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만화(디지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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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무한캔버스의 가능성: 스콧 맥클라우드의 〈The Right Number〉

<지금, 만화> 14호 Critique 에 실린 글입니다.

2023-04-12 임재환

세계는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이라는 시대적 전환의 중심에 서 있다. 디지털은 인간의 지식은 물론 모든 감각적 경험의 방식을 바꿔놓고 있다. 시각적 경험, 청각적 경험에 이어 작년 말 일본에서는 TV화면에서 맛을 볼 수 있는 시료 전송 기술까지 탑재한 맛보는 TV’를 개발했다고 하니, 이제는 미각적 경험조차 디지털 데이터로 전송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ICT기술의 발전과 기술 간 결합이 디지털 시대로의 전환을 가속하고 있다. D(Data). N(Network). A(Artificial Intelligence) 기술의 융합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파생된 소통의 단절을 메웠고, 클라우드 스트리밍 기술과 인공지능의 기술발전은 콘텐츠 창작환경의 효율성 변화를 야기하고 있다.

스콧 맥클라우드는 2001년도에 출간한 만화의 미래에서 무한캔버스 (Infinite canvas)라는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디지털 만화에서의 서사 전개방 식으로 세로 스크롤 만화(Vertical comics)를 비롯하여 가로로 길게 펼쳐진 만화 (Horizontal comics), 그리고 계단식 만화, 회전하는 정육면체의 만화, 칸의 내부에 다음 칸을 넣는 방식의 확대형 만화(zooming user interface comics)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디지털 만화를 예측하였다. 맥클라우드는 직접 디지털 무한캔버스 실험을 이어나갔는데, 세로 스크롤 만화인 ZOT(2000)의 공개에 이어서 주 밍(zooming) 방식의 The Right Number(2003)BitPass 소액결제 시스템으로 판매하기도 하였다. 기존의 규격에 얽매이지 않는 무한한 작업공간이라는 개념 은 작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작가들은 플래시에 기반한 확장된 캔버스를 구 상해내거나 하이퍼텍스트 개념의 성과물을 만들어냈지만 예측과 달리 창작자나 이용자의 지속적인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The Right Number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 있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첫째로, 새로운 만화읽기 규칙의 경험을 제공하였다. 작품을 실행하면 별도의 브라우저 창이 뜨고 만화를 읽는 방식에 대해 설명한다. 독자는 화면 하단에 놓인 화살표를 마우스로 클릭하거나 키보드의 스페이스바나 화살표를 눌러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화살표 좌우의 숫자는 현재의 프레임을 가리키며 이 프레임 번호를 눌러 비선형 방식으로 작품을 감상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주목받은 이유는 플래시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다음 칸이 화면 중앙에서 확대되는 새로운 읽기 방식으로 전개를 만들어 냈다는 점이다. 맥클라우드는 이러한 연출에 대해 중앙의 구멍이 있는 칸의 연속적 이동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는 마치 독자가 긴 터널을 지나는 듯한 새로운 만화의 읽기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놀라운 점은 이렇게 생소한 읽기 방식에 이내 익숙해져 정중앙에 위치한 다음 칸의 작은 이미지나 그 이미지가 확대되는 애니메이션 동작이 만화를 읽는 독서활동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The Right Number는 기존의 출판만화에서는 재현할 수 없는 새로운 방식의 만화읽기를 통해 웹에서의 만화를 재정의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기존의 인쇄 패러다임에서의 구조적인 독서방식은 디지털 기술로 인하여 다양한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하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다수의 온라인 만화 연재 사이트가 존재하였으나 페이지뷰 방식의 디지털 만화와 스캔본 만화 일색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첫 장편 스크롤 웹툰으로 꼽히는 강풀 작가의 순정만화다음만화 속 세상에서 연재되어, 총 페이지뷰 3,200만 회, 일일 최대 방문수 200만 회, 댓글 25만 건이라는 진기록을 남겼다. 이후 인터넷 포털은 물론 온라인 커뮤니티, 포털사이트의 게시판, 개인 홈페이지 등에서 다양한 실험을 거듭하던 청년 작가들은 글로벌 디지털 코믹스의 기준이 된 세로스크롤 방식의 웹툰을 형식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디지털 만화의 새로운 연출방식에 대한 탐구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칸 안에서의 애니메이션 무빙, 성우 더빙, OST 활용 등 다방면의 멀티미디어 기술의 접 목과 실험이 대표적이다. VR웹툰에서의 만화 재현도 의미 있는 시도로 볼 수 있 다. 그 중 디지털 만화의 애니메이션 연출은 독자가 시간의 주도성을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제한적으로 시도되고 있다. 독자는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와 달리 다음 칸으로의 진행이 온전히 자신의 통제와 해석 속에서 이루어지는 과학과 예술의 조화로운 집합체로서 디지털 만화를 즐기고 있다.

둘째로, The Right NumberBitPass라는 소액결제 시스템을 통한 개인 작가가 주도한 디지털 유통의 시도였다. 당시 작품당 판매액은 25센트로 저렴한 편이었지만, 기존 인쇄물에서 받는 창작자의 보상 8%에 비해 85%라는 높은 비 중을 창작자가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판매성과는 기대에 못 미쳐 BitPass의 서비스가 운영이 중단되기까지 4년 간 대략 2,300개 판매에 그쳤다.1 2000년대 초반 국내에서는 인터넷 만화 사이트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당시 학산문화사, 서울문화사의, 대원씨아이 등 전통적 출판만화 유통사를 비롯하여 코믹스투데 이, N4, 코믹플러스 등 온라인 만화 사이트들이 운영되었으며 성인만화를 중심 으로 유료화를 시도하였다. 이후 빅테크 기업들이 주도하는 현재까지도 창작자 에 대한 지분은 과거 출판만화 시장과 유사하게 원고료와 ()인세라는 개념이 유지되고 있다.

출판사와 계약시 작가가 수익으로 얻는 인세 5~10%, 일반적인 웹툰 플랫폼에서 작가에게 돌아가는 수익은 35~50%인 점에 비해 매출액의 90%에 해당하는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개방형 플랫폼이 웹툰 작가들의 독립적으로 창작활동을 영위할 수 있는 방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포스타입’, ‘딜리헙과 같이 작가주도의 온라인 연재 공간으로서 개방형 자율 퍼블리싱 플랫폼이 매출액에서 수수료를 뺀 부분은 모두 창작자의 수익이라는 점에서 창작자들에게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와디즈텀블벅등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을 통한 전자책 펀딩 프로젝트도 플랫폼 수수료와 결제 수수료를 제외한 금액을 창작자가 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림1> 〈The Right Number〉 part 1

<그림2>〈The Right Number〉 part 1

현재 The Right Numberpart 1, 2편은 스콧 맥클라우드 홈페이지에 링크되어 있지 만, 어도비 플래시 서비스 지원 중단으로 작품 재생은 불가능한 상태이다. http://www.scottmccloud.com/1-webcomics/trn-intro/index.html


The Right Number작품은 3부작으로 기획되어 그 중 2편이 공개되었으며, 3부작의 마지막 편은 작가의 손목부상과 차기작이었던 만화의 창작원고제작을 위해 미뤄져 현재까지 공개되지 않고 있다. 새로운 만화읽기 방식과 창작자를 위한 소액 지불 방식에 대한 맥클라우드의 열정적인 실험은 마침표를 찍지 않은 채로 여전히 진행 중이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만화의 창작환경을 다양하게 변화시켜 왔다. 창작자 는 더 쉽고 빠르게 창작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용자는 더 빠르고 편리하며 실감나게 콘텐츠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차세대 디스플레이 기술은 가상의 공간을 너머 현실의 공간을 변화시켜 나아갈 것이다. 폴더블, 롤러블, 투명 디스플레이, 홀로그램 등 새로운 디스플레이 장비들에 둘러싸여 새로운 공감각적 몰입환경이 구현될 것이다. 또한 기존 2차원(종이, 모니터 등)에서의 수용 경험이 가상현실과 혼합현실 등 3차원 입체 공간에서의 수용 경험으로 전환되고 있다. 게다가 센서와 연동된 반응형 기술이 실감 콘텐츠와 어우러져 복합적으로 구현 되며 높은 몰입감과 상호작용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창작자와 연구자 들은 디 지털 만화형식을 현재 모바일 디스플레이에 특화된 세로 스크롤 방식에 국한하 지 말고 디지털 만화에 대한 형식적 실험을 계속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과 함 께 진화하는 미디어 유저 인터페이스 환경에 만화가 어떻게 이식되고 적용되어 야 할지, 뉴미디어에 대한 기술적 접근을 고민해야 한다. 웹툰을 소비하는 독자 반응에 귀를 기울이며, 차세대 디지털 만화의 인터페이스와 시퀀스에 대한 창의 적인 실험이 지속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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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환

만화평론가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콘텐츠스쿨 교수
「웹툰 비평의 유형별 질문법」 저자
2018 신인 만화평론공모전 우수상, 2019 부천만화대상 우수학술 연구상
前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포럼 위원, 前 충남정보문화산업진흥원 경영기획실 책임연구원
교토 세이카대학 만화학과 졸업, 공주대학교 만화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