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만화(디지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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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미즈 레이코의 〈22XX〉: ‘음식을 먹는다는 것’의 의미

<지금, 만화> 14호 '이럴 땐 이런 만화/ 기후위기 시대 속에서 보면 좋은 만화' 에 실린 글입니다. <22XX>/시미즈 레이코

2023-04-15 최기현


지구 온난화의 원인 중 하나가 풍요를 누리는 현대인의 삶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흔히 중공업이나 제조업, 농업 등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가 기후위기를 초래한다고 생각한다. 알고 보면 거대 경제 주체만이 아닌 개인의 소비, 특히 풍족한 식생활도 온실가스 배출에 한몫한다. WHO에 따르면 세 계 인구의 4분의 119억 명의 성인과 5세 이하 아동 4,100만 명이 과체중이거나 비만이라고 한다. 우리는 생활에 필요한 음식을 섭취하는 것을 넘어 음식과잉소비 시대를 살고 있다. 인간이 음식을 섭취하는 이유는 식욕 때문이다. 식욕은 매 슬로우의 욕구 5단계에서 가장 아래에 위치하며, 가장 기본적이면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데 밑바탕이 된다.


<그림1>〈22XX〉 Ⓒ 시미즈 레이코


22XX는 시미즈 레이코의 SF 단편선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작품이다. 잭은 예티 반란군에게 납치된 크리그랜드의 제1왕녀를 구출하기 위해 비가 많고 열대 우림이 펼쳐진 무법지대 라롱주에 진입한다. 이곳은 사납고 미확인된 육식동물과 인간을 사냥하는 포트리스인이 살고 있기 때문에 원주 민도 좀처럼 발을 들여놓지 않는 곳이다. 포트리스인은 인간이 아니다. 낮에는 아름다운 미모로 남자를 유인하고 밤이 되면 잡아먹는 종족이다. 특이하게도 포트리스인이 먹기 위해서 사람을 해치는 것 은 라 롱주에서 살인이 아니다. 식사를 신성한 의식으로 여기는 포트리스인 소녀 루비와 잭이 만나면서 스토리는 시작된다.

22XX에서 사건을 매개하는 소재는 음식을 먹는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잭의 지인 프레디는 잭을 원망한다. 이전에 파괴공작원이었던 잭은 프레디의 형 로저와 같은 감옥에 갇힌 적이 있다. 로저와 잭은 두 사람 몫밖에 없었던 식량을 똑같이 나누며 굶주림에 싸웠고, 3개월 후 발견되었을 때 로봇인 잭만 혼자 살아남았다. 좀 더 일찍 잭이 먹지 않아도 되는 로봇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형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원망한다.


<그림2>〈22XX〉 Ⓒ 시미즈 레이코


잭은 인간에 가깝게 만들어진 로봇이다. 시간이 지나면 배가 고파서 음식을 먹어야 하고, 땀이 나고 다치기도 한다. 로봇에게 음식을 먹는 것 이란 로 내려간 음식이 분쇄용 칼날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서 진공상태에서 순식간에 냉동건조되어 버려지는 행위밖에 되지 않지만, 잭은 식욕을 느끼도록 설계되었다. 섭취한 음식이 살도 피도 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면 또 무엇인가 먹고 싶은 잭은 의미 없는 식사가 괴롭기만 하다.

한편 포트리스인에게 음식을 먹는 것은 가장 신성한 의식이다. 남들 앞에서 결코 음식을 먹지 않고, 다른 사람이 먹는 모습을 보는 것도 금기시된다. 포트리스인에게 사람을 먹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지식, 이상, 장점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이어 나간다는 의미이다. 상대가 훌륭한 사람일수록 그 사람을 닮고 싶고 그 사람의 몸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죽은 사람의 몫만큼 목적을 이루며 살고 싶어 한다.

시미즈 레이코는 22XX에서 인간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음식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로봇, 인간을 먹는 포트리스인이, 평범한 식사를 하는 인간보다 훨씬 더 인간다워 보인다. 로봇과 포트리스인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맛있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 음식을 먹고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음식은 쉽게 버린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포트리스인 입장에서는 먹지도 않는데 사람을 해치는 인간이 훨씬 야만스럽게 느껴진다.

루비, 넌 나와 네 아버지의 생명을 희생으로 살아가는 소중한 생명이다. 하지만 만약 앞으로 네가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을 만난다면, 만약 네 자신보다 그 사람이 살아남기를 바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네 생명을 아끼지 말고 그 사람에게 주어라. 자신이 살아서 아이를 낳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네 생명은 그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루비의 엄마가 죽기 전 루비에게 한 말이다. 포트리스인은 사람을 먹는 것을 신성하게 생각했다. 더 나아가 소중한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것을 상대와 하나가 되는 것으로 의미를 부여했다. 나중에 잭은 식욕을 느끼지 않도록 프로그램을 바꾸지만 루비를 통해 깨달은 식사의 진정한 의미를 기억한다.

22XX음식을 먹는 것을 통해 필요 이상으로 음식을 과잉소비하거나 입에 맞지 않으면 쉽게 버리는 우리의 모습에 경종을 울린다. 당장 나부터라도 음식을 대할 때 감사하는 마음으로 과식하지 않고 적정량만 먹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건강을 위해서든, 자연을 위해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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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현

문화예술 분야에서 일하며 퇴근 후에 만화를 읽고 글을 씁니다. 공연, 전시를 관람하는 것과 만화 정책에 관심이 많습니다. 최근 글로는 <만화산업 중장기 계획(5차)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과제들>(2022 대한민국 만화평론공모전 우수상),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