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추리를 입문한 세대
다양한 매체의 콘텐츠에서 추리, 미스터리, 스릴러는 장르 자체로도, 그 뉘앙스를 풍기는 장르적 요소로도 각광을 받는 소재이다. 강자와 약자, 포식자와 피식 자,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대립을 통해 적절한 긴장감을 줄 뿐더러, 이제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진 멀티미디어에 가장 적합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콘텐츠의 서사만 전달하는 것을 넘어 다양한 음향효과를 활용하여 오감으로 소비자를 자극할 때, 독자들은 마치 자신이 콘텐츠 속 세상에서 살아 있는 것처럼 콘텐츠 안으로 몰입하게 된다. 대규모로 확장된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는 모션 체어를 기반으로 한 4DX 영화관 등을 개설하여 영화 속 감각을 끊임없이 재현하고자 하였고, 이는 추리,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 되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러한 장르적 체험은 감각의 현전이 아니라 다시 원초적인 이야기 자체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회귀하고 만다. OTT 플랫폼의 발달은 영 화관이라는 공간에서 타인과 함께 존재함으로써 공동체가 공유하는 감각보다 홀로 오롯이 집 안, 또는 스마트폰을 통해 느끼게 되는 공포에 집중하였고, 이러 한 OTT 플랫폼의 콘텐츠는 보다 양질의 콘텐츠를 저렴하게 창작하기 위해 출 판 IP 콘텐츠로부터 그 원천 소스를 발굴하기에 이른다. 현대 사회에서 추리,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가 영상 매체의 발달과 무관하게 여전히 출판 콘텐츠에서 각광 받는 이유라 할 수 있다.
▲<그림1>〈명탐정 코난〉 Ⓒ 아오야마 고쇼
물론 해당 장르들의 모습이 아직도 여전히 고전적인 형상을 유지하지는 않는다. 과거 추리,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를 접근한 방식이 유명한 해외 고전과 해 외 작가들의 작품이었다면 현대 사회에서 대중은 그보단 조금 더 편안한 방식으로 해당 장르들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 사회의 20~30대 대중 콘텐츠 문화의 소비자들이라면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를 통해 추리물을 접근했던 경험보다 대여점을 통해 아오야마 고쇼 작가의 〈명탐정 코난〉이나 아마 기 세이마루, 카나리 요자부로, 사토 후미야 작가의 〈소년탐정 김전일〉을 열광하며 독서했던 경험의 비중이 훨씬 더 클 것이다.
그렇다보니 추리,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를 만화로 체험했던 세대들이 웹툰의 세계에서 창작과 소비에 골몰하게 된 것도 자연스러운 경향이라 할 수 있다. 그 중 네이버웹툰을 비롯한 다양한 창구에서 주로 사용되는 건 추리나 미스터리 장르보다는 스릴러 장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추리라는 장르가 분절 된 장편 연재 방식에서 표현되기엔 타 장르에 비해 비교적 난해한 장르이기 때 문에 그러하다.
▲<그림2>〈소년탐정 김전일〉 Ⓒ 아마기 세이마루, 카나리 요자부로, 사토 후미야
현행 웹툰은 약 60컷에서 100컷 내외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러한 컷 내에서 보여줄 수 있는 서사의 전개는 그렇게 많지 않다. 대부분 웹소설 원작 웹툰이 한 화에 웹소설 한 편에서 두 편 내외의 내용을 압축해 보여주는 것만 보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주일에 한 편이라는 연재 환경에서 배경이나 인물 등이 버라이어티하게 변화하는 작품을 끌고 가는 것은 물리적으로 힘겨울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범인과 탐정이 치열한 알리바이 싸움을 통해 지혜를 겨루고, 작품 전체에 흩어져 있는 복선을 수습해야 한다. 웹툰에 몰입해 웹툰 내 모든 내용을 열렬히 수집하는 오타쿠적 독자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일반 대중들에게 수개월에 걸친 알리바이나 이야기를 외우고 따라오길 바라는 건 어렵다. 물론 이 같은 상황에서 추리나 미스터리 장르의 연재가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일본 출판만화 시장에서 발전한 〈명탐정 코난〉이 나 〈소년탐정 김전일〉 등의 작품이 그러하다. 다양한 만화가 어우러진 잡지만화의 틈바구니 속, 추리 만화는 트릭을 고도화하기 보단 그 트릭을 해결해나가는 주인공의 캐릭터성, 그리고 캐릭터와 캐릭터 사이의 관계성을 집중했다. 하나의 이야기를 깊이 있게 끌고 가기 보다는 빠른 호흡의 옴니버스 사건들을 연속적으로 배치하고, 복선 역시 최소화하여 3화에서 5화 내외의 구조에서 수수께끼에 가까운 트릭을 배치하는 데 힘썼다.
이러한 형식과 구조는 빠른 속도로 창작되는 웹콘텐츠 시장에서 더욱 단순하게 구현되었다. 탐정은 보다 화려한 모습으로 캐릭터성이 강화되었고, 굳이 어려운 범죄 트릭을 만들기보단 왜 이 사건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 사건으로 인해 주인공 캐릭터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를 중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윤리적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탐정 캐릭터의 천재성을 드러내기 위해, 또는 탐정 캐릭터의 각성을 보여주기 위해선 사건이 필요하다. 그리고 바로 그 사건은 대사를 허락받지 못한 시체를 중심으로 발생한다.
시체라는 시대의 상징
추리라는 장르가 성립되기 위해선 탐정이 내뱉는 모든 말들, 세계의 논리구조 가 합리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부조리의 세계와 우연이 연속되는 세계에서 탐정은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논리를 믿는 광신자일 뿐이다. 그는 남겨진 증거들을 수집해 범인을 잡을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것이 세계를 보다 더 정의롭게 만들 순 없다. 세계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선 모든 범죄자는 결국 벌을 받는다는 정의, 그리고 그 정의를 만들어내는 사회 법체제 질서이다. 즉, 추리, 미스터리 장르는 결국 사회 질서에 대한 사후의 이야기인 셈이 고, 웹콘텐츠로 제작된 수많은 추리/미스터리 장르는 이 사회를 감시하는 일종의 CCTV인 셈이다.
그렇기에 추리/미스터리 장르에서 시체의 말은 과학적 합리성 안으로 귀속된다. 고전적으로 탐정이 시체를 보고 “시체가 말을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범인을 알려주고 흔적을 알려주는 방식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시체는 감정을 이야기하지 않고, 우연과 비합리적인 상황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이미 일어난 사건의 비애감을 가중시킬 뿐이므로 끝없이 제거 당한다.
그렇기에 시체는 사람은 객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를 유지하는 부품이자 피해자와 살인자라는 관계망 속에 존재하는 유기적 대상으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자연사한 시체는 탐정이 붙지 않는다. 이 사회의 법칙과 질서가 끊어진 그 순간, 세계가 지르는 비명이 바로 시체인 셈이다. 많은 경우 탐정의 추리가 이 사회의 균열, 비틀린 질서와 맞닿는 건 우연이 아니다.
대대로 숭고한 희생은 늘 사회를 바꾸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다시금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추리/미스터리의 희생자, 그 말할 기회를 박탈당한 시체들은 숭고한 희생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추리/미스터리 장르에서 시체는 일종의 장르적 서발턴 (Subaltern)이다. 장르 속에서 스스로 성장하고 사회의 변혁을 이야기할 기회를 박탈당한 채 타인에 의해 생을 제거당한 장치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현대 사회에서 구현될 수 없을 정도로 탐정의 존재가 환상적으로 강조될수록 시체를 둘러싼 사회적 정의는 반비례하여 감소한다. 이 논리구조에 따르면, 환상적인 탐 정이 존재하지 않는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피해자는 끊임없이 생겨날 것이며, 그것은 비로소 나의 모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중 콘텐츠가 된 웹툰 속 에서 묘사된 현실은 현대 사회의 모습과 다르지 않고, 피해자의 모습도 현실과 다름 아니다. 즉, 추리/미스터리 장르의 문법이 납작하게 변화할수록 콘텐츠는 거대한 감시/질서의 체계를 긍정할 뿐,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사회에서 제거해나간다.
우리는 다시 이야기의 흐름을 현대 사회로 되돌려보자. 사회는 병들어 있고 수많은 피해자들이 초연결사회에서 다양한 출구를 통해 전시된다. 그야말로 시체 스펙터클의 사회지만 이러한 사회를 종식할 만한 천재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사회는 소설 속 장르를 통해 안전하게 규정된 합리적 세계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지금 사회에서 우리는 비합리적인 사람들을 경계하고 다시금 근대적으로 차별하는 시대에 서 있다. 사회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사람이 되고, 이들은 피해자가 되거나 가해자가 되는 이분법 사이를 끊임없이 배회한다.
▲<그림3>〈악몽의 형상〉 Ⓒ 김용키
김용키 작가가 네이버웹툰에서 연재 중인 스릴러 웹툰 〈악몽의 형상〉에서는 강호석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연쇄살인마들이 자신의 범죄 사실을 감추기 위해 꼬리를 자르며 죽인 캐릭터로, 형사들이 이 캐릭터의 과거를 추적하는 장면에서 몇 가지 그에 대한 설정이 밝혀진다. 17화에서 강호석의 친구는 그에 대해 회고하며 “부모님이 방관해 나쁜 짓을 많이 저질렀고 사람들과 섞이지 못해 성질이 괴팍해진 사회 부적응자였다”고 서술한다. 그가 일했던 회사의 팀장 역시 “화를 내는 핀트가 보통 사람이랑 완전히 달라서 대화를 하는 게 힘들었다”고 이야기한다. 이 작품 외에도 다양한 스릴러 웹툰에서 피해자나 가해자는 사회의 하층민이거나 부적응자로 묘사된 경우가 다수였다.
이러한 서술은 가해자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불행한 서사를 설명하 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런 배경이 일관적으로 서술하는 건, 우리를 두렵게 하 는 건 합리적으로 굴러갈 것만 같은 사회, 그 시스템 바깥에 존재하는 부조리 그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곳을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명령이다. 물론 이러한 명령을 끝없이 거부하려는 움직임이 존재한다. 바로 ‘스릴러’ 라는 장르이다.
공포라는 저항
우리나라의 고유한 호러 장르 중 하나인 원귀 설화는 대대로 지배층의 유교 이 데올로기를 균열 내는 방식이었다. 원귀 설화는 세 가지의 전제 조건이 필요한데 첫 번째는 여성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해야 하고, 두 번째는 여성의 죽음이 가문이나 지역 단위의 지배계층에 의해 의도적으로 은폐당해야 한다. 세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원귀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외부의 권력자나 조력자에게 발언함으로써 비틀린 사회 구조를 탈-은폐하게 된다. 국 내에서 가장 유명한 원귀 설화인 <장화홍련>의 케이스에서 비춰보아 알 수 있 듯 대부분 이러한 조력자는 마을에 새로 부임하게 된 원님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유교 이데올로기는 조선 사회의 지배 이념이었다. 원귀가 발생한 것은 이 지배 이데올로기가 병들었다는 신호이고, 원귀는 자신의 죽음을 은폐한 권력보다도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정의로운 자에게로 향한다. 대부분의 설화에서 등장하는 원님은 유교 이데올로기 사회에서 지배이념을 내면화하고 그것을 지배계급으로부터 공인받은 존재이다. 유교의 경우 괴력난신을 인정하지 않고 ‘귀(鬼)’의 개념에 고심하였다는 걸 생각할 때, 이러한 지배 계급이 자신들의 폐단을, 질서를 균열 내는 존재들에 의해서 인식하고 바로잡는 것이다. 공포는 바로 이 지점, 세계가 안정적이라는 믿음이 붕괴하는 순간에 발생한다.
스릴러 장르는 서구에서는 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등장하는 추리소설의 하위 범주로 사용되었다. 토도로프는 스릴러를 거의 범죄소설로 다루고 있었으며, 그 성격 중 주요한 요소로 폭력, 일반적으로 천박한 범죄, 인물의 부도 덕성이나 플롯의 자유로움을 꼽았다. 그러나 웹툰에서 스릴러란 공포를 내재한 상황에서 주인공과 악당의 맞대결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일반화되었다.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추리/미스터리에서 시체는 병든 사회를, 그리고 이 시체를 만들어내는 가해자는 그 병든 사회에서 비틀린 비합리와 부조리를 상징한다면, 그 안에서 치열하게 다투는 사람들은 그 사이에서 그저 살아가는, 피해자가 되기 싫어 끊임없이 발악하는 우리들의 모습에 다름 아닌 셈이다.
하지만 단지 싸우는 모습을 그려내는 것만으론 한계가 뚜렷하다. 결국 싸우는 사람은 이 사회의 법칙과 질서를 뒤튼 존재들이 아니다. 그저 이 사회에서 살아남으려고 아등바등하는 사람과 그 사회에서 버티지 못한 채 비틀린 사람일 뿐이다. 어쩌면 두 부류의 사람 모두 이 사회의 피해자일 뿐. 이것은 일종의 좀비 아포칼립스로서, 좀비 바이러스라는 재앙 자체를 내버려 둔 채 물린 사람과 물리지 않은 사람의 필사적인 꼬리잡기에 불과하다.
추리,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는 그 역사와 의미가 깊다. 웹콘텐츠 시장에서 이러한 장르에 주목하는 것, 그리고 많은 창작자들이 해당 장르를 가져와 창작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이 콘텐츠 시장에 재현된 추리,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에서 재현된 현실을 목격하는 것이 거북스 럽다. 아무래도 장편 연재의 시장에서 이러한 장르의 고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다 보니 쉽사리 악마화된 사람들과, 이미 죽어버린 시체들, 그리고 그 안에서 구조를 바꾸지 못한 채 피해자로서만 남아버리는 주인공들의 삶이 가엽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상엔 탐정이, 그리고 이러한 탐정을 사회가 만들어 낼 거란 환상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공포라는 저항 그 다음을 끊임없이 추구하자. 그러한 추구의 끝에 비로소 우리는 웹콘텐츠의 형식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추리, 미스터리, 스릴러의 형상을 볼 수 있을 것이리라.