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프로야구 시즌이 끝난 후 FA대박을 터트린 선수들이 나타났다. 강민호 75억원(4년, 롯데), 정근우 70억원, 이용규 67억원(4년 한화), 이종욱 50억원(4년 NC). 미국이나 일본 등의 해외 프로야구는 별도로 치고, 국내 프로야구 선수들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아무리 인플레이션이 심해졌다고 해도 그 금액은 일반인들이 체감하기엔 ‘돈벼락’ 수준이다. 반면 이들과 달리 연봉 2000만원도 못 미치는 선수들도 수두룩하다.
‘프로’라는 개념은 노동력의 가치를 세분화하고, 철저히 차별화한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 개념이 우리사회 전반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프로라는 기준이 각 분야에 적용되면서 1970년대와 1980년대는 완전히 다른 시대가 된다. 이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분야가 프로복싱이었다.
1960년대의 김기수, 1970년대의 홍수환의 챔피언 등극은 가난과 설움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며, 빵조각을 위한 싸움이었다. 세계 최고가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그들을 강하게 했다. 그들은 인생 역전의 드라마를 쓰기 위해 조건과 환경을 따지지 않았다. 혼자 지옥에 떨어져도 자신이 챔피언임을 입증해내야만 했다.
전두환 정권이 1982년 프로야구를, 이듬해 프로축구를 출범시켰다. 그 전까지 헝그리 복서들의 사투를 기반으로 인기를 모은 프로복싱은 이 시기에 큰돈을 만지는 프로스포츠로 성격을 뚜렷이 했다. 세계챔피언은 남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자리를 의미하게 됐다. 당시 한국에서 유일하게 챔피언 벨트를 가지고 있던 WBC 슈퍼플라이급 챔피언 김철호는 “10차 방어를 목표로 하며, 3억 5000만원을 벌 때까진 쓰러질 수 없다”(동아일보 1982년 2월 2일자)고 선언했다. 세 차례의 방어전에서 8500만원을 벌어들인 그는 은퇴 이후를 생각해 챔피언 타이틀을 갖고 있을 때까지 악착같이 벌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의지가 구체적인 액수로 표현되고 있는 것을 보라.
프로세계에선 ‘슈퍼스타’가 만들어질 수도 있는 존재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기획사의 철저한 작업으로 만들어지는 아이돌 가수처럼, 1980년대 이후 국내 프로복싱은 비즈니스의 입김을 강하게 타고 있었다. 즉, 해당 체급의 최고 실력자가 세계챔피언이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프로복싱은 장정구(1983년 3월), 유명우(1985년 12월)가 각각 WBC 라이트플라이급, WBA 주니어플라이급 챔피언으로 롱런하면서 인기 절정에 달하는 듯했다. 때마침 WBA, WBC에 이어 제3의 복싱기구 IBF가 1983년 탄생했다. 그러나 해외와는 반대로 국내에선 프로의 진정한 실력을 보여주는 경기는 점점 줄어들고, 반대로 프로모터에 의해 만들어진 챔피언과 세계 랭커들이 늘고 있었다. 국내나 동양권에서는 무적인 것처럼 보인 선수가 해외만 나가면 맥없이 무너졌다. 챔피언 측은 약한 도전자를 골라 방어회수를 늘리는 방법을 고심했다. 거기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프로복싱은 이미 1980년대 후반 몰락의 징후를 보이고 있었다. 외화내빈. 팬들은 냉정하게 링을 외면했다. 그것이 프로의 법칙이었다.
‘너를 깨뜨려야 내가 산다.’
이미지 : 1983년 9월 5일 열린 재대결에서 박종팔이 나경민의 복부에 결정적인 훅을 넣고 있다. 박종팔 4회 KO승. 1983년 박종팔과 나경민의 미들급 라이벌전 포스터에 들어간 글귀다. 이 열 글자 속에서 죽느냐, 사느냐의 절박함이 묵직하게 느껴진다. 국내 최고의 라이벌전으로 기억되는 중량급 강타자 박종팔과 나경민이 펼친 두 번의 대결은 침체 위기에 빠진 한국 프로복싱에 답안지를 준 경기였다. 세계타이틀전이 아닌데도 문화체육관에 4000여 명의 관객이 몰린 이 라이벌전은 관객을 열광시켰다. 리턴 매치에서 나경민을 4회 KO시킨 박종팔은 첫 경기의 패배를 설욕하고 승승장구했다. 박종팔이 이 경기에서 받은 2000만원은 당시 가장 잘 나가는 프로야구 투수 임호균의 연봉이었다. 비장한 각오로 임했지만 이 경기에서 패한 나경민은 이후 슬럼프를 겪다가 1985년 은퇴했다. 패자는 그 세계를 떠날 각오를 하고 서야 하는 무대가 바로 라이벌전이다. 해외에선 이 시기에 가슴 두근거리는 라이벌전이 속속 이루어졌다. 1970년대 알리, 조 프레이저, 조지 포먼의 헤비급 라이벌은 전세계를 복싱의 열기 속에 몰아넣었다. 1980년대 초반 웰터급과 미들급에서 그에 못지않은 라이벌전이 폭발했다. 1981년 슈가레이 레너드가 토마스 헌즈에 14회 역전 KO승을 거두었다. 이들의 재대결은 8년 후인 1989년 성사돼 무승부로 끝났다. 1984년 ‘돌주먹’ 두란은 쿠에바스를 4회 KO로 눕혔다. 그 중심에는 마빈 해글러가 있었다. 그는 1985년 헌즈를 3회 KO로, 1986년 ‘아프리카의 야수’ 무가비를 11회 KO로 잠재웠다. 양발을 컴퍼스처럼 쭉 벌리고 공포의 어퍼컷을 휘두르던 무가비도 해글러의 적수가 되지는 못했다. 1987년 ‘복싱 천재’ 레너드가 치고 빠지기 작전으로 해글러에게 패배를 안겼다. 물고 물리는 해외 라이벌전을 국내 복싱팬들도 손에 땀을 쥐며 위성 중계로 지켜보았다. 이미지 : 레너드와 헌즈의 1989년 재대결 포스터
반면 ‘박종팔 vs 나경민’이라는 답안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라이벌전 카드는 대체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장정구 vs 유명우, 김태식 vs 박찬희, 박종팔 vs 백인철, 황충재 vs 김상현, 이상호 vs 황준석, 김환진 vs 김성준 등은 팬들이 머릿속으로만 결과를 예측해야 하는 빅매치로 남아있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프로복싱의 불꽃은 살아있었다. 만화가들이 프로복싱을 만화 소재로 삼으려는 건 당연했다. 이현세의 <지옥의 링> <까치의 유리턱>, 허영만의 <무당거미> <변칙복서> <카멜레온의 시>, 박봉성의 <신의 아들> 등 1980년대를 대표하는 복싱 만화들이 쏟아졌다.
복싱 만화에 관한한 만화가 김철호라는 존재는 독보적이었다. 1983년 45권 장편으로 대본소의 중앙 서가를 장악한 김철호의 <스콜피오>는 복싱 만화의 챔피언이자 교과서였다. 같은 해 몇 달 앞서 대본소를 휩쓴 <공포의 외인구단>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던 <스콜피오>의 후속 <공포의 슈퍼스타>가 50여권 장편으로 그 뒤를 이어나갔다. 약 100권에 달하는 김철호의 복싱 만화 두 타이틀이 대본소 서가를 일렬로 채워나간 모습은 장관이었다. 김철호는 만화 속에서 항상 주인공을 KO왕으로 그리면서도 강자들의 라이벌전을 다루었고, 사각의 링을 끈질기게 들여다보며 프로라는 세계의 속성을 철저하게 파헤쳤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김철호는 이 시기의 만화가들처럼 어릴 적부터 만화에 푹 빠진 소년이었다. 월트디즈니의 <피터팬> <백설공주> 같은 만화 영화를 본 이후 그의 마음 속에선 만화가가 되겠다는 꿈이 자랐다. 이미지 : 프로의 본질을 알았기에 행복하게 작가생활을 한 김철호
그림쟁이로서의 재능은 인천상업미술학교에 다닐 때부터 탁월했다. 지도 선생님은 그 학교에 기대어 초상화 등 그림을 그리는 분야로 나가라며 그를 붙잡았다. 김철호의 꿈은 오직 만화가였다. 6개월 극장간판 일로 사회 경험을 쌓은 그는 당시 인기 작가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던 강철수 밑으로 들어갔다. 1966년의 일이었다. 김철호는 강철수에게 그림 실력을 인정받아 스토리와 데생부터 시작했다. 군 생활(1968년부터 1971년 4월까지) 전후로도 그의 몸은 강철수에게 매어 있었다. 군 제대 후에도 곧바로 자작을 하진 못했다. 나이로는 2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지만 강철수는 기성 작가이고, 김철호는 스태프의 일원일 뿐이었다. 합동출판사와 소년한국도서의 양강 체제 시절엔 신인이나 문하생이 함부로 만화가협회에 등록하고 출판사와 거래할 수 없었다. 강철수는 이런 유능한 스태프를 자신의 밑에 두고 오래 써먹고자 했다.
자작의 꿈을 놓지 않은 김철호는 복싱 만화로 데뷔했다. 1972년작 <나는 복서>는 의대생인 부잣집 아들이 챔피언이 되는 이야기였다. 이 작품은 여러 시리즈로 제목을 바꾸며 18권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이 시리즈가 출판사에 의해 갑자기 중단되는 바람에 김철호는 다시 강철수 밑으로 들어가야 했다. 이 대목에서 편무옥이란 인물을 거론할 필요가 있다. 편무옥은 김철호와 함께 강철수의 단행본 데생을 담당하던 실력자였다. 김철호보다 두 살 아래였다. 강철수의 1969년작 <서부로 가는 길>을 혼자서 완성하다시피 한 편무옥을 두고 만화계에선 대단한 천재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데 이런 실력자가 자작만 하면 죽을 쑤었다. 편무옥이 작가로 홀로서기에 실패한 이유는 무얼까?
이미지 : 김철호 작가의 <스콜피오> “편무옥과 나는 먹부터 갈아서 그림 그린 사람들이다. 만화계를 수십 년 동안 지켜보았을 때 실력이 퇴보하는 친구는 편무옥 밖에 없었다. 보물섬 등 온갖 곳에 소개를 시켜주었는데 그는 내가 봐도 재미없는 작품을 냈다. 그림은 뛰어나지만 스토리와 전개력이 떨어진 탓이다.”
편무옥의 완성품을 강철수가 살짝 튜닝하면 시장에서 먹혔다. 편무옥에겐 강철수만한 감각이 부족했다. <나는 복서>는 발표 20년 후 편무옥에 의해 리바이벌이 됐다. 젊은 시절 동고동락했던 김철호가 허락을 해준 건 물론이다.
데뷔작을 하나 발표하긴 했지만 자작은 늦어졌다. 마침 기회가 왔다. 1970년대 초중반 성인만화 붐이 일어났다. 고우영, 강철수 이외에 여러 작가가 성인만화라는 새로운 시장에 뛰어들었다. 1960년대~70년대의 대표적인 베끼기 만화가 박향수도 때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눈에 들어온 파릇파릇한 ‘기술자’가 김철호였다. 사업가적인 센스가 발달한 박향수는 비교적 높은 원고료를 제시하며 희대의 조폭 유지광이 쓴 화제의 자서전 <대명>을 김철호에게 내밀었다. 1974년 발행된 <대명>은 곧바로 표지에 ‘향수’란 작가명을 단 만화 <유지광의 혈서 : 주먹천하>로 개작됐다. 물론 그림은 몽땅 김철호가 그렸다. 이 작품의 큰 성공으로 향수는 만화 시장에서 부활했다. 이듬해에는 <유지광의 혈서 : 주먹천하>를 본뜬 조자룡의 만화 <유지광의 혈서>가 출간되기도 했다.
김철호는 청소년기부터 복싱에 푹 젖어있었다. 1966년 김기수가 WBA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이 된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김기수의 코치인 미국인 보비 리처드의 이름을 따서 지어준복싱 체육관이 삼청동에 살던 김철호의 집 바로 아래에 자리했다. 그에겐 당시 복싱계를 주름잡던 이창길, 이세춘, 김기수 등이 운동하는 모습을 보는 일이 일상이었다. ‘복싱 만화는 자신 있다’는 생각이 그를 항상 미소 짓게 했다.
이미지 : 김철호가 그렸지만 향수이름을 달고 나온 만화 유지광의 혈서 : 주먹천하(1974년)
김철호는 복싱 마니아에서 전문가로 변해갔다. 1973년 8월 유명한 복싱 월간지 판치라인이 창간됐다. 그는 1974년부터 판치라인에서 만화로 복싱계의 한 달을 정리하는 ‘시사만평’과 ‘복서앨범’ 코너를 연재하면서 내로라하는 국내 유명 복서들을 다 만나고 인터뷰할 수 있게 됐다. 김철호라는 만화가도 판치라인을 통해 복싱 팬들에게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김철호는 강철수의 복싱 만화도 도맡아 그렸다.
“내가 너무 권투에 빠져 있다 보니 강철수도 (권투에) 관심을 갖게 됐다.”
<유지광의 혈서 : 주먹천하>를 통해 진가가 드러나면서 여러 출판사들이 그에게 성인만화를 제안했다. 김철호가 자작으로 <유지광의 혈서 : 주먹천하>와 동시에 진행하게 된 또 다른 성인만화는 <이소룡의 호투(虎鬪)>였다. 1973년 무렵 우리나라 극장에서 이소룡 영화 <정무문> <당산대형> <용쟁호투>가 잇따라 개봉하면서 이소룡 열풍이 불어 닥쳤다. 김철호 역시 극장에서 이소룡을 만나고 팬이 됐다.
“이소룡의 발 스텝은 무용하듯 기품이 있었다. 영화 전개가 만화와 비슷해 크게 공감을 했다. 사람을 사로잡는 눈빛, 복싱보다 더 아름다운 격투 신...!”
<이소룡의 호투>는 ‘김철호’란 이름을 만화팬들에게 각인시켰다. 이소룡 만화는 시리즈로 이어졌고, 1982년 어깨동무에 연재한 <나간다 비룡권법>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미지 : 김철호 작가의 <이소룡의 호투>
복싱이란 운명이 김철호에게 시시각각 다가왔다. 1970년대 말 세계적인 멕시코의 경량급 철권들이 이 시기를 빛내고 있었다. 홍수환을 두 번이나 이긴 WBA 밴텀급 챔피언 사모라와 WBC 밴텀급 챔피언 카를로스 사라테는 각각 29전 29승(29KO), 45전 45승(44KO)인 상태에서 논타이틀전으로 1977년 맞붙었다. 세기의 대결이었다. 한국에서 복싱 붐을 일으킨 두 멕시코 영웅이었다. 1970년대 초반의 전설적 KO왕 루벤 올리바레스(밴텀급, 페더급), 1980년을 전후해 전성기를 맞은 카운터의 제왕 살바도르 산체스(밴텀급, 페더급) 등도 한국에서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김철호는 1980년 무렵 한국 소년이 멕시코로 이민을 떠나 그곳에서 복싱 영웅들을 평정하는 만화 <멕시코의 KO왕>을 펴냈다. 주인공은 카를로스 사라테를 KO로 이겨버린다. 당시 이보다 더 짜릿한 판타지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김철호의 원고료는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삼류 수준의 원고료였다. 여전히 입맛에 맞고 자신에게 협력하는 일부 기성 작가들만 특별대우한 합동출판사는 젊고 재능있는 작가를 푸대접했다. 합동출판사의 한계였다. 기성 작가들이 물러나면 그 때 원고료를 개선해주겠다는 말을 들은 김철호는 그 자리에서 합동출판사를 박차고 나왔다. 박향수가 베끼기 만화가의 대명사로 남아있지만 김철호는 한 가지 부분에선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박향수는 (다른 작가나 출판사와 달리) 금전거래만큼은 깨끗했다.”
전두환 정권의 등장은 아무도 예상치 못하게 각질화된 만화계에 ‘균열’을 초래했다. 1980년의 만화계는 여전히 합동출판사와 한국일보 양사의 담합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합동출판사가 버린 작가를 한국일보가 받아주지 않는다는 묵계가 지켜지는 상황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통금을 풀고, 출판의 자유를 허용했다. 그것은 정부가 일부 출판사만 허용한 만화 출판을 다른 출판사들도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청계천에 자리한 설립한 백조문고(대표 윤달선)가 김철호를 스카우트했다. 대룡출판사는 거액의 돈을 들여 만화가들을 모았다.
계엄사의 검열이 박정희 정권 때보다 융통성 있던 것도 변수로 작용했다. 기존 검열의 기준으로라면 복싱 만화의 경우 세 컷 이상 때리는 장면을 연결할 수 없었다. 몰아붙이는 장면에서 아나운서나 관객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도 검열의 폐해였다. 계엄사 시대에도 만화가들은 ‘설마, 설마’하면서 자기검열을 벗어나지 못했다. 완화된 검열의 첫 수혜자는 바로 1983년 발표된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이었다. 김철호는 <공포의 외인구단>을 앞에 놓고 복싱 만화 <스콜피오>를 힘차게 그려나갔다. 미국에서 형이 유명복서였다가 사고로 죽자 동생이 형을 이어 링을 평정하는 이 만화는 멜로까지 가미하며 대본소의 절대강자로 떠올랐다. 1980년 초반 경량급 강타자 루페 핀토르, 제프 챈들러, 중량급 강타자 레너드, 헌즈, 헥토르 카마초 등이 모두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작품이었다.
<스콜피오>의 후속 <공포의 슈퍼스타>는 씨름선수에서 복서로 전향한 주인공이 경량급에서 출발해 중량급 선수들까지 잡는다는 설정으로 인기를 끌었다. 한창 이만기가 떠오르던 시절이었다. 이 만화에선 래리 홈즈, 토마스 헌즈 등이 주인공에게 굴욕을 당했다.
김철호 복싱 만화의 묘미는 항상 KO였다.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만화 <슬램덩크>가 농구의 만화의 교과서가 된 듯이.
김철호는 <공포의 슈퍼스타>의 상상력을 확대해 1987년 단행본 <체급없는 복서>를 펴냈다. 권투를 아는 사람들에겐 다소 황당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주인공 성일의 아버지는 돈으로 유망주를 스카우트하는 황제체육관의 고 회장에 맞서다 돌연사 한다. 성일은 황제체육관을 몰락시키기 위해 그 체육관 소속의 챔피언들을 하나씩 쓰러트려 나간다. 성일의 원래 체급은 주니어플라이급. 성일이 마지막으로 대결해 승리한 상대는 미들급이다. 주니어플라이급과 미들급은 무려 11체급 차이가 난다. 현실에서 불가능할 것 같은 김철호의 만화적 상상력은 21세기 들어 실현됐다. 필리핀 복싱 영웅 매니 파퀴아오는 플라이급에서 시작해 웰터급 챔피언까지 오르며 8개 체급을 석권했다. 김철호의 상상력을 현실화한 철권이 바로 파퀴아오다. 김철호의 주인공 성일이는 최경량급에 속하며 몸집도 작지만 날렵하고, 무엇보다 중량급의 주먹을 가지고 있다. 파퀴아오의 타고난 조건이 정확히 그러하다.
김철호는 만화를 통해 복싱 세계의 현실과 이면을 조명하고자 했다. <체급없는 복서>의 황제체육관 고 회장은 과보호해 세계무대에서 통하지 않는 선수들을 육성한 프로모터들을 상징한다. 기자들이 몰려와 고 회장에게 묻는다.
“세계 무대에서 싸워도 믿을 만합니까? 국내 전문가들은 항간에 황제체육관의 챔피언들은 사업에 의해 만들어진 종이 챔피언들이라고 비난하던데요?”
<체급없는 복서>에서 성일과 황제체육관의 플라이급 챔피언 김태석이 대결하기 직전, 팬들이 신이 나 떠드는 대사는 사실 작가의 목소리다.
“IBF 플라이급 챔피언 김태석과 무체급 복서 성일과의 대전, 정말 신나는 일이야.”
“맞아. 요즘 프로복싱이 자꾸 저질 경기로 인기를 잃어가고 있는 만큼 이런 대결은 자주 있어야 돼.”
“프로야구, 프로씨름이 자꾸 인기를 끄는 이유는 라이벌끼리의 대결이 자주 벌어지기 때문이라니까.”
“맞아. 프로복싱도 김태석과 성일처럼 라이벌전을 자주 가져야 해.”
욕심 많고 능력 없는 매니저와 종신계약으로 실력을 발휘 못하는 선수들도 꽤 많았다. 그런 매니저는 ‘넌 나 아니면 안돼’라는 심보로 선수를 옭아맸다. 김철호가 지목하는 대표적인 선수가 권철이다. 김철호는 이 선수를 두고 “진짜 잘 하는 선수였다. 중남미에 풀어놓았으면 날아다녔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1980년 프로 전향한 권철은 이듬해 한국 신인왕(밴텀급)을 차지하고 1987년 27승(19KO) 1무의 전적으로 은퇴했다. 10연속 KO승에 무패의 전적을 가지고 ‘밴텀급의 핵주먹’이라 불린 선수가 어떻게 세계타이틀 매치도 못해보고 링을 떠났을까? 김철호는 권철과 각별했다고 한다.
이미지 : 팬들이 황금의 주먹을 가졌지만 세계 챔피언은 되지 못한 복서로 기억하는 권철
“권철의 매니저가 능력이 없어 큰 경기를 못했다. 그렇다고 매니저는 놔주지도 않았다. 권철이 우리 화실에 자주 찾아왔다. 경기가 없으니까 나중에 체중이 불었다. 김사왕은 주먹만 있지 스텝이 없지만 권철은 주먹은 주먹이고, 몸도 빨랐다. 구석에서 맞고 있던 권철이 ‘투닥’하면 상대방이 한 방에 쓰러져 있곤 했다. 경기가 참 재미있었다. 사모라는 수비가 좋지 않았지만 권철은 수비와 더킹까지 갖췄고, 일본이나 필리핀 등 해외 복서나 상위 체급 선수들을 상대로 승리했다. 김태식 이상으로 인기 있는 복서였다. 라이벌전을 했으면 권철은 톱스타가 됐을 거다. 모두들 그걸 알았다.”
당시 매니저, 트레이너, 프로모터들이 김철호의 조언을 받아들여 정신 차리고 라이벌전을 만들어나갔다면 지금 어떻게 됐을지는 모르겠다. 전 WBA 밴텀급 챔피언 홍수환은 “장정구와 유명우의 대결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아쉽다. 일본은 세 체급을 석권한 가메다 고키와 모두 챔피언이 된 그의 삼형제 같은 스타를 배출해 지금도 복싱 열기가 뜨겁다. 복싱의 몰락은 국내 복싱 관계자들이 정신 차리지 않은 탓”이라고 진단한다.
김철호는 여기에 직격탄을 날린다. “자기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프로복싱이) 팬들 생각을 안 쫓아간 게 패인이다. 그건 자살이었다.”
1980년대는 김철호의 전성기였다. 1980년을 맞이했을 때 그의 나이는 서른 넷. 대본소용 복싱 만화를 필두로 만화잡지에서도 <나간다 비룡권법>(어깨동무), 김철호의 3대 축구 만화 <그라운드의 표범> <빵야 빵야>(보물섬), <0번 골잡이>(소년중앙), <바퀴벌레 한쌍>(아이큐점프), 프로레슬링 만화 <액션헐크>, SF 만화 <우주 하이에나> 등으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작가가 됐다.
김철호는 1990년부터 다음해까지 스포츠서울에서 성인만화 <파워게임>을 연재했다. 대본소, 만화잡지, 스포츠신문에서 모두 팔리는 주요 작가였다. <파워게임>을 그만둔 사연이 있다. 세 가지를 같이 하다가 힘에 부친 그는 스포츠서울에 사정해서 하차했다.
그는 다른 곳에 한 눈 팔지 않고 <터프가이>, <날제비와 애니깽> 등 대본소 복싱 만화로 1990년대를 내달렸다. 2000년대 중반쯤엔 김철호의 주무대인 대본소라는 시장과 복싱, 양쪽 모두 우리사회의 사각지대로 밀려나 버렸다. 복싱 대신 새로운 무대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종격투기였다. 2000년대 중반 이종격투기가 꽤 인기를 끌었지만 이종격투기 만화는 그에 비해 별로 많지 않았다.
복싱, 씨름, 레슬링 만화는 아주 작가를 애먹이는 장르에 들어간다. 김철호는 우직한 작가다. “이런 만화는 다른 장르를 그리는 것보다 배의 정성이 들어간다. 무협만화도 물론 힘들다. 그러나 위의 네 가지 만화는 남자들이 옷을 벗고 얽히는 모습을 그린다. 인체를 모르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다른 종류의 만화를 그리면서 딴 곳으로 빠질 여력조차 없었다.”
김철호는 더 어려운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에게 이종격투기는 복싱의 연장선상에 있는 스포츠였다. <케이오 아티스트>는 2008년 스포츠칸에서 연재한 성인 취향의 이종격투기 만화였다. 온 몸이 무기인 사람들의 격투 극화를 극소수의 인원으로 매일 스포츠신문에 연재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케이오 아티스트>에서 바람둥이인 주인공 날제비가 UFC의 전설들을 차례로 꺾어나가는 모습은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통쾌함을 선사한다. 이 만화에 등장하는 많은 대결 중에서 날제비와 B.J.팬의 대결이 하이라이트다. 비록 만화이지만 컷과 컷 사이에서 순간적으로 결정타가 터져 나올 듯한 긴장감은 김철호 이외의 다른 만화에선 느껴보기 어려운 부분이다. 모든 여자는 날제비를 좋아하고, ‘오는 여자 마다하지 않고 가는 여자 잡지 않는’ 날제비의 취향이 선수들의 동물적 움직임과 교차편집 되며 즐거움을 선사한다. 매체에 적응하려는 작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문 연재 도중에 일방적으로 중단됐고, 단행본 인세는 출판사에게 떼였다.
어찌 보면 김철호의 아킬레스건은 화실 운영 체제일지도 모른다. 그는 대본소에서 다른 만화가들과 경쟁했지만 종수 경쟁을 하지 않고 버텼다. 대본소 만화가들이 ‘공장’이라는 욕을 먹으며 양으로 승부를 할 때도, 김철호는 남의 스토리 한 번 쓰지 않고, 스태프를 두더라고 모든 과정을 혼자서 하다시피 했다.
“내가 서른 두세 살이 될 때까지 밤샘을 가장 많이 한 만화가였을 거다. 그러다 몸에 한계를 느껴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에 자는 스타일로 바꾸었다. 공장을 차리지 않았기 때문에 종수에선 떨어졌다. ‘일하는 로봇’이라 불릴 정도로 몸에 파스 투성이였다.”
물론 그를 거들어준 스태프가 있었다. 숙련된 인력을 유지하는 건 화실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다. 이제까지 그가 밑에 두고 일한 인력 가운데 다섯 명 정도가 집을 사서 독립했다. 김철호가 그렇게 해준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우리 집에서 반경 1.5km 안에 집을 얻으면 배신을 안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주었더니 결국 더 멀어졌다. 잘 그리라고 야단을 치면 딴 곳으로 옮겨갔다. 그런 친구들은 대부분 돈을 벌면 흥청망청 노름하고 유흥으로 탕진했다.
나는 ‘원고 수리공’이었다. 밑에서 일하는 아이들이 만든 원고는 다 고쳤다. 10년 동안 일했다는 사람들이 대충대충 했다. 원고비만 받을 뿐 책임감이 부족했다. 같이 일한 후배들에게 울면서 사정했다. 알면서도 안 되는 걸 어떡하나. 나는 돈 쓸 시간이 없어서 돈을 벌었다. 걔네들은 날 돈벌어주었다고 생각하겠지만.“
목숨 걸고 원고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그것이 프로와 그렇지 못한 자와의 차이이지 않을까.
1970년대까지 대한민국 국민들은 복서가 아니더라도 헝그리 정신으로 살았다. 1980년대 접어들면서는 각 분야에 부(富)가 흘러들고, 돈으로 대상의 가치를 평가하는 프로의 개념이 적용됐다. 김철호가 속했던 프로복싱과 만화의 세계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게 풍부해졌다. 프로복서는 손쉬운 상대를 골라가며 돈을 만질 수 있었고, 만화 화실의 스태프들은 어느 정도 실력만 있으면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돈 벌이를 할 수 있었다.
프로의 세계가 베푼 풍요로움은 역설적으로 ‘너를 깨뜨려야 내가 산다’는 프로의 규칙을 지키기 어렵도록 한다. 이것이 프로의 두 얼굴이자 악마적 속성이다. 프로의 마성에 취한 자는 곧 파멸하게 된다. 김철호는 자신의 복싱 만화 속에서 그 점을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김철호 같은 프로는 언제나 고독한 법이다.
* 디지털만화규장각 매거진의 프로그램상의 이유로 일부 도서명을 한글로 표기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