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와 생각하니, 우리 세대는 이미 기후변화 부문에 있어 독보적인 인물을 자그마치 한 명이나 보유하고 있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라고, 기후변화를 흥미로운 소재 정도로 취급하는 대부분 창작자와 달리 미야자키는 인간과 자연과… 뭐 그런 것을 평생에 걸쳐 집요하리만치 다뤄왔다.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창작자 중 그만큼 기후 위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이는 없는 것 같으니, 친애하는 감독을 떠올리지 못한 대가로 나는… 다른 기후변화 부문 수상작을 찾아 먼 여정을 떠난다. 〈물 위의 우리〉는 당장 몇 주 전 타 의뢰에서 써먹은바, 기후변화 위기라는 보다 구체적인 지침이 주어진 지금, 그로 인해 유발된 갈등보다는 기후변화 그 자체에 집중하는 작품을 다뤄보고 싶었다. 그런 나를 옆에 보던, 친구이자〈고기인간〉의 팬인 A가 정확하게 나의 고민을 눈치채곤 오롯이 기후변화와 관련된 작품 하나를 슬쩍 추천한다. 그렇게 알게 된 것이 바로 〈노루〉다.
▲<그림1>〈노루〉 Ⓒ 안성호
평론가라는 말은 여전히 낯설지만, 그럼에도 내가 작품을 고르고 글을 쓰는 일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내용적인 측면보다도) 주제를 어떻게 전달하는가, 즉 형식이다. (덕후인 나는 또 다르지만 어쨌든) 평론가인 나를 매혹하는 건 언제나 그것이 얼마나 신선한 방식으로 사람을 설득하는가였고, 그 방식이란 단순히 파격적임을 위한 파격이 아니라 상투적인 관습을 뚫어 결국 감상자에게 닿기 위한 몸부림에 가까워야 했다. 그런 면에 있어 〈노루〉는, 20회 남짓 되지 않는 짧은 분량 안에서도 많은 고민이 담겨 있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그림2>〈노루〉 Ⓒ 안성호
〈노루〉는 기후변화로 멸망한 지구의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작품은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는 델타 행성 출신 촬영자의 시선에서 전개된다. 즉, 작품 내 카메라의 프레임과 작품 외부 만화의 컷이 일치하는 것이다. 만화는 목적도 없이 생물학적으로 살아만 있는 지구인들 가운데 유일하게 삶의 의미를 지닌 채 떠도는 노루를 시종일관 따라가며 진행되는데, 우리의 델타 행성 출신 촬영자는 사회문화연구 수행에 있어 자료수집방법 중 하나인 참여관찰법의 원칙에 의거, 연구자의 개입으로 인해 연구 대상에 관한 자료가 왜곡되지 않도록 지구인과 노루에게 그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는다(연구 대상이 식량을 빼앗기고 총에 맞아 죽어가는 데도!).
이런 형식을 굳이 취한 이유가 있을까? 해답이 명확하게 제시되지는 않지만,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렇다. 어쩌면, 그 델타 행성에서 온 촬영자는 다름 아니라 만화를 읽는 우리, 독자가 아니었을까? 다시, 나는 앞에서 작품 내 카메라의 프레임과 작품 외부 만화 컷이 일치한다고 했다. 그는 지구를 반면교사 삼아 델타 행성의 멸망을 막고자 이곳에 왔다. 우리는 기후변화 위기에 경각심을 갖고자 이 만화를 읽는다. 그는 지구의 일에 개입하지 못한다. 우리는 미래의 일에 개입하지 못한다.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야 겨우 드러나는 외계 행성에서 온 촬영자의 모습은, 아주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죽어가던 노루는 다큐멘터리 촬영자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공존’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그를 ‘고용’한다. 죽어가는 노루가 촬영자에게 내민 것은 동전으로, 그가 처음 지구를 왔을 때 어차피 지구에서는 쓸 수 없을 테니(즉, 연구자로 인한 개입이 일어나지 않을 테니) 한 아이에게 내밀었던 바로 그 동전이다. 만일 그 촬영자가 정말로 우리라면 노루가 그에게 내민 동전, 현재의 우리가 미래의 노루에게 건네고 미래의 노루가 다시 우리에게 잘 부탁한다며 건넨 그 동전이 의미하는 건, 과연 무엇일까? 해답을 찾는 것은 독자인 우리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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