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표정이 안경 쓴 재수생 청년 같기도 하고, 동네 슈퍼가게 아저씨 같기도 하다. 2013년 국내 3대 사립미술관의 하나인 호림미술관 민화전시 ‘상상의 나라-민화여행’에서 만난 호랑이는 그렇게 다가왔다. 19세기 후반 작가 미상의 그 그림은 호랑이와 까치가 주인공이다. 17, 18세기의 호암미술관 소장품들에서도 호랑이 얼굴은 꼭 광대뼈 튀어나온 사람 같다. 사람을 잡아먹을 것 같이 무섭고 무시무시한 호랑이는 민화의 세계에선 출연 금지였던 것일까? 그림 속 호랑이 얼굴에 담뱃대만 물려주면 끝도 없이 구수한 옛이야기를 풀어놓을 것만 같다.
소나무 밑의 호랑이와 소나무 위의 까치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 보이는 종류의 민화는 ‘호작도(虎鵲圖)’로 불린다. ‘까치호랑이’로 더 유명한 이 그림은 대단히 한국적이다. 까치는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길조다. 중국에선 까치와 표범을 세트로 묶어 희보(喜報, 기쁜 소식)를 상징하는 ‘표작도(彪鵲圖)’가 유행했다. 중국 그림의 주인공은 호랑이가 아니라 표범이었다. 한자어 ‘보(報)’와 ‘표(彪)’의 중국어 발음이 바오(bao)로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보(喜報)’와 ‘희표(喜彪)’는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예로부터 호랑이는 한민족을 상징했다. 백두산 호랑이는 한민족의 가슴 속에서 언제나 민족의 혼으로 살아있었다. <표작도>가 우리나라로 건너오면서 한민족의 상징인 호랑이가 표범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대신했다. 제작자도, 손님도 까치의 친구로서 호랑이를 더 선호했다. 시장이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는가! 그런 흐름이 대세로 자리 잡으면서 우리나라 민화에선 <호작도>, 즉 ‘까치호랑이’로 바뀌었다.
원래 호랑이는 벽사(?邪)의 성격이 강해 부적에서도 많이 사용됐지만 까치의 단짝이 되면서 기쁜 소식을 함께 전하는 존재가 됐다. 까치는 신시베리아 문화권에서 작은 까마귀로서 하늘의 뜻을 전하는 사자 역할을 했다. 까치와 호랑이 그림은 까치가 하늘의 기쁜 소식을 땅에 있는 호랑이에게 전파하는 그림으로 보면 된다.
어미 호랑이가 새끼를 돌보는 그림인 명나라의 ‘유호도(乳虎圖)’ 혹은 ‘자모호도(子母虎圖)’가 우리나라에 전래되면서 민간에서 까치호랑이로 자리잡게 됐다는 시각도 있다. 까치호랑이에서 조선 후기의 평등의식을 엿볼 수 있다는 해석도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명나라 그림에선 호랑이가 독보적이며 소나무나 까치가 보조적일 뿐인데, 우리 민화에선 호랑이와 까치가 마주보며 대등한 차원에서 갈등의 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즉, 까치호랑이에서 호랑이는 거드름만 피우는 지배층이고, 까치는 힘없는 서민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지배자인 호랑이는 얼빠진 ‘바보 호랑이’의 모습으로 보는 사람에게 웃음을 준다. 조선 후기 박지원의 풍자소설 <호질>은 어떤 의미에서 민화의 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 허위나 위선을 벗겨내는 데도 호랑이가 앞장선다. ‘범은 이맛살을 찌푸리고 구역질하며 코를 싸쥐고 머리를 왼편으로 돌리며 “에퀴이 그 선비 구리도다” 한다’는 문장은 얼마나 통쾌한가. 백수의 왕이 ‘에퀴이 그 선비 구리도다’라고 하는데 감히 반박할 양반이 있었을까.
소나무 위의 까치 역시 호랑이를 전혀 두려움 없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호랑이를 바라보는 까치의 눈길은 때로 유쾌하기까지 하다. 이런 구도 속에서 지배층과 서민은 평등한 관계로 화합하게 된다. 중국에는 없는 우리 식의 명랑한 평등의식이다.
까치호랑이의 도상은 화원들의 그림인 <송호도(松虎圖)>에서 유래됐다. 그러나 그 표현만큼은 민화 특유의 과장되면서 해학이 넘치는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전 시기의 송호도 도상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동시에 세부 표현에서는 민화 특유의 과장이 들어있어 정형성을 탈피할 수 있게 된다. 정형 속에서 살짝 파격을 추구해 큰 효과를 내는 것이 우리 조상들 아니었던가? <까치호랑이>에서 가장 개성 넘치는 부분이 꼬리다. 물론 호랑이의 얼굴, 무늬, 몸동작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꼬리 모양만큼 제각각이지 않다. 호암미술관 소장 까치호랑이는 눈 사이의 간격이 넓어 약간 얼뜨기처럼 보이면서도 공중을 향해 꼬리를 ‘S자 형태로 쳐들고 있다. 그 꼬리는 호랑이 몸을 기준으로 소나무와 절묘하게 대칭을 이룬다. 꼬리 형태가 공간 처리나 전체적인 구도를 잡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호림미술관 소장 <까치호랑이>에선 호랑이 꼬리가 거의 우상향 직선으로 우측의 소나무와 큰 가지를 가로지르는 것처럼 보인다. 소나무를 비스듬히 양분하는 호랑이의 꼬리는 파격이면서 정적일 수 있는 그림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어떤 <까치호랑이>는 꼬리를 호랑이 배 밑으로 넣어 아래로 길게 빼낸다.
호랑이에 대한 우리민족의 사랑과 자부심은 조선 후기를 지나 일제강점기에도 변치 않았다.
육당 최남선은 1926년 동아일보를 통해 ‘호랑이는 조선의 신성한 동물’이라고 전제하면서 한국인에 있어 호랑이의 존재는 여타 동물과 격이 다름을 강조했다.
한문에서 如龍, 如虎, 如熊, 如魔 등 여러 가지 비유가 있지만, 조선어에야 ‘범 같은’ 무엇이라 하는 것이 유일 최고의 무용적 형용이 되었나니, 저 <적벽가>를 들어 내려다가다 ‘하북 명장 천하장사 범 같은 안량, 문추(원소가 거느린 두 명장)’란 구절에 이르러서 ‘범 같은’ 석 자에 정신이 번쩍 나고 어깨가 금시에 으쓱할 때에, 조선인의 생활 이상으로인 호랑이의 잠재의식이 어떻게 꿈틀하는가를 보게 되는 것이다... ‘범 같은’ 할 때에 옮기는 이나 듣는 이가 다같이 더할 나위없는 위맹을 느낌은 분명 조선인 특유의 또는 공통의 심기라.
또한 육당은 호랑이 이야기에 관한한, 그 풍부함에서 우리나라를 따라갈 나라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단언한다. 범 이야기만을 모아서 <천일야화> <태평광기> <데카메론> 등 이런 유의 책을 꾸밀 나라는 세계가 넓다 해도 오직 조선이 있을 뿐이다. 범 이야기 하나만 가지고 안데르센, 그림 형제 노릇이든지 다 할 것이다. 또 언제든지 이것의 실현을 볼 날도 있을 것이다.
최남선은 한민족의 정체성, 혼을 고조하기 위해 호랑이를 붙들었다. 우리가 타고난 호랑이의 기상만 잃지 않는다면 어떤 상황이든 두려울 게 없다는 강한 메시지다.
한반도에서 호랑이는 신성한 존재였다. 일본은 강점기 동안 치안과 개발을 이유로 한반도에서 호랑이를 몰살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한국의 산간오지까지 개발하려던 조선총독부는 호랑이를 방해물로 여기고 포수와 주민을 동원해 매년 호랑이 포획에 전력투구했다. 일본인 미야케 순사가 몰이꾼 수백명을 동원한 끝에 호랑이를 사살해 가죽을 일본 황족에게 헌상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1922년 경주 대덕산에서 잡힌 호랑이를 마지막으로 한반도에서 호랑이는 완전히 사라졌다.
일본의 야생 동물 관련 논픽션 작가인 엔도 기미오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조선총독부 자료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호랑이 97마리, 표범 624마리가 포획당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누락된 통계를 감안하면 실제 포획된 호랑이와 표범의 수는 그 두 배 이상으로 추정된다.
엔도는 2009년 한국을 방문해 “한국인들은 호랑이를 신성시하기 때문에 일본이 없었다면 멸종까지는 안 됐을 것이다. 일본인으로서 한국의 호랑이가 멸종된 것이 너무 부끄럽고 미안하다”고 밝혔다. 서울 도심의 인왕산까지도 쩌렁쩌렁 울리게 했던 호랑이 울음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됐다.
그 후로 한반도에서 자취를 감춘 호랑이를 회복할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6.25전쟁으로 한반도 전역이 폐허로 변했다. 호랑이의 영역 같은 건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1960년대, 70년대 독재의 시대가 찾아오고, 1980년대 명분 없는 쿠데타 정권이 정국을 장악하면서 한국 호랑이는 관심 밖으로 벗어났다.
독재와 민주화의 극한 갈등이 지속적일 수는 없었다. 민주화의 흐름은 대세였다. 전두환 정권의 뒤를 이은 군부세력이자 민정당 대표였던 노태우가 1987년 독재에 대한 반발이 심해지자 시국 수습방안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6.29선언을 발표했다. 군부세력에 의한 기만적 성격이 강했지만 어찌되었든 민주화는 전진했다.
1993년 김영삼이 노태우에게 정권을 이양 받으면서 민주화 요구는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한국형 민주주의를 토착화시키겠다며 ‘신한국창조’의 기치를 꺼내든 김영삼 정권은 1995년 금융실명제를 단행해 지하경제를 양지로 끌어냈다. 군부에 빌붙었던 재벌들이 금융실명제를 계기로 부정한 돈을 토해내야 했다.
그와 함께 억눌러 왔던 표현의 자유, 개인의 생각이나 감정을 공개적으로 말하고 싶은 욕구가 분출됐다. 이런 경향이 문예사조로 나타났다. 1992년 1집 <난 알아요>를 발표한 서태지와 아이들은 힙합과 록을 결합한 새로운 음악을 발표하며 대중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기성질서와 가치를 전복시켰다. 그들이 시대를 바라보는 시니컬한 시각은 1995년 발표된 <시대유감>이란 노래 속에 잘 담겨있다.
‘왜 기다려왔잖아 모든 삶을 포기하는 소리를 / 이 세상이 모두 미쳐버릴 일이 벌어질 것 같네 / 거 자식들 되게 시끄럽게 구네 그렇게 거만하기만 한 주제에 / 거짓된 너의 가식 때문에 너의 얼굴 가죽은 꿈틀거리고 / 나이든 유식한 어른들은 예쁜 인형을 들고 거리를 헤매 다니네....’
김영삼의 문민정부는 노태우의 북방외교를 계승하면서 신라 정통주의의 역사관을 벗어나 백제, 고구려와 발해의 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잃어버린 우리 땅인 고구려, 발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김영삼 정부는 러시아 사할린, 중국 연변 등을 아우르면서 해외 동포들을 받아들이는 정책을 폈다. 이러한 흐름은 김영삼 정부의 뒤를 이은 김대중 정부에서 간도 땅을 되찾고, 동북공정을 막고, 북한과 손잡는 정책으로 발전해갔다.
문민정부 하에서 일어난 또 다른 문예사조는 한민족의 정체성, 혼 찾기였다. 만화가 김진이 잡지 댕기에서 고구려 왕가를 재현한 역사만화 <바람의 나라>를 처음 선보인 시점이 1992년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1994년 발표한 <발해를 꿈꾸며>에도 그런 염원이 담겨있다. 우리민족의 뿌리 찾기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였다.
<라이파이>의 작가인 만몽 김산호는 1994년 <대쥬신제국사>(전 3권)를 펴내며 한민족의 뿌리 찾기에 온몸을 던졌다.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를 탐방하고 온 그는 한민족의 기원이 이 곳에서 비롯됐다는 확신을 가지고 거대한 화폭에 치우천황 등 고대의 사건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작업은 웅장하고 원초적이다.
“바이칼 호수의 마을을 방문했다. 그 곳 무당들이 사용하는 언어나 무구 등이 놀랄 정도로 우리의 것과 똑같다. 우리 민족이 그곳으로부터 이동해왔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한민족의 뿌리에 대한 그의 확신은 신라 눌지왕 때 박제상이 저술한 상고사 사서인 <부도지>를 따르고 있다. <부도지>에서
부도는 하늘의 뜻에 맞는 나라, 또는 그 나라의 서울이라는 뜻이다. 이 책은 1만 4000년 전 발원지인 파미르고원에서 시베리아로 이동해온 한민족의 상고 문화를 아우르며 단군시대와 단군이전의 환웅시대, 그 이전의 한인시대, 그 이전의 마고성시대의 역사를 담고 있다. 김산호는 2003년 펴낸 <倭史(백제, 일본 그리고 왜)>에서 이렇게 적었다.
한동안 천해(天海, 바이칼 호수) 주변에 머물던 한(桓)족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츰 인구가 불어나자 사냥터를 확보하기 위해 부족간의 영역 분쟁이 자주 발생하게 되었다. 게다가 기후의 변화마저 일어나자 한민족의 주력은 제2의 정착지를 떠나 또 다시 민족의 대이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한님을 비롯한 중심 세력은 밝은 해의 처소지를 찾아 동쪽으로 항했다. 한편 뜻을 달리하는 다른 무리들은 제각각의 느낌에 따라 사방으로 흩어져 바야흐로 한민족이 아홉 갈래로 갈라지게 되었다.
김산호에 따르면 ‘밝은 해의 처소지를 찾아 동쪽으로 향한’ 세력이 바로 우리 한민족이다. 그리고 중국 <사기>가 세 종류의 인류 뿌리 중 하나로 지칭한, 소위 그들이 두려워하는 큰 활(大弓)을 쓰는 기마민족 동이(東夷)인 것이다. 시베리아에서 백두산을 넘어 한반도로 들어온 동이는 평화로움을 찾았다. 백두산, 압록강과 두만강이 외적들로부터 동이의 땅을 구분지어 주었기 때문이다. 동이족은 기마민족의 기백과 용맹성을 지켜나갔고, 백두산 호랑이로부터 동이족의 혼과 정체성을 찾았다.
한국 호랑이를 되살리겠다는 작가가 나타나는 것은 시대의 부름이었다. 2005년 11월 급성간경화로 세상을 뜰 때까지 오직 호랑이만을 주인공으로 그린 만화가 안수길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시점은 1990년대 초다. 안수길 전까지 한민족의 정서를 강하게 표현하려고 했던 만화가로는 이두호, 한재규, 백성민, 오세영 등을 꼽을 수 있다. 한재규는 안수길의 스승으로 그의 결혼식 주례사를 서주었고, 백성민과 오세영은 안수길이 가장 존경하는 만화가였다. 백두산 호랑이라는 소재만 달랐을 뿐, 안수길은 이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길을 걸었다. 백두산 호랑이는 한민족의 정신과 기운,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가장 호랑이를 잘 그렸던 남자, 안수길. 경상북도 칠곡 출신의 그는 아주 우직한 경상도 남자였다. 그런 바탕이 없었다면 가장 그리기 어렵다는 호랑이 그림에 인생을 바치기 어렵지 않았을까. 한재규 문하에서 배경처리만을 전담하던 그는 1988년 데뷔작인 <판소리 소녀경>을 발표했다. <판소리 소녀경>은 에로틱한 만화로 잡지사 만화선데이의 지시대로 그렸다. 하지만 안수길은 본질적으로 범속한 작가가 아니었다. 배경처리를 하는 순간에도 그는 호랑이를 포함한 동물 만화를 갈망했다. 1990년 ‘안수길표 호랑이 만화 1호’가 등장했다. 그는 호랑이가 주인공으로 처음 나온 만화 <수해(樹海>를 주간지인 매주만화에 연재하며 작가로서 홀로서기를 단행했다. 이어 안수길은 1992년 8월 호랑이 만화를 완성하는데 있어 최고의 파트너이자 인생 반려자를 만나게 됐다. 훗날 그의 아내가 된 김보희는 만화가의 꿈을 품고 대구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갓 상경해 안양에 정착한 만화가 지망생이었다. 김보희에게 전화통화로 “안양에 산다고? 내 제자가 안양에서 그림 그리고 있는데 만나보라”고 한 사람이 만화가 한재규였다. 김보희는 그해 8월 안양의 한 거리에서 같은 동네에 산다는 한재규의 제자 안수길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안수길은 주간야구에 연재하는 낚시 만화 원고를 밤샘 작업하고 부스스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당시 주간야구는 잠실 석촌호수 근처의 한 건물 2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주간야구의 자매지로 같은 공간에 있던 매주만화에도 호랑이 만화를 연재했다. 석촌호수로 원고를 넘기러가는 길에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것이었다. 안수길의 호랑이 만화 원고를 본 김보희는 눈이 번쩍 뜨였다. 더 정확하게 말해, 안수길의 쏘가리 그림에 반해 버렸다.
김보희는 “저를 문하생으로 써주세요”라며 매달렸지만 안수길은 부담스러워하며 “문하생은 필요 없다”고 답했다. 막무가내로 만화를 가르쳐달라는 그녀를 안수길이 이길 순 없었다. 안수길의 화실로 매일 출퇴근을 하는 생활이 시작됐다. 안수길은 어머니집인 빌라의 작은 방 한 칸에서 작업하고 있었다. 김보희가 안수길의 원고에 처음으로 손댄 작품이 1992년작 <백두산의 메아리>였다. 펜터치와 호랑이 털 그리기는 그녀의 몫이었다. 호랑이 이빨 개수까지 일일이 세가면서 그리는 안수길은 “한국 호랑이는 이마에 ‘왕(王) 자가 있어야 해. 아무 생각 없이 그리지 말고 이마와 꼬리 줄무늬를 제대로 표현해야지. 왜 네 마음대로 원래보다 줄무늬를 더 많이, 적게 그려?”라며 그녀를 혼냈다. 결국 사제지간으로 만난 두 사람은 1994년 9월 결혼해 동지의 길을 걸었다.
안수길은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 더욱 실감나는 백두산 호랑이를 그릴 수 있었다. 당연히 백두산 호랑이의 전문가가 됐다. “백두산 호랑이는 지구상의 어떤 호랑이보다 당당한 풍채를 지니고 있다. 누런 털 색깔에 검은색 띠무늬는 몸통에 24개, 꼬리에 9개가 있다. 큰 놈은 몸길이만 2미터가 훨씬 넘고, 몸무게가 400킬로그램에 달하는 놈도 있다.”
안수길은 호랑이 만화를 예술로 인정받고 싶어 했다. 그렇게 되려면 일본, 미국, 유럽에서 연재가 가능해야 했다. 안수길이 해외로 가장 먼저 노크한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호랑이를 말살한 일본이었다.
제12회 요미우리 국제 카툰 콘테스트(1990년)에 입선한 인연으로 안수길은 1993년 겨울 샘플 작업을 하고 자비로 들여 번역한 호랑이 만화 원고를 고단샤 편집부로 보냈다. 그 쪽에서 지체 없이 연락이 왔다. 한국에 와 있던 고단샤 번역 담당 손 미칸자씨를 통해 일본 연재가 급속도로 진행됐다. 꿈에 그리던 일본 연재였지만 쉽지 않았다. 안수길 부부는 굉장히 사실적으로 그렸지만 일본 쪽에선 스토리에 많이 간섭했다. 양측이 조정을 수차례 하면서 고단샤 주간모닝(슈칸모닝)지에서 <호랑이 이야기(虎物語)>란 제목으로 연재가 시작됐다. 주간모닝에 첫 회가 실린시점은 1994년 여름(35호)이었다. 호랑이 만화는 그림은 사실적이며 호랑이가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데 그 안에 사람의 생각을 넣어야 한다. 그것이 한계가 되기도 했다. 일본 측은 자신들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 바로 문제 제기를 했다. 한국적 정서로는 선한 백두산 호랑이가 상대에게 불쌍한 감정을 느끼면 살려줄 수 있다. 하지만 일본 측은 죽일 수 있는 건 죽이든지, 복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호랑이 만화는 철저하게 장인정신을 요구했다. 한 회가 대략 16페이지 분량. 매달이 아니라 평균 3~4개월에 한 번 연재됐다. 원고가 늦어지면 5~6개월에 한 번 나갈 때도 있었다. 1년에 3~4번 게재됐다. 먼저 안수길 측이 스토리를 번역해서 보내면 수정 요청이 오고, 그 과정이 반복되면서 몇 달이 걸렸다. 어떤 때는 데생을 완성한 상태에서 복사본을 보내주면 그걸 보고 피드백을 보내왔다.
안수길 역시 민화 속 까치호랑이를 많이 연구하고 참조했지만 까치호랑이는 정적이었다. 그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살아 움직이는 역동적인 호랑이였다. 서울대공원, 에버랜드가 그의 직장이었다. 그 곳 사육사들과도 친해져 맹수들의 아침 식사시간에 드나들 수 있었다. 동물들이란 밥 먹을 때 활동적인 법이다. 낮 시간에 가면 늘어져 있는 호랑이를 만날 수밖에 없다.
가족이 도시락을 싸가지고 동물원에 출근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아이들은 돗자리 부근에서 놀고, 안수길은 몇 시간씩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들은 작품에 큰 도움이 됐다. 호랑이가 공중으로 도약하는 사진 등을 확대하고, 라이트박스에 대고 그대로 그리고, 조금씩 상상을 넣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포즈를 만들어나갔다. 안수길은 밑그림을 굉장히 꼼꼼하게 그렸다. 그러면 김보희는 호랑이 털과 무늬를 하나하나 표현하기 위해 세필붓을 납작하게 개조해 썼다. 세필붓으로 펜터치까지 가능했다. 컬러 작업, 수염, 눈동자, 코 등의 마무리 작업은 안수길이 직접 담당했다. 특히 눈과 수염은 안수길이 가장 중요시한 화룡점정이었다. 호랑이의 감정이 담기는 눈동자는 항상 가장 마지막에 그려 넣었다. 고양이과 동물은 균형, 감각이 수염의 방향에 좌우되기에 소홀할 수 없다.
안수길은 실제 호랑이를 모델로 만화 캐릭터에 어울리도록 더 깔끔하게 뽑아냈다. 직접 그림 그리는 시간보다는 구상하는 시간이 더 들었다. 일제강점기에 경찰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사냥을 무척 좋아했다.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은 그가 여러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과거’다. 옆에서 그를 관찰한 김보희는 실제의 ‘안수길’을 들려주었다.
“남편은 정말 우직하게 호랑이를 좋아했다. 평소 말이 없었다. 만화를 그리면서 더 많이 호랑이를 닮아갔던 것 같다. 수염과 머리를 길러서 밖에 나가면 ‘산적같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외모적으로 자연스럽길 원했던 것 같다. 사냥꾼, 심마니 등도 만화에 자주 등장했다. 본인이 사냥꾼처럼 한복과 가죽옷을 입고 총 맨 채 사진을 찍었다. 포복하고 있는 모습도 찍었다.”
사진 찍기가 자연스럽게 그의 일상이 됐다. 먹고 살기 어려운 처지였는데도 안수길은 300만원에서 500만원을 호가하는 고급 렌즈들을 끊임없이 구입했다. 그것 때문에 부부싸움이 굉장히 많이 일어났다. 안수길로선 멀리서 당겨 호랑이를 찍어야 했다. 그렇게 힘든 때 아내 몰래 카메라와 렌즈를 질렀다. 매번 카메라 바꾸는 것이 안수길의 낙이었다. 나중에는 아내에게 구입 사실을 감추었다가 지로용지가 날아와 탄로 나기도 했다.
1998년 1월부터 주간모닝에서 <호랑이 이야기>의 2부 격인 <호이(HOY)>가 연재됐다. 안수길은 아기 백두산 호랑이가 진정한 왕으로 늠름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보여주었다. 외부에서 들어온 난폭자인 백호가 숲의 질서를 파괴하고 엄마, 아빠를 죽이자 백두산 호랑이가 훗날 복수하고 백두산의 평화를 되찾는다. 백호를 처단한 백두산 호랑이가 ‘이 숲의 먹이사슬 가장 높은 곳에 내가 서 있고 이곳의 주인이 된 건가? 아니야. 먹이사슬의 꼭대기란 없다. 그리고 내가 대자연의 일부분을 소유한다는 것은 더욱 아니야. 자연은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의 것이야! (다른 동물들을 평화롭게 바라보며) ... 그래, 이 숲의 주인은 바로 너희들이다!’라고 생각하며 백두산의 대자연을 2페이지의 전장으로 마무리한 부분은 독자를 백두산의 대자연 속으로 옮겨놓는다. <호이>는 <호랑이 이야기>보다 훨씬 배경이 정교해져서 분위기 전달이 뛰어나고, 단편 모음이 아니라 하나의 장편으로 진화했다.
2000년 말 일본 연재가 끝나면서 인생의 위기가 닥쳐왔다. 일본 독자들의 감탄을 끌어냈지만 한국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출판사와 맺은 동물도감 작업 계약이 마지막에 어그러졌다. 마땅한 연재처도 찾기 어려웠다. 아내는 그 때 상황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일의 공백이 생겼다. 남편뿐만 아니라 동료들도 다 같이 힘들어졌다. 좌절도 하고, 술도 많이 먹었다. 몸이 아프기 시작한 게 2002년이다. 경제적으로 힘드니까 사람도 못 만나고, 외롭고, 자기관리도 안되고. 그 때 간이 안 좋아졌다. 집안 내력이던 당뇨도 같이 왔다. 당뇨는 많이 먹으면 안 되고 운동해야 하는 질환인데 간경화는 많이 먹고 쉬어야하는 질환이다. 치료법이 다른 두 질환이 한꺼번에 왔다. 그 사람은 자존심이 강해서 주위에 아프다는 소리를 안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잘 몰랐다.”
안수길은 그 후로 1년에 두 번씩 입원했다 퇴원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 해인 2005년 7월 말 약 40일 입원했다. 퇴원 후 집에서 한 달쯤 지났을 때 식도정맥류와 위정맥류가 함께 오면서 위정맥이 터졌다. 그러나 당뇨 때문에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병원에서 시술 도중 사망했다.
전세계에서 백두산 호랑이를 인정받고 싶었던 그는 미국 성인만화잡지 헤비메탈에도 원고를 보냈다. ‘Very very nice’란 칭찬을 담은 헤비메탈측의 엽서가 곧바로 날아왔다. 미국의 정서에 안 맞아 연재를 당장 할 수 없다는 답변과 함께.
유럽에도 진출하고 싶었던 그의 소원은 사후에야 이루어졌다. 2011년 <호이>(1, 2권)과 <호랑이 그림 도감>이 프랑스에서 출간돼 호평을 받았다. 그가 만약 프랑스에서 출간된 자신의 만화들을 손에 들고 보았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어흥!”이라고 크게 외쳤을 것만 같다. 자신의 생명을 전부 백두산 호랑이와 백두산에 바쳤던 사나이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