹 때문에 괴로움을 많이 받았어. 그러나 꾹 참아왔지”라고 고백한다. 맨발장군 역시 큰 발 때문에 부모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다.
주먹대장에겐 두 종류의 추격자가 달라붙는다. 추골탕 같은 괴력의 사나이는 주먹대장을 꺾고 싶은 욕망에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다니는 대형 무쇠봉은 주먹대장의 주먹에 맞아 엿가락처럼 찌그러진다. 전갈검사처럼 무예로 출세하고자 하는 사나이는 주먹대장을 자신의 부하로 만들고 싶어 한다. 주먹대장은 오직 자신이 누구이며 왜 이런 일을 겪어야 아는지 묻기 위해 학선선인을 찾아 모험을 시작한다. 이 신화적 인물은 <엑스맨>의 울버린과 유독 닮아 보인다. 주먹대장은 돌연변이로서 항상 남과 다르고 차별 받는다. 다름은 ‘평범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정체성에 혼란을 가질 수밖에 없다. 자기가 선택해 복면을 뒤집어쓴 것도 아니다. 엑스맨들은 선한 삶을 살고자 하며 이를 실천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힘쓴 데 대한 보답으로 돌아오는 것은 두려움, 박해, 증오심 등이다. 그것을 극복하고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성숙함이 주먹대장이나 울버린에게 요구된다. 그것을 억울함 그대로 사회로 돌려준다면 <엑스맨>에서 재비어 교수와는 완전히 반대 입장인 매그니토 같은 악당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신화적 인물은 <엑스맨>의 울버린과 유독 닮아 보인다. 주먹대장은 돌연변이로서 항상 남과 다르고 차별 받는다. 다름은 ‘평범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정체성에 혼란을 가질 수밖에 없다. 자기가 선택해 복면을 뒤집어쓴 것도 아니다. 엑스맨들은 선한 삶을 살고자 하며 이를 실천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힘쓴 데 대한 보답으로 돌아오는 것은 두려움, 박해, 증오심 등이다. 그것을 극복하고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성숙함이 주먹대장이나 울버린에게 요구된다. 그것을 억울함 그대로 사회로 돌려준다면 <엑스맨>에서 재비어 교수와는 완전히 반대 입장인 매그니토 같은 악당이 될 수밖에 없다. 주먹대장의 무기는 강철보다도 강한 오른손 주먹이다. 울버린의 경우 화 나면 팔에 숨겨져 있던 긴 손톱이 주먹 정권에서 솟아 나온다. 팔이나 주먹을 무기로 한다는 점에서 둘은 친척인 셈인다. 주먹대장의 양주먹이 모두 컸다면 어떠했을까? 김원빈은 이 점도 세심하게 검토했지만 양주먹의 주먹대장을 폐기했다. 주먹대장 캐릭터의 참맛은 비대칭의 매력이다. 김원빈도 양주먹 캐릭터를 잡아보았지만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느꼈다. 감정의 기복에 따라 주먹과 힘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구상도 있었지만 현실화되지 않았다. 주먹대장의 오른주먹은 나름 최적화된 슈퍼히어로의 전투 메커니즘이다.
<주먹대장>이 <엑스맨>과 겹쳐 보이는 또 다른 이유는 돌연변이가 주먹대장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기형적으로 큰 발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게 된 맨발장군 역시 대단한 돌연변이 슈퍼히어로다. 축지법을 사용하는 그는 열길 이상 뛰어오를 수 있는 가공할 점프력과 바위도 산산조각 낼 수 있는 킥력을 가지고 있다. 축구공을 차는 발동작이 아니라 공중으로 점프한 후 발바닥과 발꿈치로 찍는 독특한 방식이다. 돌변변이는 아니지만 박치기왕 까꾸는 머리로 돌을 쉽게 부수는 작은 괴인이다. <주먹대장>에는 많은 신화적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이들이 일종의 돌연변이다. 임금이 포획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황백호’는 이 땅에서 호랑이로 살아가지만 실은 죄를 지어 지상으로 쫓겨난 하늘나라의 선녀다. 지상의 남자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받아야 하늘로 다시 올라갈 수 있다. ‘굉풍 삼도사’(백풍귀, 흑풍귀, 청풍귀)는 백두산에 숨겨둔 보물을 찾기 위해 중국에서 건너온 도술형제다. 이 셋은 천둥번개와 불바람을 자유자재로 부린다. 주먹대장의 단짝친구인 ‘란’은 정체불명의 괴녀 ‘마귀할멈’ 손에서 자라 요술에 아주 능한 장난꾸러기 소녀다. 랑의 요술로 주먹대장의 오른손이 몇 배로 커지기도 한다. ‘마귀할멈’의 장풍도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쇠를 먹어치운다는 괴물 ‘불가사리’는 <주먹대장>에서 전신이 용이었다고 밝혀진다. 아기장수 설화에 빚진 <주먹대장>은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신화적 성격이 강화됐다. 이 지점에선 신들의 초능력이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토르>와 만나게 된다.
※ 이미지 소개 : 주먹대장 이미지
주먹대장 캐릭터가 할리우드에서 첫 눈에 슈퍼히어로로 받아들여지는 건 자연스럽다. 주먹대장을 영화·드라마·애니메이션화 하려는 시도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CG를 전문으로 하는 영화 제작사 모팩이 2014·15년을 목표로 주먹대장의 할리우드 진출을 추진하고 있다. 10년 전 원작자와 영화 판권 계약을 맺었고, 계약을 두 차례 연장했다. 장성호 모팩 대표는 "할리우드에선 주먹대장 캐릭터를 대단히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원작 캐릭터의 완성도가 워낙 훌륭해 애니메이션으로 그대로 해도 문제가 없다. 김원빈 선생은 원작 캐릭터를 훼손하지 않는 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말한다.
<주먹대장>과 <토르>, <엑스맨>은 잠시 반짝이지 않고 1960년대~70년대를 함께 가로질렀다. 이 작품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신화적 물음을 던지며 시대정신을 건드리거나 끌어냈다. <토르>의 경우 엄청난 힘을 가진 슈퍼히어로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제작됐지만 신들은 인간이란 존재의 모델이며 근원이란 점을 다시 한 번 일깨웠다. 미국에선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집단의 광기에서 벗어나 개인의 내면과 자유를 갈망하는 경향이 커졌다. <엑스맨>은 소수자들의 피해 의식도 담고 있다.
<토르>와 <엑스맨>을 통합한 듯 보이는 <주먹대장>이 두 작품에 앞서 발표됐다는 건 상당한 의미가 있다. 당시 한국 사회는 대가족과 집단주의 문화가 강했고 개인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개인을 말한다는 것은 이기적이거나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주먹대장>의 주인공은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고, 누구인가’라고 스스로 묻는다. <주먹대장>은 단순히 출생의 비밀을 묻는 작품이 아니다. 텍스트에 신화적 요소를 강하게 끌어들이면서도 개인의 근원을 깊이 추구한다. 바로 <주먹대장> 자체가 시대의 돌연변이다. 남과 다른 주인공이 자신을 알기 위해 떠나는 모험담은 슈퍼히어로의 형태를 띠면서 근원을 물음으로 시대를 앞서갔다. <주먹대장>은 김원빈이란 작가보다 더 유명한 작품이 되고 말았다.
작가가 한 작품을 30년 이상 네 차례에 걸쳐 개작을 하며 발전시켜 나갔다는 것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김원빈이 돈을 벌기 위해 잘 팔린 작품을 계속 우려먹은 것일까? 주먹대장의 모험은 1975년부터 1983년까지 어깨동무에서 연재를 마칠 때도 미완성으로 끝났다. 스토리는 원래 작가가 구상한 것의 1/10도 채우지 못한 채 중단됐다. 1990년대에도 새로운 스토리를 더 진행시키지 못했다. 김원빈이 <주먹대장>에 매달린 심리적 이유는 그의 가족사에서 어렴풋이 드러난다. 1935년 3월 14일 중국 하얼빈에서 태어난 김원빈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많이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출장을 한 번 떠나면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려야 할 정도로 오랜만에 나타났다. 그는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도 8.15 이후에 알았다. 불행하게도 그의 아버지는 김홍일 장군이 심양에 세운 한국인처리사무소에서 일을 도왔는데 1946년 그 곳에서 정체불명의 인물에게 암살당했다. 11살의 어린 김원빈은 그해 말 아버지의 동지들과 함께 중국에서 일본을 거쳐 귀국했다. ‘그랬다더라’ 남들이 하는 말만 듣고 아버지의 정체도 제대로 모른 채 성장한 그에겐 근원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 남보다 훨씬 강하게 움트지 않았을까? 내성적인 김원빈은 창작 시기 대부분을 <주먹대장>을 그리며 그 물음을 가슴에서 놓지 않았던 것 같다.
평소 김원빈과 절친했던 만화가 이정문은 “그는 신비로운 인물이었다. 김원빈으로부터 언젠가 아버지가 독립운동 하다가 암살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자신도 아버지에 대해 잘 모른 게 확실하다. 그래서 주변에 아무 말도 안 한 것 같다”고 설명한다.
<주먹대장>은 김원빈에겐 에이하브 선장이 평생 뒤쫓았지만 잡을 수 없던 고래 모비딕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 대답은 2012년 12월 30일 강추위 속에서 홀로 잠든 김원빈만 알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