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만화(디지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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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상 자뷔스와 이폴리트의 〈숨을 참는 아이〉: “우리가 지금 여기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은 이미 기적이에요.”

<지금, 만화> 14호 '만화 속 인생 명대사 명장면' 에 실린 글입니다. <숨을 참는 아이>/글 뱅상 자뷔스, 그림 이폴리트

2023-04-10 박민지


숨을 참는 아이라는 심상치 않은 제목에 눈길이 갔다. 책장을 펼치자 한 컷 한 컷 손수 그린 그림으로 가득해 디지털 드로잉에 피로해진 눈이 편해졌다. 포근한 그림체지만 비 범한 상징과 은유, 방대한 지식을 담으며 한동안 멍해질 정도의 반전까지 품고 있다. 어린아이의 이야기라도 얕보지 마시길. 루이는 밀려오는 파도처럼 독자의 마음에 스며들 것이다.

<그림1>〈숨을 참는 아이〉 Ⓒ 뱅상 자뷔스, 이폴리트


서둘러! 잃어버린 점수를 따야지!

국왕이 있는 나라 벨기에에 사는 열한 살 루이는 집에 가는 길에 생각한다. ‘오늘 하루는 몇 점이지? 목표는 500!’ ‘엄마 생각 한 번도 않기’ ‘눈 감고 횡단보도 건너기숨 참기등 어려운 미션을 정해 강박적으로 수행하고 스스로 점수를 매긴다. 그렇게 도착한 집은 반기는 사람 하나 없이 어둡고 텅 비었다. 루이는 서둘러 자신만의 작은 우주, ‘루이의 방으로 들어간다. 주제별로 정보가 적힌 카드를 1,500장이나 모은 컬렉터로서 세포, 진드기, 세계의 장례문화 등 다양한 주제를 탐닉하는 이 조숙한 소년은 요즘 벨기에 국 왕을 친구 삼았다. 요정처럼 루이의 눈에만 보이는 환상의 친구지만 대화를 주고받으며 함께 잠든다. 이처럼 루이는 생각이 많고 혼잣말도 많이 하는 독특한 아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울증, 불신, 자기비하가 일상인 아픈 아이다. 무엇이 루이가 숨을 참게 만든 걸까?


바나나껍질아, 고마워!

엄마의 부재, 바쁜 아빠 때문에 늘 혼자인 루이. 학교에서도 내성적이고 위축된 생활을 한다. 그런 루이가 학교 대표로 지역발표대회에 참가하게 된다. 루이에게 발표는 누군가의 관심을 받기 위한 시도다. ‘내가 우승한다면?’이란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진다. 그러나 루이는 발표주제를 정하지 못하고 벨기에 국왕에게 주제선정을 부탁하러 갈 작정이다. 만일을 대비해 나침반과 상비약, 엄마가 들어 있는 깡통까지 챙기지만 동행하기로 한 아빠가 오지 않는다. 길바닥에서 비를 맞으며 오지 않는 아빠를 기다리던 루이는 아빠와 수만 광년쯤 떨어진 것 같다. 우주적인 고독을 극복하며 혼자서라도 기차역으로 가야 하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때 루이는 땅바닥에 버려진 바나나껍질을 밟아 미끄러지는 바람에 100나 진일보하고 엉겁결에 기차역에 도착한다. 루이는 가까스로 기차에 몸을 싣고 바나나껍질 덕분에 역까지 오게 된 놀라운 경험을 곱씹는다. 내면의 변화를 일으킬 역사적인 첫걸음이 시작된 것이다.

 

툭 그리고 탁빅 그리고 뱅!

벨기에 왕궁에 도착한 루이는 국왕은 못 만나지만 비서 덕분에 발표주제를 정한다. 바 로 빅뱅이다. ‘아주 작은 점 하나에서 우주가 만들어진다.’ 루이는 빅뱅 발표로 지역발표 대회에서 1등을 하고 전국발표대회를 앞두고 있다. 더욱 완벽한 발표를 위해 말하기 연습 책이 필요한데, 그 책은 엄마의 서재에 있다. 루이는 주인 잃은 방에서 엄마의 금색 머리카락, 엄마의 사진, 엄마에게 첫눈에 반한 아빠가 보낸 연애편지도 발견한다. 엄마·아빠의 만남은 운명일까, 우연일까? 그날 아빠가 엄마에게 반하지 않았다면 나도 세상에 없었겠지. 이처럼 탄생이란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비롯된다. 루이는 자신의 삶 역시 작은 순간에서 시작됨을 깨닫고 경이로움을 느낀다. 삶이란 기적이 아닐까?

 

, 기적 그리고 진실

<그림2>〈숨을 참는 아이〉 Ⓒ 뱅상 자뷔스, 이폴리트

숨을 참는 행 위는 죽은 것과 같다. 그것은 자학이며 자기혐오다. 루이에게 발표는 밖으로 나가는 과정이 아니라 내면에 감춰둔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이다. 루이는 중대한 진실을 왜곡하고 자기기만에 빠져 내면이 망가진 거였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 그것은 어른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루이는 바나나껍질을 밟아 미끄러지고, 아빠의 연애편지를 읽던 일상성에서 삶이 곧 기적이란 깨닫는다. 어쩌면 나는 여기 없을 수도 있었지만, 나는 지금 여기 있다. 나는 존재만으로 이미 충만하다. 이제 루이를 휘감던 두려움은 사라진다. 진실을 마주할 용기를 얻자 비로소 편하게 숨 쉴 수 있게 된다. 이제 루이의 최종 발표가 남았다. 마지막 책장을 넘길 때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것이 숨을 참는 아이의 매력이다. 이 만화를 본 사람이라면 한 번씩 루이가 건네는 위로가 생각날 것이다.


필진이미지

박민지

만화평론가
2021 만화평론공모전 신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