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와 시대정신

초기화
글자확대
글자축소

1980년대~90년대 : (4) 장막의 해체

중세를 ‘암흑기’라 부르는 하나의 근거는 지식이 철저하게 통제된 시대였다는 점이다. 앎이나 지식은 소수의 권력층이나 상류층이 독점하고 있었으므로, 곧 권력이 됐다. 주로 수도원이나 성당에서 살았다고는 하지만 도서관에서 라틴어 성경을 읽고 필사를 할 수 있는 성직자들은 그런 면에선 권력자였다.

2013-11-27 장상용
중세를 ‘암흑기’라 부르는 하나의 근거는 지식이 철저하게 통제된 시대였다는 점이다. 앎이나 지식은 소수의 권력층이나 상류층이 독점하고 있었으므로, 곧 권력이 됐다. 주로 수도원이나 성당에서 살았다고는 하지만 도서관에서 라틴어 성경을 읽고 필사를 할 수 있는 성직자들은 그런 면에선 권력자였다.
 
일부 작품들은 중세를 배경으로 지식의 전파를 막으려는 세력의 음모를 다루기도 했다. 1980년 첫선을 보인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여섯 명이 차례로 살해되는 기이한 사건으로 빠져든다. 폐쇄된 원형극장인 이 수도원에서 어린 베네딕도회 수련 수사인 멜크의 아드소는 박식한 프란치스코회 수도사인 배스커빌의 윌리엄과 함께 의문을 살인사건을 풀어나간다.
 
엄청난 양의 장서를 보유한 이 수도원에는 그 시대에 읽지 말아야 할 금서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 문제의 금서가 바로 그리스 시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은 <시학(詩學)>이다. 신의 계율에서 벗어난 지식을 가르치는 이 책을 읽은 수도사들이 살아남지 못하도록 책의 페이지에는 독이 묻어있었다. 결국 이 사건은 연쇄살인마의 소행도 아니었고, 금기된 지식을 탐하는 수도사들을 막으려는 한 수도사의 음모였다.
 
 
[이미지 : <장미의 이름> 표지]
 
  
1986년 <장미의 이름>이 국내에 번역 소개됐을 때 움베르토 에코 열풍이 몰아쳤다. 온갖 금기, 반공, 검열 등으로 경직된 우리사회는 움베르토 에코의 박식하고 자유분방한 스타일에 반하고 말았다. 기호학, 커뮤니케이션 이론, 중세철학과 교회사, 대중문화비평, 소설 등에까지 두로 촉수를 뻗힌 채 왕성한 독서력, 번뜩이는 통찰, 자유로운 글쓰기를 보여주는 이 작가에 어찌 반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 역시 중세에 신앙을 권력처럼 여기던 자들이 그리스, 로마의 역사와 인문학, 이슬람 문명의 축적된 지식을 결사적으로 막았다는 사실에 몹시 흥미를 느꼈다.
 
반면 중세에 라틴어를 모르는 중세인들은 무지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성직자들은 지식이나 텍스트를 독점하며 무지한 자들 위에 군림했다. 성경을 대중 언어로 번역하거나 성경을 인쇄해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널리 전파하고자 했던 수많은 선각자들은 종교 재판에서 목숨을 빼앗겼다.
 
2006년 브로드웨이 무대에 오른 뮤지컬 <구텐버그>도 인쇄기 발명가 구텐베르크(1397~1468)와 그것을 막으려는 수도사의 음모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극 중에서 아마추어 작곡가와 극작가로서 너무 순수해서 약간은 바보처럼 보이는 버드와 더그는 중세 독일 슐리머 마을을 배경으로 구텐베르크가 성경을 보급하기 위해 인쇄기를 개발하는 이야기를 뮤지컬로 꾸며낸다. 두 사람은 돈이 없는 관계로 등장인물의 이름이 써진 모자를 연신 바꾸어들고 1인 다역을 해낸다.
 
이 마을에 살며 포도즙을 짜는 처녀 헬베티카는 철저한 까막눈이어서 글을 읽을 수 있는 구텐베르크를 존경하고 사랑한다. 구텐베르크는 와인을 압착하던 기계를 이용해 인쇄기를 만든다. 버드와 더그가 작품 속에 투입한 악당은 의외로 선만 일만 할 것처럼 보이는 수도사다. 마을에서 성경책을 독점하며 질서를 유지하던 늙은 수도사는 구텐베르크를 위험인물로 낙인찍고 결국 화형으로 몰아간다. 엔딩 부분에서 불 탄 구텐베르크의 모자는 붉은 보자기로 덮인 책상 위에 놓인다.
 
이 작품의 대본은 ‘히스토리컬 픽션(Historical fiction)’이라고 스스로 규정한다. 버드와 더그의 이야기는 역사적 구텐베르크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특히 화형 당했다는 부분이 그렇다. 하지만 실제 구텐베르크가 활동하던 독일 마인츠가 와인 생산지이며, 인쇄기가 와인 압착기에서 비롯됐다는 주장도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제작진은 구텐베르크와 수도사를 종교개혁가 루터와 교황의 관계에 대한 상징으로 보기도 한다. 교황은 지식과 성경의 전파를 가장 두려워했던 세력이었으니까.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저서 <性의 역사 : 앎의 의지>에서 권력의 전략이란 앎의 의지에 내재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수백 년을 건너뛴 후에도 권력자들은 장막을 쳐 자신의 세력권을 유지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0세기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지구에는 ‘철(鐵)의 장막’과 ‘죽(竹)의 장막’이 형성됐다. 급속한 공산주의의 확장을 경고하는 서방국가들의 우려 섞인 시각을 반영하고 있는 이 용어는 1946년 윈스턴 처질이 야당 당수로서 미국을 방문해 미주리주 웨스트민스터대학에서 ‘철의 장막’이라는 연설을 하면서 비롯됐다. 원래 ‘철의 장막’이란 연극 무대의 막을 일컫는 용어다. 연극 공연 중 불을 사용하다 막이 불타는 경우가 생기다 보니 무대 막에 철 성분을 넣어 화재를 방지하고자 철의 장막이 제작된 것이다.
 
국공내전이 치열하게 재개되면서 중국도 공산화가 될 지경에 놓였다. 결국 모택동의 중공(中共, 중국인민공화국)이 1949년 수립됐다.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군을 지휘한 미국 육군 원수 조지 마셜이 일본을 패배시킴과 동시에 일본을 탐내던 소련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원폭을 결정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전 세계는 장막의 안과 밖으로 나뉘었다. 대중이 자신이 속한 장막 밖의 세계를 알거나 관심을 두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특히 소련과 중공의 참전으로 한반도가 반토막 나는 끔찍한 경험을 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철의 장막’이나 ‘죽의 장막’이란 단어는 일종의 히스테리였다. ‘철의 장막’이나 ‘죽의 장막’에 대한 앎은 곧 체제에 대한 배신이었다. 여기에는 권력과 통치의 메커니즘이 가장 강력한 동력으로 작용했다.
 

 
 
 
 
 
 
 
 
 
 
 
 
 
 
 
 
 
 
[이미지 : 1950년 2월 스탈린과 모택동이 모스크바에서 회담 중 함께 박수를 치고 있다.
 
1942년생으로 젊은 시절을 냉전시기와 함께 보낸 시인 겸 대학교수 이건청(전 한국시인협회 회장)같은 지식인도 1980년대 말이 될 때까지 ‘철의 장막’ 저편의 세계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으며 일체의 정보도 얻지 못했다고 털어놓는다. 어린 시절 6.25전쟁을 겪은 그는 올바른 체계의 교육이란 걸 받지 못하고 자란 세대다. 학교가 무너지고, 들판에서 칠판 하나 걸어놓고 수업이 이루어지던 때였다. 이건청이 듣고 자란 이야기는 대부분 전쟁에 관련한 것이었다. 폭격기를 피해 도망가면서 옆에서 달리던 사람이 폭탄에 맞아 고꾸라지는 모습을 흔하게 겪던 세대의 인식 속에서 소련과 중공은 우리를 핍박과 고난에 빠뜨리고, 죽음에 이르게 한 악마들이었다.
 
대부분의 학교 교제에 ‘철의 장막’ ‘죽의 장막’이란 용어가 등장했다. 어린 학생뿐만 아니라 어른들까지 그 말을 들으며 그 곳은 쇠로 장막을 쳤다고 생각했다. 그 용어들은 쇠 장막 안에 피와 살이 흐르는 인간이 살고 있지 않다고 우리 국민들을 세뇌시켰다. 어린이들은 학교에서 ‘싹싹 쓸어내자, 쓰레기와 오랑캐!’라는 반공 표어를 지으며 세월을 보냈다. 여기서 ‘오랑캐’란 소련과 중공이다. 군부 정권은 그들에 대해 증오와 분노를 드러낼수록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1988년 올림픽은 한국을 전세계에 알리는 효과도 있었지만 ‘철의 장막’과 ‘죽의 장막’에서 온 미지의 인간들을 우리 국민이 직접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건청은 올림픽과 함께 내한한 러시아 무용단의 공연을 보며 ‘어떻게 ‘철의 장막’에서 온 사람들이 저리 아름다운 춤을 출 수 있나’라고 감탄했다.
 
그가 ‘죽의 장막’ 속으로 처음 들어간 시점은 1992년 8월 한중수교 체결 전인 1989년이었다. 교수 20여 명과 그 곳으로 향한 그는 ‘죽의 장막’의 주민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했다. 현지인들과의 만남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죽의 장막’에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부드럽고 온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 만난 중국인과 조선족 동포들도 정이 넘치는 인간이었다. 이건청은 중국 동포들을 끌어안고 함께 조국의 옛 노래들을 부르며 밤을 보냈다.
 
 
 
[이미지 :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이 1946년 9월 스위스 취리히에서 철의장막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장벽에 대해 연설했다.]
 
보수라고 자처하는 그가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그들은 이데올로기, 남북분단에 관심이 없었다. 이념이라는 건 외피일 뿐이다. 외피를 벗으면 모두 똑같은 인간이다. 그것에 목숨을 걸 문제는 아니다.”
 
그 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한 그는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들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느끼고 살더라.” 수십 년 간 그를 가두고 있던 고정관념이 무너져 내렸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시인 이건청은 요즘 가치관의 혼란을 느낀다. “살아온 환경 탓으로 보수적 인간이 됐지만 다른 쪽의 정치적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보드라운 감성을 갖고 있지 않을까라고 이해하게 됐다.”
 
30년 이상 교수를 한 지식인도 이럴 진데 일반 시민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어린이들에게 ‘철의 장막’ ‘죽의 장막’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렇다면 ‘철의 장막’과 ‘죽의 장막’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보았을까? 남북한이 각각 미국과 소련이 주도하는 두 개의 진영에 편입되면서 그들은 대한민국을 미국의 위성국 정도로 간주했다. 붉은 경계선으로 미국이나 소련의 영향권으로 표시한 당시의 세계지도를 본다면 그런 시각이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철의 장막’의 내부 사정은 스탈린이 다스리는 동안 혹독하기 그지없었다. 사형, 테러, 시베리아 유형 등 끝없는 공포정치가 이어졌다. 소비에트 연방과 주변의 위성국을 뒤덮은 극단적인 전체주의는 개인을 용납하지 않았다. 1953년 3월 6일 독재자 스탈린이 갑작스럽게 죽으면서 ‘철의 장막’에 훈풍이 불었다. 1956년 정권을 장악한 흐루시쵸프는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이면서 노선에 수정을 가했다. 스탈린 사후부터 1964년 10월 흐루시쵸프가 실각하고 브레쥐네프 정권이 들어서기까지 소련은 문화사에서 ‘해빙’이라고 지칭되는 시기를 겪게 됐다. 일리야 에렌부르크가 1954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틀을 벗어던지고 인간의 내면세계를 탐구하는 소설 <해빙>을 발표하면서 소련 문단에 해빙의 물결이 시작됐다.
 
<신세계지>의 편집장 트바르돕스키는 1961년 22차 당대회에서 “작가의 임무는 인간의 감정을 고양하거나 그들에게 선전을 일삼는 것이 아니라, 생에 대한 진리를 자세히 그들에게 전해주는 데 있다”고 선언했다. 스탈린 치하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건들이었다. <해빙>에 이어 두진체프의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1956년), 솔제니친의 <이반 제니소비치의 하루>(1962년) 등과 같이 전체주의를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작품들이 이 시대를 대표했다. 이후 브레쥐네프 정권이 들어서면서 ‘철의 장막’은 또 다시 경직 상태에 빠져들었다.
 
철통 통제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장막 저편에서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온 편린들이 우리 땅에도 떨어졌다. 그 홀씨 중 하나는 불행하게도 일본 순정만화였다. 1977년 MBC TV에서 애니메이션 <캔디>가 방영됐고, 미즈키 교코(글)와 이가라시 유미코(그림)의 만화 원작은 해적판 단행본으로 우리나라 전국 서점을 강타했다. 1970년대 말 <캔디> 붐을 타고 이케다 리요코의 명작 <베르사이유의 장미>와 <오르페우스의 창(窓)>이 역시 해적판 형태로 출간됐다. 로맨스물이면서도 거대한 역사적 사건들을 묵직하게 깔고나가는 <베르사이유의 장미>와 <오르페우스의 창>같은 일본 걸작 만화들은 1970년대 말 우리나라 독자와 만화가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특히 <오르페우스의 창>은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어서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내포하고 있었다. ‘러시아’나 ‘소련’은 금기어에 가깝던 반공의 시대에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을 소재로 한 작품이 출간됐다는 자체가 지금 돌아보면 이야깃거리다.
 
1975년부터 1981년까지 일본에서 연재된 <오르페우스의 창>은 2000년대 초까지도 우리나라에선 ‘올훼스의 창’이라고 불렸다. ‘올훼스’는 일본식 발음이다. 신화 속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비극적 사랑을 모티브로 한 이 작품은 초반부에선 독일 바이에른 레겐스부르크 성(聖)세바스찬 음악학교를 배경의 로맨스 만화로 보인다. 남장여자 주인공 유리우스는 ‘오르페우스의 창’이라 불리는 이 학교 첨탑 밑에서 이 학교의 재학생 클라우스, 이자크 두 사람과 눈이 마주친다. ‘오르페우스의 창’을 통해 남자가 첫 번째로 마주친 여자는 신화 속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처럼 사랑을 하지만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는 학교의 전설을 상기하면서 이들은 점점 서로에게 빨려든다.
 
 
 
   
 
[이미지 : <오르페우스의 창> 이미지] 
 
 
이 작품의 초반부에 러,일전쟁의 전황이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유리우스의 학교 학생들이 나누는 대화는 전쟁 관련국들의 입장을 들려준다.
 
“러시아와 일본이 오늘 오후에 드디어 전쟁을 시작했대…. 먼저 일본이 공격했다는 거야! 러시아 군함이 두 척 침몰됐대.”
“금방 결말이 날 거야! 러시아의 압도적 승리로….
“그건 모르지. 영국과 일본은 동맹을 맺었거든.”
“뭔 상관이냐. 우리나라(독일)는 러시아와 손을 끊었는데.”
 
이 만화의 시점은 중국 뤼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를 향해 일본 연함합대의 기습 공격으로 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년 2월 8일이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엄청난 비밀과 복선이 지뢰밭처럼 깔린다. 유리우스의 첫사랑인 선배 클라우스가 ‘알렉세이 미하일로프’라는 본명을 가진 러시아의 혁명가로 해외로 도피 중이며 그의 약혼녀 알라우네 역시 혁명 동지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유리우스는 클라우스와 함께 러시아 차르(니콜라이 2세)의 비밀경찰들에게 쫓기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된다. 러시아 비밀경찰들은 해외에서 활동하는 혁명가들을 체포하거나 암살하고, 그들에게 자금을 대는 해외의 귀족들을 색출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폰.아렌스마이야 가문의 주인인 아버지가 죽으면서 유리우스에게 유산으로 남긴 프랑크푸르트 제국은행 금고 열쇠의 비밀이다. 유리우스가 18세가 되면 상속하게 되는 그 유산은 실은 러시아 로마노프 황실의 막대한 은닉 재산이었다. 유리우스의 아버지는 러시아 차르의 돈세탁 거점이었던 것이다. 입이 딱 벌어지는 사건이다.
 
유리우스가 클라우스를 찾아 러시아로 떠나면서 2부의 배경은 러시아로 바뀐다. <오르페우스의 창>는 점점 공간과 사건이 걷잡을 수 없이 확장된다. 러시아 제국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체 높은 장교인 레오니드 유스포프 후작이 어떤 사건으로 기억을 잃은 유리우스의 백마 탄 기사로 나타난다.
 
공간적으로 빌헬름 2세 치하의 독일에 국한됐던 <오르페우스의 창> 1부와 달리, 레오니드의 모습을 통해 제정 러시아 말기의 불안정한 국내 정세, 제1차 세계대전, 사회주의 혁명 진행과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황실을 농락한 제정 러시아 말기의 ‘괴승’ 라스푸틴까지 재현해내는 대목에선 이케다 리요코의 디테일에 감탄을 하게 된다. 라스푸틴은 세계사에서 무속인으로서 정치까지 장악한 대표적 사례로 항상 소개되는 인물이다. 귀족 장교들은 라스푸친의 모략에 의해 육군친위대 사령관 직에서 해임되고 좌천된 레오니드에게 라스푸친의 횡포를 참을 수 없다며 궁정쿠데타를 촉구한다. 반면 클라우스, 즉 알렉세이 미하일로프는 혁명가로 체로돼 시베리아 유형을 떠난다. 황후 아들의 혈우병을 치료했다는 이유로 무한 신임을 얻고 있던 라스푸친은 실제로 1916년 12월 황실을 구하려는 한 귀족에 의해 암살됐다. 1917년 들어설 무렵 차르의 정부를 회복시키려는 목적의 궁정쿠데타 소문이 돌은 것도 사실이다.
 
1980년을 전후로 한 <오르페우스의 창>의 국내 해적판 출판은 온갖 해프닝을 빚어냈다. 2001년 정식판이 출간되기 전까지 국내 짝퉁 출판업자들은 ‘올훼스의 창’ ‘비련의 창’ 등의 제목으로 여러 버전을 쏟아냈다. 해적판 출판에서도 검열을 피하는 문제가 핵심이었다. 클라우스가 러시아로 떠났는데 그 다음부턴 정작 ‘러시아 혁명’이란 단어를 쓸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대사나 그림 몇 가지 고쳐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2부에서 ‘러시아 혁명’을 ‘핀란드 독립운동’으로 고쳐버렸다. 원작 속의 ‘모스크바’는 ‘투르크’로, ‘페테르부르크’는 ‘헬싱키’라는 지명이 됐다. 그러다 보니 1부와 2부는 앞뒤가 맞지 않게 됐다. 그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또 다시 개작이 진행됐다. 원작에는 없는 내용과 그림을 편집, 추가해 기존 독자들을 설득시켜야 했다. 한국어 해작판은 러시아로 간 줄 알았던 클라우스가 핀란드 독립운동을 돕고 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꾸몄다. 유리우스가 ‘왜 내게 러시아로 간다고 거짓말을 했는가’라고 클라우스에게 따지는 장면까지 넣었다. 아무리 핀란드로 무대를 바꾸었다고 한들, 민중혁명이란 소재가 그 시대에 부담이 안 될 수 없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발생한 1980년, <올훼스의 창>은 13권까지 출간되다가 막을 내렸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실제로 레닌이 1917년 10월 혁명 직전까지 핀란드의 은신처에 숨어있었다는 점이다. 볼셰비키의 권력장악을 촉구한 그가 러시아 수도 페테르부르크에 들어온 시점은 그해 10월 23일이다. 우연이겠지만 우리나라 짝퉁 만화 속 클라우스와 레닌의 행보가 겹친다.
 
<올훼스의 창> 14권은 5공 정권이 막을 내린 후인 1989년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이 작품을 ‘핀란드 독립운동’ 이야기라고 알고 읽었던 독자들은 또 다시 혼란에 빠졌다. 14권부턴 ‘러시아 혁명’이라고 제대로 표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핀란드 독립 투사’로 소개된 클라우스가 갑자기 러시아 혁명을 위해 싸우고 있는 모습은 코미디이자 독자에 대한 테러였다.
 
1999년 출간된 또 다른 짝퉁 판본 <비련의 창>은 검열의 시대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혁명을 프랑스 혁명으로, 니꼴라이 2세를 나폴레옹으로 바꿔치기 했다. 작품 속의 시계를 100년 전으로 돌리고 ‘러,일전쟁’을 ‘불란서,화란 전쟁’으로 고쳐 타이핑하는 것은 더 쉬운 일이었다. 아마도 낯선 러시아 혁명보다 국내 독자들에게 익숙한 프랑스 혁명이 책 한 권이라도 더 파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계산이 아니었을까. 양심 없는 해적판 업자들의 테러는 아이러니하게도 전 세계적으로 희귀한 ‘팬픽’을 생산하는 결과를 낳았다. <오르페우스의 창>이 국내에서 제대로 된 작가와 작품명을 되찾은 것은 2001년 정식판 출간 이후다.
 
그러나 진실은 손바닥으로 가린다고 가려지지 않는 법이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1970년대 말 국내 출간된 <올훼스의 창> 해적판 등을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장막 저편의 세계를 감지했다. <올훼스의 창>을 보며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 중 하나는 남자 순정만화가 차성진이었다.
 
 
 
 
 
 
 
 
 
[이미지 : 차성진의 만화 <아나스타샤> 표지 이미지]
 
 
 
1947년 전라남도 목포 태생인 그는 ‘이건 소련 이야기잖아?’라고 가슴 뜨끔해하며 어른이 금지한 ‘빨간책’을 몰래 훔쳐보는 소년 같은 심정으로 책장을 넘겼다. <올훼스의 창>의 영향으로 그의 만화도 시대나 인물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갔다. 그는 1994년 무렵 만화잡지 투유에서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딸인 아나스타샤를 주인공으로 한 만화 <비운의 공주 아나스타샤>를 선보였다. 니콜라이 2세 가족들은 볼셰비키들에게 체포돼 하나씩 처형을 당했는데 황녀 아나스타샤만은 생사가 불명해 여러 가지 소문이 무성했다. 아나스타샤일지도 모르는 한 여인의 이야기는 1956년 잉그리트 버그만, 율 브리너 주연의 영화 <추상(追想, 원제 : 아나스타샤)>로 제작됐고, 니콜라이 2세가 죽은 지 꼭 40년만인 1958년 서독 위스바덴에서 앤더슨 부인이라는 여인이 자신이 아나스타샤라며 로마노프가의 재산을 주장했다.
 
차성진은 아나스타샤라고 추정하는 여자를 통해 제정 러시아와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최후를 재현해들어갔다. <비운의 공주 아나스타샤>의 첫 장면부터 니콜라이 2세 부부와 자녀들은 궁에 유폐돼 있다. 이들 가족은 시베리아로 이주 명령을 받고 거처를 옮기다 결국 처형을 당한다. 그로부터 5년을 건너뛴 1928년 독일 비스바덴의 한 병원에 과거의 기억을 잃은 여자가 수용된다. 온 몸에 총알 자국이 있는 그녀는 기억을 찾으면서 아나스타샤임을 밝힌다.
 
한 남자가 총살당한 시체 더미에서 그녀를 구해 루마니아로 갔고, 거기서 아이와 남편이 죽는 바람에 독일로 왔다는 이야기다. 차성진의 그림은 깔끔하면서도 품위가 있어 사실과 픽션을 뒤섞은 아나스타샤 이야기에 잘 어울렸다. 하지만 <비운의 공주 아나스타샤>는 연재잡지인 투유가 갑자기 폐간하는 바람에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처럼 미완성으로 남은 비운의 작품이 됐다.
 
[이미지 : 차성진의 만화 <아나스타샤> 중]
 
1970년대 말 장막 너머의 한 소녀가 차성진을 뒤흔들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체조 사상 처음으로 10점 만점을 맞으며 3개의 금메달(평균대, 이단평행봉, 개인종합)을 휩쓴 루마니아 체조 요정 나디아 코마네치였다. 공산주의 국가가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훈련시켰으면 15살 소녀를 기계로 만들어 만점을 맞도록 했겠냐며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차성진에게 코마네치는 그 자체로 경이로운 예술이었다. 그는 TV화면을 통해 장막 너머의 사람들이 피와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 아니라 더 인간적일 수 있음을 직감했을 뿐 아니라 여성의 근육미에 반해버렸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2개의 금메달을 추가한 코마네치의 몸은 몸무게는 안 늘고 필요한 부분의 근육만 붙여놓은 육체였다. 일반 여성의 아름다움과는 차원이 달랐다. 폭 10cm의 평균대 위에서 자유자재로 돌며 만점을 받는 코마네치는 얼마 후 그의 만화 속으로 옮겨졌다.
 
1980년대 초중반 어깨동무에서 연재한 기계체조 만화 <조막새의 꿈>의 모델은 코마네치였다. 총각 아롱다롱 선생님을 좋아하는 주인공 조나미는 학교에서 장난처럼 체조를 시작했다가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며 최고 선수로 급성장한다. 이 만화는 사실적인 체조 동작과 아름다운 인체 묘사를 곁들인 코믹 멜로로 소녀들의 꿈을 이루어주며 독자들의 눈길을 모았다.
 
 
 
 
 
 
[이미지 : 만화가 차성진]
 
 
그 무렵 한국에는 이렇다 할 기계체조 교본이 없었다. 영세 출판사의 형편없는 교본 한 종이 있는 정도였지만 우리나라에선 그것조차 귀했다. 1922년 일본공산당을 창당한 일본에선 코마네치 같은 공산권 인물을 다룬 출간물이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았다. 차성진은 일본판 몬트리올 올림픽 사진집을 구해 코마네치의 동작과 기술들을 살폈다. 그 책에서 코마네치의 조국이자 소련의 위성국인 루마니아의 국기가 그려져 있던 자리는 우리나라 세관 통과를 위해 검은색 매직으로 지워져 있었다. 일본학생들은 제정러시아, 소련, 위성국가들을 공부했지만 우리나라 학생들은 배울 수 없었다.  
 
그 무렵 한국에는 이렇다 할 기계체조 교본이 없었다. 영세 출판사의 형편없는 교본 한 종이 있는 정도였지만 우리나라에선 그것조차 귀했다. 1922년 일본공산당을 창당한 일본에선 코마네치 같은 공산권 인물을 다룬 출간물이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았다. 차성진은 일본판 몬트리올 올림픽 사진집을 구해 코마네치의 동작과 기술들을 살폈다. 그 책에서 코마네치의 조국이자 소련의 위성국인 루마니아의 국기가 그려져 있던 자리는 우리나라 세관 통과를 위해 검은색 매직으로 지워져 있었다. 일본학생들은 제정러시아, 소련, 위성국가들을 공부했지만 우리나라 학생들은 배울 수 없었다.  
 
그 무렵 한국에는 이렇다 할 기계체조 교본이 없었다. 영세 출판사의 형편없는 교본 한 종이 있는 정도였지만 우리나라에선 그것조차 귀했다. 1922년 일본공산당을 창당한 일본에선 코마네치 같은 공산권 인물을 다룬 출간물이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았다. 차성진은 일본판 몬트리올 올림픽 사진집을 구해 코마네치의 동작과 기술들을 살폈다. 그 책에서 코마네치의 조국이자 소련의 위성국인 루마니아의 국기가 그려져 있던 자리는 우리나라 세관 통과를 위해 검은색 매직으로 지워져 있었다. 일본학생들은 제정러시아, 소련, 위성국가들을 공부했지만 우리나라 학생들은 배울 수 없었다.  
 
 
 
 
 
[이미지 : 평균대 연기를 펼치는 루마니아의 나디아 코마네치.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세계최초로 십점 만점을 받으며 금메달 세 개를 획득했다.]
 
 
1980년을 전후해 해적판으로 우리나라 만화계를 휩쓴 일본 순정만화들은 그런 배경에서 태어난 탓에 화풍이 뛰어나고 완성도가 높았다. 게다가 일본 만화는 도덕적 금기라는 소재에 제약을 받지 않았다. 그런 작품이 바로 이치죠 유카리의 <모래의 성>이었다. 남자가 자기를 키워준 엄마 같은 연상녀와 격정적인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정서로는 엄청난 파격이었다. 차성진은 이 작품에도 큰 충격을 받았다.
 
세상을 가리고 있던 장막은 수십 년 동안 조금씩 갈라지고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실제로 세계사의 큰 흐름 속에서 ‘죽의 장막’과 ‘철의 장막’은 해체를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중국 지도자 등소평은 1978년 12월 개혁개방을 선언하고, 다음해 후속조치를 단행했다. 사회주의에 자본주의를 결합하는 것은 민감한 일이었다. 자본주의 유입 과정에서 이익의 분배문제, 공산당 관료의 부패, 부의 추구 등을 둘러싸고 중국 내부에서 사회적 불만이 커졌다. 권력 충돌은 없었지만 사회 문제에 관심이 큰 북경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좀 더 심도 깊은 개방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 와중에 경제뿐 아니라 정치, 사상 등을 포함한 폭넓은 개혁을 주장했던 호요방이 등소평에 의해 실각했다가 1989년 4월 사망했다.
 
등소평의 심복이었던 호요방이 순수하고 이상적인 기질의 개혁주의자였다면, 등소평은 단순히 실용적 차원에서의 개혁만을 원했다. 호요방의 죽음은 그 해 6월 4일 북경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천안문 사태를 촉발했다. 그 대가는 처참했다. 875명(중국 정부 발표)의 사망자가 나왔지만 국제사회는 3000명 이상 사망한 걸로 보고 있다. 결국 1992년 강택민 체제에서 개방은 전면적으로 확대됐고, 1992년 8월에 이르러 한중수교가 맺어졌다.
 

 
 
 
 
 
 
 
 
 
 
 
 
 
 
 
 
 
     
[이미지 : 차성진의 만화 <조막새의 꿈>]
   
소련(蘇聯)이라는 거대한 제국은 이념이 퇴색되자 도미노 블록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공산주의라는 철의 사슬과 콤비나트로 15개 국가를 묶어놓은 소비에트 연방 내에서 자원의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경제적 모순과 국가 간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예를 들면 소련의 식량기지였던 우크라이나는 1932~1933년 대기근로 약 1000만 명이 굶어죽었다. 스탈린이 집단농장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식량 압수 조치를 취하면서 정작 농민들이 아사한 것이다. 우크라이나 측은 볼셰비키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뿌리 뽑기 위해 벌인 학살극으로 보고 있다. 이 대기근을 일컫는 ‘홀로도모르’는 러시아어로 ‘홀로드(기아)’와 ‘모르(역병)’의 합성어다. 1990년 9월 한소수교 이후 1년여 만인 1991년 12월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쵸프가 소련 해체를 선언했다.
 
차성진도 ‘철의 장막’ ‘죽의 장막’이 드리운 시간을 통과하며 힘겹게 만화를 그렸다. <조막새의 꿈>만 해도 유니폼을 입은 여자 기계체조 선수들의 모습이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심의에 시달렸다. 차성진은 심의 기관에 출두해 “여자 체조 선수들을 츄리닝 입혀서 그려야 하나. TV 보고 작업한 거다. 그럼 TV도 방송 못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스스로 변론했다.
 
차성진이 월간만화잡지 르네상스에서 1993년 연재한 발레 만화 <아라베스크>도 장막의 시대의 피해자였다. 세기의 무용수 이사도라 던컨의 생애를 그린 <맨발의 이사도라>(1989년 10월부터 1990년 6월까지 르네상스 연재)의 후속작이라 볼 수 있는 발레 만화 <아라베스크> 역시 남자 작가의 입장에서 동적인 순정만화를 추구하며 차별성을 끌어낸 차성진의 야심작이었다. 1970년대 초 일본 만화가 야마기시 료코가 그린 발레 만화 <아라베스크>가 이미 존재하긴 했지만. 1982년 피겨스케이팅 만화 <은반 위의 요정>까지 다루며 거칠 것이 없었던 그로선 또 다른 <아라베스크>를 만들어내고자 했다.
 
이 만화의 제목인 ‘아라베스크’는 양팔을 펼치고 한 쪽 발로 학처럼 선 자세를 가리키는 발레 전문 용어다. 당시 체육고등학교를 취재한 차성진은 이 기술을 왜 제목으로 사용했는지 설명한다. “발레에선 중심잡기가 어렵다. 고도의 훈련을 거친 숙련자만이 아라베스크를 구사할 수 있다.”
 
발레, 무용, 피겨스케이트, 기계체조 계열의 소재라는 점 외에도 차성진이 시대와 조응하며 <아라베스크>를 그린 이유가 있다. 이 작품을 발표한 1993년은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97년 IMF 사이의 시기로, 모든 국민이 대한민국의 도약과 물질적 풍요에 살짝 취해있었다. 1989년 해외여행자유화도 실시됐다. 여자 쪽에선 외모 지상주의, 성형 바람 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차성진은 청소년이 부모에 의존하고 있으며, 여자가 더 강해지고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침 베트남전쟁을 다룬 반전영화 <플래툰>과 <디어 헌터> 등이 1980년대 우리나라에 큰 여운을 남겼던 터였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죽은 친구도 알고 있던 그는 그런 요소들을 결합해 베트남전쟁 참전 용사의 딸이 발레를 하는 만화 <아라베스크>를 기획했다. 발레를 하려면 남다른 정신무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라베스크> 연재는 처음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였다. 만화 대사 중 베트남 파병 군인들이 베트공의 귀를 잘랐다는 내용이 언급됐다. 물론 차성진은 베트남 파병이 우리 경제에 크게 이바지했음도 동시에 지적했다. 그런데 이 만화를 보던 소녀 독자가 베트남 파병 장병 출신인 아빠에게 그 내용이 사실이냐고 물었고, 아빠는 발끈했다. 파월장병전우회가 르네상스 편집부로 강력하게 항의했다. 르네상스 편집부는 겁을 집어먹었다. 차성진은 전화로 “베트남 파병 장병들을 욕되게 하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직접 해명하며 땀을 뺐다. 베트남전쟁과 고엽제 문제는 그 때까지도 우리사회에서 민감한 이슈였다. 결국 <아라베스크> 연재는 몇 회만에 중단됐다.
 
차성진은 자연스럽게 1960년대 활약하던 순정만화 1세대와 1980년대 출연하는 순정만화 2세대를 잇는 역할을 했다. 1968년 무렵부터 엄희자, 조원기 밑에서 <카치아> 같은 작품의 데생 일을 맡으면서도 1970년대 초부터는 <폭풍지대> <최후의 곡예사> 같은 자신의 작품을 발표했다. 특히 일본 거류민단과 북송선 이야기를 다룬 <폭풍지대>는 젊은 시절에도 차성진이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차성진은 군기피자로 도망 다녀야 하는 생활도 했고, 1970년대 중반 군대에 끌려갔다가 사회에 나온 후 1년 먼저 제대한 김형배의 <로보트 태권V> 시리즈를 함께 나누어 그리면서 1980년대를 맞았다.
 
그는 ‘어둠의 경로’를 통해 입수한 일본 자료 등으로 장막 너머의 세상을 간접적으로 엿볼 수밖에 없는 불행한 시대에 놓여있었지만 발랄하고 활동적인 여자 순정만화 주인공들을 제시하며 주요 순정만화가로 자리 잡았다. 차성진 역시 끈질기게 만화를 붙잡았다. 만약 그가 정상적인 시대를 만났다면 더 좋은 작품들을 남겼을 것이다. 차성진 세대의 만화가들은 차단과 통제의 시대를 버티며 견뎌냈다. 그것이 대한민국 만화의 밑바닥 힘이 됐다.
 
필진이미지

장상용

작가, 만화평론가
초이락컨텐츠컴퍼니 웹툰사업팀장, 前 부천국제만화축제 사무국장, 前 일간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