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계급이 곧바로 사회주의를 지지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1980년대로 돌아가 보자. 만약 〈만화로 보는 좌파의 역사〉를 당시에 출간했다면 어떤 일이 생겼을까. 정식출간은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고 다른 방식으로 책이 나왔다고 해도 불심검문에 걸리면 영창으로 직행했을 것이다. 대낮 신촌 번화가에서 검문에 걸려 가방을 털려본 이들은 그 시절을 의미를 이해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무슨 일을 해도 24시간 나를 감시하는 거대권력이 있다는 불쾌한 사실을 말이다.
좌파, 노동자, 계급, 사회주의. 등굣길 대자보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던 용어, 익숙하지만 왠지 두렵고 갑갑한 현실을 암시하던 단어,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불사조 같 은 말이다. 책에서는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1830년대 유럽 노동자의 현실을 묘사한다. 그 들은 유토피아를 꿈꿀 시간이나 여유가 없었다. 조직화가 불가능한 환경에서 노동에 대한 자각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위해서 노조를 만들게 될 것이다.”
▲<그림1>〈만화로 보는 좌파의 역사〉 Ⓒ 장 르나우르, 마르코
단어에는 어감이 존재한다. 유사어지만 어떤 단어를 택하느냐에 따라 독자의 사유가 좌우된다. 일이나 업무라는 표현은 비교적 일상적인 어감이다. 노동이라는 표현은 어떨 까. 심각하고 무겁다는 어감에 가깝다. 근로자와 노동자라는 단어도 복잡한 어감을 가지고 있다. 노조라는 단어 역시 비슷한 어감을 가진다. 집요한 노조탄압의 역사와 이를 비하 하려는 보수언론의 논조가 복잡함을 가중시켰다.
1891년 ‘노동헌장’이라는 회칙을 출간한 레오13세는 자본가와 사회주의 양쪽을 갈라 치기한다. 그는 고용주도 노동자의 복지를 책임지고 정당한 임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국가도 사회적 입법을 통해 노동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글을 남긴다.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노조의 필요성이 레오13세의 입을 통해서 거론되기 시작한다. 노조가 권력으로부터 보호가 필요한 집단임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셈이다.
“마르크스는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온 세상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림2>〈만화로 보는 좌파의 역사〉 Ⓒ 장 르나우르, 마르코
자본주의국가는 결국 노동자 혁명을 통해 변화를 겪는다는 마르크스의 예언은 적중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본주의는 다양한 모습으로 그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다. 1989년 소련의 붕괴로 마르크스의 유령은 출몰횟수가 줄어들었다. 마르크스의 영향권 아래 있던 러시아와 중국은 그의 논리와는 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어가는 현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왜 저임금 노동자는 자본주의의 횡포에 무기력한 것일까. 이는 독재자, 국가, 무력, 다국적 기업, 미디어, 언론에 이르는 자본주의의 종속변수가 위력을 더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시간을 추가해보자. 저임금 노동자는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을 노동에 할애해야 생계가 가능하다. 여가란 자본주의 체제에서 제공가능한 일종의 결과물이다. 마르크스의 사상이 온 세상을 지배한다는 말은 의문점을 남긴다. 자본이 그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 저는 상황주의자에요.”
인간의 역사는 사상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사상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자연스럽게 ‘~주의자’라는 호칭을 받아들인다.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라는 호칭은 인간을 사상이라는 미로에 가둬버린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자신이 속한 미로에서 빠져나오면 변절자라는 불명예가 주홍글씨처럼 새겨졌다. 자신과 다른 사상을 주장하는 자를 적으로 여기고 비난과 폭력을 일으켰다. 선한 세상이라는 목적지를 공유하면서 갈등을 반복하는 미로에서 인간은 신음한다.
이병주 소설 《지리산》에는 사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군이 등장한다.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 무엇을 위해 피를 흘렸는가. 〈만화로 보는 좌파의 역사〉에 등장하는 상황주의자라는 표현이 이를 암시해준다. 그렇다. 상황에 따라 자신의 사상을 카멜레온처럼 바꾸는 인간이 기회를 얻기도 한다. 얼마나 많은 사상이 인간을 불행의 늪에 빠뜨렸으면 상황주의라라는 가성비 높은 표현이 등장했겠는가.
“개혁이라는 말은 어쨌든 좌파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림3>〈만화로 보는 좌파의 역사〉 Ⓒ 장 르나우르, 마르코
보수와 달리 진보는 변화를 추구한다는 이론은 유효기한에 달했다. 보수와 진보가 정치용어화되면서 이를 역이용하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했다. 예를 들어 중도와 진보 사이를 오가는 미국 민주당의 제42대 선거 구호가 바로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였다. 보수와 이웃사촌 간인 경제라는 화두를 민주당에서 선점한 사건이었다. 결과는 민주당 출신 클린턴 대통령의 당선이었다.
이를 반대로 해석하면 개혁이라는 용어도 경제처럼 공화당에서 충분히 활용할 수 있 다는 의미다. 이게 바로 프레임의 힘이다.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는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에서 왜 평범한 시민들이 자기 이익에 반하는 보수 정당에 투표하는가를 분석한다. 이론이나 사상의 측면에서 보면 좌파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 그럼에도 우파는 좌파에 못지않은 탄탄한 지지층을 보유하고 있다.
“좌파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전쟁터, 부서진 면상, 사상이 없는 정당, 공기처럼 의미없는 운동들.”
1789년에 발발한 프랑스대혁명 이후 230년이 넘는 세월과 함께한 좌파라는 생명체.
책에서는 좌파의 부분집합을 부의 재분배, 평등과 정의에 대한 희망, 체념하지 않는 것, 피지배자의 곁에서 지배를 증오하는 것, 세상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서술한다. 어찌 보면 협력적인 관계이면서 적대적인 관계일 수 있는 내용이다.
자, 이제 질문은 하나다. 좌파라는 호랑이의 등에 올라탈 것인가, 아니면 회색인으로 살아갈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우파라는 코끼리의 사육사가 될 것인가. 중요한 점은 어떤 이론도 인간의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좌파의 미래는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우파의 존재가 모든 계급을 끌어안을 해결책도 아니다. 좌파와 우파를 뛰어넘을 만한 이데올로기가 나오지 않는 이상에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