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죽음을 목격하기 전과 후의 마음은 같을 수 없다. 고통, 도태, 추락이 본인을 피해 가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는 걸 깨닫고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당연했던 호흡에서 불편함을 느낄 때, 가령 아무런 대비 없 이 물에 빠지거나 갑작스러운 사고 에 휘말리게 되었을 때 의지할 대 상을 찾는 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본능적인 움직임이다. 일상을 잃은 본능만이 절박하게 삶 을 염원한다.
▲<그림1>〈재생력〉 Ⓒ 조성환
‘재생’에 얽힌 욕망의 극적인 대비
영화적 연출과 여백이 많은 내러티브, 선 굵은 작화와 인물 간의 극적인 대비가 빛나는 그래픽노블 〈재생력〉은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연구가 성공한 상황을 가 정하였다. 이에 생명의 ‘재생’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를 그림과 동시에, 재생 ‘당한’ 이들의 궤적을 좇는다. 회귀와 환생을 내세우는 근래의 작품들 사이에서 〈재생력〉은 새로운 방식으로 죽음에 도전한다. 닳고 닳은 현재를 내버리는 게 아닌, 연장의 형태로 변화를 염원하는 것이다. 염원의 방향성은 무고하지만 현 실이 된 염원은 논란을 만든다.
▲<그림2>〈재생력〉 Ⓒ 조성환
안전한 일상에서 죽음은 단지 예감이다. 활력과 자유는 일상을 누리는 삶의 당연한 권리이다. 바위에 짓이겨진 다리를 복원하고, 죽은 사람마저 살려내는 ‘재생’의 성공이, 욕망의 부추김으로 이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재생력〉의 인물들은 서로 다른 욕망을 드러낸다. 누군가는 연구를 위한 연구에 매몰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연구를 훔치기 위해 혈안이 된다. 타인의 죽음에서 즐거움을 느껴 연구를 저지하려는 이도 있다. 어떠한 욕망도 없는 무심(無心)의 경지로 사는 인물은 재생에 성공하여 죽음을 비껴간 ‘머리’, 한 명뿐이다. 머리는 고양이가 보이면 따라가고, 음식이 있으면 먹는다. ‘재생 연구’의 수혜를 입은 튼튼한 다리로 마음껏 내달리는 정도가 머리의 유흥이었다. 눈앞의 현상에만 집중하던 머리의 변화는 ‘매리’를 통해 시작되었다. 매리는 재생 연구의 두 번째 성공작이었다. 머리와 매리의 교감은 욕망의 범람 속에서 유독 반짝거리며 존재감을 뽐낸다. 도구의 사용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서로를 위하며 보호하는 행위 등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 맑은 호의이다. 이들은 가르치고 배우는 일련의 과정에서 본인과 타인, 단 두 명만이 머물 수 있는 작은 신세계를 형성 해 나간다. 그러나 세상의 욕망은 이들의 신세계를 끊임없이 유린하였다. 〈재생력〉의 탐욕과 무욕의 극적인 대비는 몰입의 대상을 특정하게 하면서도, 긴박감 넘치는 전개로 관찰자 이상의 사유를 제지하고, 현상이자 일화로서 받아들이는 객관적인 타인으로 남게 한다. 이러한 거리감은 ‘재생’의 사건과 인물에게서 본인을 발견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그림3>〈재생력〉 Ⓒ 조성환
‘재생’을 대하는 태도
〈재생력〉 속 ‘재생’은 욕망의 다양성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이다. 회귀와 환생이 가지는 이점은 기존의 삶과는 다른 선택으로 더 나은 결과물을 창출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비루한 현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현실을 가꾸는 것이다. 그러나 재생은 비루한 현실의 연장이다. 최선의 선택이 최고의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고, 그 순 간의 선택들이 삶을 완성시 킨다는 사실 또한 외면하지 않는다.
외면을 쉬이 인정하는 현대의 풍조는 회귀와 환생에 열광한다. 이런 상황에서 〈재생력〉은 현재의 삶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 진다. 온전한 정신과 육체의 머리가 등장하여 재생의 삶이 허구인 듯 읊조리 는 장면이 결국 꿈으로 끝 나는 건, 결코 현실을 놓지 않겠다는 작가의 의지이다. 외면은 현실의 문제를 돌파 하는 방법이 될 수 없으며 현재의 삶에 집중해야 한다는 걸 넌지시 전하는 것이다. 〈재생력〉의 인물들은 각자의 현실을 살다가 기우고 고쳐도 해질 대로 해져 더 이상 손 쓸 수 없는 순 간을 맞았다. 끝은 예고 없이 다가온다. 지독하게 매달려 따라오는 건, 순간의 선 택을 만드는 현실의 태도이다. 〈재생력〉은 누차 묻는다. 당신이 떠올리는 ‘재생’은 어떤 모습이냐고. 당신은 어떤 ‘현실’을 살고 있느냐고.
▲<그림4>〈재생력〉 Ⓒ 조성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